[7월 Theme] 김지하의 시학과 미학사상을 정리한 마지막 저서: 시집 『흰 그늘』과 산문집 『우주생명학』
[7월 Theme] 김지하의 시학과 미학사상을 정리한 마지막 저서: 시집 『흰 그늘』과 산문집 『우주생명학』
  • 손정순(시인, 본지 편집인)
  • 승인 2022.07.01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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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하선생과의 인연

  지하 선생께서 2022년 5월 8일 영면했다. 부고를 접하며 얼떨떨했다. 대학시절부터 세배를 다니며 시작된 선생님과의 인연들이 영화의 엔딩 자막처럼 후두둑 내 몸속을 훑고 지나갔다.

  대학시절 그의 시는 문학행사를 비롯한 집회에서 늘 누런 광목천에 대자보로 내걸렸으며, 목메어 갈구하던 자유와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읽혔다. 뒤풀이로 이어지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던 그의 시 노래들….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내 발길도 너를 잊은 지 너무도 오래~”(〈타는 목마름으로〉)로 시작해서 “저청한 하늘 저 흰 구름 왜 나를 울리나~”(〈새〉)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애잔한 곡조를 뽑다보면 텅 빈 우리의 마음도 어느새 서서히 정화되곤 했다.

  당시 세배를 가면 선생님은 새뱃돈으로 꼭 만 원을 주셨다. 스무 살부터 쉰까지 변함없이 만 원을 주셨고,나는 선생님께서 주신 세뱃돈을 한동안 쓰지 못했다.

  일찍 결혼을 하고, 연년생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서도 나는 늘 지하 선생님 언저리에 있었다. 63빌딩에서 출판행사가 있던 어느 날 동행한 어린 두 아이는 식장을 휘저으며 비닐로 덮어둔 뷔페음식에 뽕뽕 구멍을 내었다. 얼굴이 빨개져서 아이들을 잡으러 다니는 내게 선생님께서는 “그냥 놀게 놔둬. 아이는 우주가 키우는 거야” 하시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그리고 2001년 학고재에서 열린 《김지하 묵란전》을 찾았을 때에도 아이에게 ‘건강하고 아름답게!(지하)’라고 엽서에 사인해 주셨다. 그래서인지 나의 두 아이는 지하 선생을 화가 할아버지라고 불렀다. 한복을 입고 지팡이를 짚고, 머리를 쓰다듬어준 시인이 초등학생의 눈에는 화가로 비친 것이다.

  2002년 12월, 석사논문집 『김지하 서정시에 나타난 '그늘’의 상징성』을 들고 찾아뵈었다. 졸고라 부끄러워하는 나에게 선생께서는 당신이 만든 자생어 ‘그늘’이 논문 제목으로 선택된 것에 대해 기뻐하셨다. 그 때 선생님은 처음으로 내게 난을 쳐서 선물로 주셨다. 이후 선생께서는 작은 고마움을 표현하실 때면 난과 매화, 달마 등 적절한 글씨를 새긴 그림을 보내주셨다.

  2006년 3월, 문화전문지 《쿨투라》를 창간했을 때는 당신 일처럼 무척 흥분하셨고, 나에게 새로운 ‘문화운동’을 하길 간곡히 원하셨다. 그리고 2007년 창간 1주년 때는 ‘문화혁명文化革命’이라는 글씨와 함께 매화가 그려진 휘호를 보내주셨다. 이후에도 선생께서는 늘 내게 새로운 문명에 대한 공부를 하길 원하시며 독서 목록을 일러주셨고, 당신이 메모하며 보시던 손때 묻은 책까지 보내주셨다. 또한 《쿨투라》에 촛물문화제에 대한 특집글을 비롯한 한류와 여러 담론에 대한 글을 기고하셨고, 당신의 최근 사상을 좌담을 통해 피력하기도 하셨다.

  일이 있어 서울에 나오실 때면 늘 광화문 교보문고에 들러서 혼자 들기 무거울정도로 책을 한 아름 사셨다. 간혹 전시를 보러 가실 때도 계셨고, 카페 흰돌에서, 문화살롱 마고에서 차를 마시며 요즘 읽은 책들과 문명의 흐름에 대해 말씀하셨다.

  말씀이라기보다 강연이라고 해야 할까? 내가 잘 알아듣지 못할 때면 “책 좀 읽고 공부 좀 열심히 하라”며 혼쭐을 내셨다. 여행을 좋아하는 내가 문화유산답사에 빠져 국내외로 제집처럼 돌아다닐 때면 “유홍준도 좋지만 니 고향 김윤수가 쓴 미학 책도 좀 읽어라”셨고, 도올에 빠져 기철학과 노자를 읽을 때면 “니 선생(김인환) 주역부터 제대로 공부하라”시며 당신이 읽던 휴대용 책 『역경易經』에 ‘암송暗誦’이라고 글씨를 새겨 보내주셨다. 선생님을 통해 나는 조금씩 세상에 눈떠갔고, 동학과 주역의 책장을 다시 넘겼으며, 생명사상과 미학 등 다양한 사상과 담론들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선생님은 늘 새로운 공부를 즐거워하시며 깨어있는 분이셨다. 하지만 아둔한 나는 선생님의 말씀을 일도 제대로 새기지 못하였고, 늘 허둥지둥 따라가기 바빴다.

  지하 선생님을 통해 최하림, 곽광수, 김승옥, 염무웅 선생님 등 산문시대 동인들과 깊어졌고, 산문시대 동인들을 비롯한 서울대 문리대에서 동시대를 함께했던 귀한 분들의 산문집도 출간하게 되었다.

  김승옥 선생께서 24년의 오랜 침묵을 깨고 산문집을 낼 때에는 손수 추천사도 써주셨다. “글을 못 쓰면 어떠리오. 예수 믿으며 살면 되지…” 이렇게 친구를 아낌없이 위로하던 선생께서 먼저 하늘나라로 가셨다. “온몸에 새순 돋”(김지하의 「새봄 2」)는 푸르른 5월, 사랑하는 아내 옆에 잠드셨다.

  2017년 1월 지하 선생께서는 나를 원주로 부르셨다. 홍용희 교수와 함께 원주 댁에서 선생님을 모시고 시내 카페로 갔다. 선생께서는 2014년 갑오甲午 12월 15일부터 2016년 12월 31일까지 2년에 걸쳐서 쓴 원고뭉치를 내밀었다. 1권의 시집 노트와 우주생명학에 대해 당신의 생각을 매일 쓴 노트 4권이었다. 선생께는 매체에 한 번도 발표하지 않은 미발표 신작 시집 『흰 그늘』과 신작 산문집 『우주생명학』을 내게 맡기며, 생전에 펴내는 ‘마지막 저서’라고 선언하셨다. 출판계약서에 사인하시는 선생님께 글을 안 쓰시면 많이 외로우실 텐데 앞으로 어떻게 지내실지 여쭈었다. 그러자 선생님은 이제 그림만 그리시겠다고 하셨다. ‘마지막’이라는 말에 눈물이 핑 돌았다. 하지만 믿지 않았다.

  해독이 어려운 선생님의 친필 원고는 1년 6개월의 편집 과정을 거쳐 2018년 7월에 출간되었다. 하지만 선생님의 예언처럼 이 두 권의 저서는 선생님의 마지막 책이 되고 말았다. 스승께서 정말 내게 주신 마지막 선물이자 유언 같은 책이 되어버렸다.

  쓸쓸한 빈소에서와 달리 장지에는 선생님과 평생을 함께 하셨던 유홍준 임진택 등 오랜 후생들이 함께 했다. 화창한 봄날이었다. 그들의 따사로운 위로를 받으며 선생님은 조금은 덜 외롭게 생명의 길, 흰 그늘의 길로 떠나셨다. 그들은 또한 49재를 맞는 지난 6월 25일 ‘김지하 추모문화제’를 열었고, 문상을 하지 못한 전국의 수많은 선후배들이 찾아와 그의 뜻을 기리고 추도했다.

  나는 선생님을 떠나보내며 “우주를 껴안고//나무 밑에 서서 생명 부서지는 소리/새들 울부짖는 소리”(김지하의 「새봄 4」)를 듣는다. 그리고 지하 선생께서 마지막으로 남긴 저서 두 권을 다시 펼친다. 이 책 속의 행간을 읽다보면 생명과 평화의 길을 모색했던 시인의 ‘흰 그늘’의 미학과도 잠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2007년 《쿨투라》 창간 1주년 김지하 시인의 휘호.
2000년 9월 7일 일산에서 김지하 시인과 함께.

  김지하의 시학과 미학사상을 정리한 마지막 저서

  김지하의 시는 우리 현대시사에 현존하는 독특한 전범에 해당한다. 문학적이고 미학적인 다양한 층위들로 혼효混淆되어 있는 그의 사상 또한 그를 단순히 시인으로만 평가할 수 없게 만든다. 이는 지난한 시대사가 김지하의 문학성에 강요해온 결과이거나, 혹은 환난으로 얼룩진 현대사의 상처가 우리시에 새긴 특이한 혈흔의 하나라고 생각할 수 있겠다.

  김지하는 데뷔 이래 지배 세력과 기존 미학질서에 대한 직·간접적인 저항과 투쟁을 멈추지 않았으며, 오늘에 이르러서도 생명운동 등으로 폭넓은 생각을 펼치고 그것을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다. 문학의 역정에 앞서가는 이러한 실천력이 김지하를 아직도 우리에게 시인이기보다는 미학주의자, 사상가이면서도 사회운동가이자 혁명가로 느껴지게 만들지만 이점이야말로 한편으로는 김지하 시의 다면적인 모습을 제대로 살펴보아야 할 요인이기도 한 것이다. 김지하 시인의 마지막 저서인 시집 『흰 그늘』과 산문집 『우주생명학』은 그의 시세계와 사상을 집약, 총정리하는 소중한 저서임에 틀림없다.

  김지하의 마지막 시집 『흰 그늘』

  우리 현대문학은 김지하 시인 이래 그의 성취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그것은 그의 민족민중문학론과 문화론의 영향과 파장이 그 당대는 물론 지금에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김지하 서정시에서 의미화되는 그늘이 『황토』의 비극적 역사 의식과 저항의지로부터 싹트고 있었다면, 『애린』에 와서는 ‘그늘’의 심화와 생명사상이 발화하는 변모를 이룬다. 그리고 『중심의 괴로움』에 오면 ‘그늘’의 존재론적 인식이 비로소 윤곽을 드러내게 되고 『화개』 『시김새』에 이르면 ‘그늘’의 형이상학적 승화와 함께 그것을 뛰어넘은 ‘흰 그늘’의 미학을 제시한다. 이는 우리의 미학으로 서구 중심의 미학을 뛰어넘겠다는, 이 시인의 야심만만한 시적 도전이라 여겨진다. 이처럼 김지하의 시세계는 단절된 것이 아니라 그의 삶과 문학 전반에 바탕하고 있는 ‘그늘’의 상징성이 보여주는 변증법적 모순의 발전과정으로 볼 수 있다. 김지하의 마지막 시집이 된 『흰 그늘』 또한 ‘그늘’이 승화된 그 연장선상으로 읽을 수 있다.

  김지하의 시는 시인의 개인사를 투명하고 정직하게 투시한다. ‘길은 내 운명이다’라고 말하는 그의 서정시 속에는 다양한 영향력을 종합한 설득력 있고 명증한, 논증된 진리가 엿보이지 않는다.

  내가 앉아 있는 나직한 고갯길은 빛과 어둠의 중간이었다. 그러나 도시의 불빛 그 끝에는 거대한 밤바다가 가로놓여 있고 어두운 일로一路 저 너머는 사람이 북적대는 반도의 내륙, 또 그 너머는 아득한 대륙이다. …(중략)… 빛과 어둠의 양극이 엇섞이는 한 어린 얼굴이 떠오른다. 문화와 야만, 야수와 신성神性의 두 얼굴을 가진 원형적인 이미지가 떠오른다. 그리고 하늘에 별이 가득한 밤의 검은 어둠 사이로 난 외줄기 흰 길, 나의 인생은 이 이미지, 이 흰 길과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길은 내 운명이다.
  - 김지하, 『모로 누운 돌부처』 중에서

  김지하는 내심의 흐름 속에 자기의 운명을 맡긴다. 서정시의 틀 안에 비치는 김지하의 그림자는 언제나 흔들리며 절대적으로 고독하다. 그림자는 무의식의 이미지이다. 자아는 자신이 어떤 그림자를 가지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것은 자아에게는 보이지 않는 무의식의 그늘에 속하는 인격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히려 자의식으로서는 결코 대면할 수 없는 성격, 곧 가장 싫어하기 때문에 절대로 그렇게 되지 않으려 고 노력하는 어떤 모습에 해당한다.

  총 4부로 나뉘어져 71편을 수록한 이번 시집은 김지하에게도 억눌린 무의식의 세계가 그의 서정시 속에 흰 그늘을 드리우며 불타오르고 있다.

  아내가 마고麻姑가 되어서/단군檀君이 되어서/지배자가 되어서//새 세상이다/아/흰 그늘이다/이 집 이름이 다물多勿이었다.//아아/내 방 이름이 불함不咸이었다.//새벽에/문득/아내가 밖에서 소리친다.//흥업興業은 울금/울금은 강황/강황은 복승/복승은 개벽//깨어보니/없다.
  - 「나의 마고麻姑」 부분

  무의식(잠) 속에서 아내가 마고가, 단군이, 지배자가 되어 나타난다. 빛과 어둠이 어우러지는 이중성의 그늘 속에 새롭게 생성하는 눈부신 흰 빛, 즉 아내(여성)에게서 흰 그늘이, 감지되는 것이다. 다름 아닌 사람의 초월성만이 오히려 역사의 밑바닥에서, 배후에서, 또는 그 틈에서 역사를 조절하고 그것을 추동, 견인, 비판, 수정한다. 그리고 마침내 그 스스로 신령한역사로 살아 생동하게 한다. 민중적 삶의 우주적인 내면성이야말로 무궁무궁 초월적으로 역사를 생성하도록 실현하는 주인이요, 주동력인 것이다.

  김지하는 이미 스무 살에 시 속에 ‘흰 우주’에로 뻗어나가는 무궁무궁한 운명의 길을 예감하고 있었다.

  그는 ‘땅끝’에서 반환점을 돌고, 용당리에서 그 비극성을 예감한다. 그리하여 황톳길의 죽임 앞에서 도저한 패배 속으로의 참여를 긍정한 ‘그늘’ 즉, 율려律呂적인 운명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등단 50년을 맞이한 김지하 시인은 원주 대안리 흥업 다물多勿집에서 아내를 모시며, 눈부신 흰 생명의 길, 신령한 율려의 길, ‘그늘’의 길을 흔들리며 걸어가고 있다.

  마지막 시집이다./교정하지 않는다./마지막 다섯줄‘아내에게 모심’/한편으로 끝이다./이제 내겐 어릴 적한恨/‘그림’과 산 밖에 없다./끝.
  - 「자서」

김지하 시인 발인일에 장지에 모인 유홍준, 임진택, 임동확, 홍용희, 손정순 등 추모객들

  김지하의 마지막 산문집 『우주생명학』

  김지하는 젊은 날부터 근대적 삶의 억압성과 부정성을 포착, 맹목적인 근대추종이나 낭만적인 근대부정을 넘어서려고 애썼다. 국적 없는 문화적 혼란과 갈등 속에서 민족·민중문학을 향한 그의 지극한 관심은 시대에 응전해 온 선구적인 삶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곧 근대성을 우리 역사의 공동체적 경험과 자산 안으로 통일할 것을 의식적으로 모색하고 그것을 행동으로 실천하여 왔다.

  그의 미학사상은 깊고 넓은 사상적 층위를 지니고 있어서 그 전모를 파악, 요약해 내기가 수월하지 않다.그의 마지막 산문집 『우주생명학』은 그의 철학과 사상을 축약하고 확장하는 면모를 볼 수 있다.

  총 4부로 나뉘어진 『우주생명학』의 1부 〈궁궁弓弓유리 화엄 대개벽〉은 ‘궁궁 유리 화엄 대개벽’과 ‘시김새’를, 2부 〈우주생명학 1〉은 ‘서다림逝多林’과 ‘〈서다림逝多林〉으로부터’를 3부 〈우주생명학 2〉는 ‘풍류역風流易’을, 4부 〈우주 생명학 3〉은 ‘화엄경과 통일의 길’을
다루고 있다.

  그는 병신丙申, 2016년 12월 31일 아침 원주, 대안리 흥업 다물多勿집에서 원고를 끝내며 쓴 자서에서 “나는 최근 누군가를 나도 모르게 더듬어 찾고 있었다./누굴까?/잃어버린 선생 수운水雲이시다./그런데 겨울어느 날 선생님이 오셨다./그래서 이 책이 시작된다.”고 말한다.

  김인환(문학평론가, 고려대 명예교수)은 일찍이 김지하의 담시를 “그 자체가 구체적인 사회관계를 생생하게 구축하는 하나의 사회운동”으로 평가했다. 그는 “시인의 내면과 외면을 구별하여 시인이 자기 바깥에서 일어나는 사회운동에 대해 말한다는 식의 이분법으로는 누구도 김지하의 담시들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을 것”이며 이는 “그의 담시에는 김지하의 자리보다 김지하 아닌 다른 주체들의 자리가 더 많기 때문”이라고 언급했다.

  이처럼 김지하 시의 형식 및 미적 가치는 물론 그 시의 사상과 미래지향적 성격과 가능성에 대한 좀더 면밀한 탐구가 과제로 남아 있다. 이러한 논의는 그 동안 가치론적 당위성의 강조에 비해 그 실천론적인 표현형식 원리를 온전히 정립하지 못했던 민족 민중문학의 바람직한 방향성에 대한 규명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그러다보니 그의 동학사상을 거점으로 한 전통적인 민족민중사상의 광맥에 뿌리를 두고 있는 미학사상과 생명사상에 대한 총체적인 연구가 미미하다. ‘생명사상’으로 대표되는 그의 문학적이고 미학적인 시학의 근거는 본받을 만한 동서양의 귀중한 정신적 자양을 흡수하면서도, 언제나 그 중심을 우리의 사유체계와 삶에 뿌리를 두고 있어서 더욱 의미가 있다.

  김지하 시인은 마지막 산문집에서 미국 노암 촘스키가 인정했듯이 한국은 지난 60여 년 동안에 어렵게도 그 엄혹한 분단 속에서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달성하였으며, “이제 새로운 국가목표가 제시되고, 근본적인 요구인 ‘남녀·음양·빈부’ 등의 본질적 해방과 평등이 성취되는 ‘통일’과 ‘동서사상 화합’과 세계 인류의 새 길을 이끌어 갈 ‘참 메시지 민족의 길’을 창조해야 하고 우주와 생명의 큰 변화 속에서 참다운 ‘선후천융합개벽先後天融合開闢’을 이루어야만 한다.”라고 밝힌다.

  그는 “그것이 궁궁弓弓 유리 화엄 대개벽”이며, ‘궁궁弓弓’은 동학의 진정한 세계상이요, ‘유리’는 정역正易의 앞으로 올 춘분春分·추분秋分 중심의 4천년 유리세계와 ‘세계 여권운동’의 상징적 목표인 ‘유리천정’의 그 ‘유리’라고 말한다. 또한 그는 “이 나라의 전통적 비의秘義는 ‘흰 그늘’이고 ‘고통 속에서 피어오르는 빛’”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다물多物’이고 그래서 ‘불함不咸’”인 것이다.

  김지하 시인 스스로가 2여 년의 시간을 통과하며 그의 시학과 미학사상을 정리하며 펴낸 시집 『흰 그늘』과 산문집 『우주생명학』은 한 개인의 문학사적 위치와 작품의 성과를 묻기에 앞서, 온갖 모순과 혼돈으로 점철된 21세기 속에서 우리의 동질성과 주체성을 어떻게 세워갈 것인가 하는 새 길, 새 문명에 대한 질문과도 맞닿아 있기에 더욱 의미 있는 작업이라 믿는다.

 

 

 


손정순 시인은 경북 청도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 대학원 국문과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1년 《문학사상》 으로 등단하였으며, 시집으로 『동해와 만나는 여섯 번째 길』, 저서 『흰 그늘의 미학, 김지하 서정시』『목월 詩의 현대성』 『문화현장에서 ‘오늘의 영화’를 읽다』 등이 있다. 2004년부터 고려대, 추계예대 등 대학에 출강하고 있으며, 현재 문화예술기획자 겸 출판인, 월간 《쿨투라》 발행인이다.

 

 

 

* 《쿨투라》 2022년 7월호(통권 97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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