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Theme] 김지하 시인 연보
[7월 Theme] 김지하 시인 연보
  • 이승철(시인, 한국문학사 연구가)
  • 승인 2022.07.01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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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1년 2월 4일(음력), 전남 목포시 대안동 18번지에서 아버지 김맹모金孟模와 어머니 정금성鄭琴星 사이의 외동아들로 태어나다. 본명은 김영일金英一이며, 본관은 김해(목경파). 호는 노겸勞謙, 노헌勞軒이며 김지하金芝河는 필명이다. 1953년 목포중 1학년인 13세 때까지 연동과산정동에서 살게 되고, 이때의 기억은 초기시의 원초적 모티브가 된다.

  1959년 아버지가 강원도 원주의 극장 영사주임으로 취직한 관계로 1953년 겨울 이사하여 원주중 2학년 편입하다. 서울의 중동고를 거쳐 1959년 4월 1일, 서울대 미학과에 입학하다.

  1961년 5월, 조동일과 함께 판문점 <남북학생회담>의 ‘민족예술과 민족미학 회담’을 준비하다가 5·16군사쿠데타로 좌절되다. 이후 목포와 해남 등 남도의 바닷가를 전전하다가 폐결핵을 얻게 되다. 서울대 <우리문화연구회>, <영화연구회> 등에서 활동하다. 1964년 박정희 정권의 굴욕적 한일회담을 반대하는 ‘6·3항쟁’의 주모자로 구속돼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4개월간 복역하다. 1966년 8월 30일, 입학 7년 6개월 만에 서울대를 졸업하다.

  1969년 김윤수, 오윤, 임세택과 민중미술운동체인 <현실동인>에 참여하고, 선언문을 작성하다. 조태일 시인이 주재하던 월간 《시인》 11월호에 「황톳길」 등의 시편으로 김준태와 함께 ‘신인’으로 등단하다. 1970년 월간 《사상계》 5월호 담시 「오적五賊」을 발표하다. 6월, ‘오적 필화사건’으로 부완혁 김승균 김용성과 함께 구속되다. 9월, 폐결핵의 악화로 출감하다. ‘오적 필화사건’으로 《사상계》가 폐간되다. 12월, 한얼문고에서 첫시집 『황토』를 출간하여 문단 안팎에 화제를 몰고 오다.

  1973년 4월 7일, 명동성당에서 김수환 추기경의 주례로 소설가 박경리의 외동딸 김영주와 결혼하 다.

  1974년 4월 3일, 박정희 유신체제에 반대하는 ‘민청학련 사건’이 발생하다. 피신 중에 첫아들 원보가 태어나다. 4월 25일, 흑산도 여관에서 체포돼 7월 13일, ‘민청학련 사건’의 배후조종 및 자금지원 혐의로 이철 유인태 나병식 등과 함께 군사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다. 일본의 ‘사이마루출판회’에서 『김지하 민중의 소리』가 간행되다. 11월 18일, 유신헌법 개정과 김지하 등의 석방을 요구하며 서울 광화문 의사회관(현, 교보빌딩) 앞에서 <자유실천문인협의회> (현, 한국작가회의)가 출범하다.

  1975년 2월 15일, 민청학련 관련자들이 ‘형집행정지’로 석방된 후 2월 25일부터 27일까지 동아일보에 옥중수기 「고행… 1974」를 연재하다. ‘인혁당사건’의 조작과 10개월간 수감 중 겪은 소회를 밝혀 파문을 일으키다. 3월 13일, ‘「고행… 1974」 필화사건’으로 재차 구속되다. 계간 《창작과비평》 봄호에 「빈산」 등 12편의 시가, 월간 《신동아》 4월호에 「밤나라」 등 7편의 시가 발표되다. <아시아·아프리카작가회의>가 ‘로터스LOTUS상 특별상’ 수상자로 결정하고, 일본 유럽 등 해외 인사들이 노벨문학상 및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하다. 12월, 일본의 한양사에서 한국어판 『김지하 전집』이 출간되고, 중앙공론사에서 일어판 김지하 작품집 『불귀』가 발행되다.

  1976년 12월, 기왕의 무기징역형에 징역 7년·자격정지 7년형을 추가로 선고받고 철저히 고립된 수감생활을 하다. 이후 한국의 <자유실천문인협의회>, <김지하구출위원회>와 일본의 <가톨릭정의평화위원회>가 ‘김지하 문학의 밤’ 등을 개최하고, 석방을 촉구하다.

  1980년 12월 12일, 투옥 5년 9개월 만에 ‘형집행정지’로 석방되다 .

  1981년 9월, 둘째아들 세희가 출생하다. 12월 2일, 원주교구 가톨릭센터에서 (1975년도)‘로터스상’과 ‘브루노 크라이스키 인권상’을 수상하다. ‘세계시인회의’의 ‘위대한 시인상’을 수상하다

  1982년 5월, 첫 시집 출간 이후 22년 만에 창작과비평사에서 시선집 『타는 목마름으로』를 출간하다. 1984년에 사면, 복권되어 공민권을 회복하다. 첫시집 『황토』가 풀빛출판사에서 재출간되고, 산문집 『민족의 노래 민중의 노래』(동광출판사)가 간행되다. 그 후 ‘김지하 현상’으로 독자들의 관심이 집중되다. 11월, 무크 《실천문학》 제3권에 ‘김지하의 로터스상 수상연설문’과 김지하의 문학과 삶을 조명한 김성동 윤구병의 글이 특집으로 게재되다. 1984년 12월부터 송기숙 황석영 이문구 최창조 등이 참여한 ‘김지하 사상기행’이 시작되고, 이듬해 계간 《실천문학》 여름호부터 이문구 작가의 정리로 「김지하의 사상기행」이 연재되다 .

  1985년 2월, 신촌 우리마당에서 소리꾼 임진택의 강창으로 김지하 담시 「똥바다」가 첫 구연된 후 독일과 미국 등지에서 순회공연이 이루어지다. 계간 《실천문학》 봄호에 문학평론가 백낙청과 특집대담을 갖다. 3월, <자유실천문인협의회>가 주최한 ‘민족문학의 밤’ 행사에서 특별강연을 하다. 7월, 『남녘땅 뱃노래』가 두레출판사에서 출간되다. 원주와 해남을 오가면서 동학과 생명사상의 체계적 심화에 주력하다.

  1986년 문학평론가 채광석의 해설로 서정시집 『애린』(실천문학사)이 출간되다. 전작시집 『검은산 하얀방』(분도출판사)이 출간되다. 《신동아》 6월호에 최일남과의 대담이 게재되다.

  1989년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의 지도위원으로 추대되다. 서정시집 『별밭을 우러르며』(동광출판사)를 출간하다. 계간지 《작가세계》 가을호에 ‘김지하 특집’이 게재되다.

  1991년 <한살림모임> 창립을 주도하다. 『김지하 전집』(전5권)이 동광출판사에서 간행되다. 3월 7일부터 6월 20일까지 동아일보에 인생역정을 담은 회상기 「모로 누운 돌부처」가 발표하다. 일본의 『중앙공론 문예특집』에 이 글이 번역, 소개되다. 4월 26일, 명지대생 강경대군이 경찰의 폭력진압으로 사망한 후 공안통치에 항의하고자 청년학생들의 분신자살이 연이어지다. 5월 5일자, 조선일보에 「젊은벗들! 역사에서 무엇을 배우는가」라는 제목의 기고문(이후 신문사가 제목을 「죽음의 굿판을 당장 걷어치워라」라고 바꿈)이 발표됨으로써 민주진보 진영의 비난을 받게 되다.

  1993년 『결정본 김지하 시전집』(솔)을 간행하다. 문학과지성사에서 수여하는 제4회 ‘이산문학상’을 수상하다 .

  1999년 4월, 일본 오사까에서 재일동포를 상대로 「재일동포와 민족문화」란 주제로 초청강연회를 갖다. 명지대 국문과 석좌교수로 임용되어 미학강의를 갖다. 이듬해 10월, 미학강의를 묶어 『예감에 가득찬 숲그늘』(실천문학사)을 출간하다. 8월, 강준혁 김영동 김정헌 임진택 채희완 정희섭 등과 함께 <율려학회>를 창립하고, 회장으로 추대되다.

  2001년 3월, 일본의 진보잡지 《세카이世界》와 인터뷰를 갖고 일본의 국수주의에 대한 우려와 남북통일에 대한 견해를 밝히다. 5월 4일, 민족문학작가회의(현, 한국작가회의) 자유실천위원회(위원장 김영현)의 주관으로 서울시청 앞에서 개최된 ‘박정희 기념관 건립반대 1인 시위’에 참가하다. 5월 30일, 작가회의 사무실에서 현기영 이사장, 이시영 부이사장, 강형철 상임이사 등 작가회의 문인들과 회합을 갖고 민족문학의 미래상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다. 이후 작가회의의 자문위원으로 추대되다. 《실천문학》 2001년 여름호에 소설가 김영현과 특집대담을 갖고, 1991년 조선일보 칼럼에 대한 사과 입장을 밝히다. 9월, 인터넷신문 프레시안에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를 연재하다. 회갑을 기념하여 김영복, 현준만 등의 기획으로 12월 11일부터 26일까지 서울 인사동의 학고재 화랑에서 「미의 여정, 김지하의 묵란전」을 개최하다.

  2002년 계간 《시와시학》 선정, 제14회 정지용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되다. 6월, 실천문학사에서 신작시집 『화개花開』를 간행하다. 이 시집으로 제10회 대산문학상, 제17회 만해문학상을 수상하다. 9월, 실천문학사에서 김지하의 철학사상, 사회사상, 미학사상을 집대성한 『김지하 전집』(전3권)이 출간되다.

  2003년 화남출판사에서 『김지하의 화두』, 『생명학』(전 2권)을 출간하고, 학고재에서 회고록 『흰 그늘의 길』(전 3권)을 간행하다. 제11회 공초문학상을 수상하고, 이후 제10회 시와시학상, 제10회 만해대상, 제2회 민세상 등을 수상하다. 경기도(도지사 손학규), <경기문화재단>의 후원으로 4년간 연속 ‘세계생명문화포럼’을 개최하다. 이듬해 7월, 한국예술종합학교 석좌교수로 활동하다.

  2005년 미학강의 『흰 그늘의 미학을 찾아서』(실천문학사), 산문집 『생명과 평화의 길』(문학과지성사)을 출간하다 .

  2007년 동국대 석좌교수로 활동하다. 이후 원광대 석좌교수(2008), 건국대 대학원 석좌교수(2013)로 활동하면서 후학을 양성하다.

  2018년 원주 대안리 흥업 다물 집에서 생전의 ‘마지막 시집’으로 집필한 『흰 그늘』과 산문집 『우주생명학』을 작가출판사에서 출간하면서 사실상 절필을 선언하다.

  2019년 11월 25일, 시인의 아내 김영주 <토지문화재단> 이사장이 향년 73세의 일기로 타계하다.

  2022년 5월 8일, 강원도 원주 자택에서 향년 81세의 일기로 타계하다. 11일, 원주 흥업면 대지리 선영에 안장되다. 49재를 맞아 6월 25일 오후 3시, 서울 경운동 천도교 대교당에서 ‘김지하시인추모문화제추진위원회’(상임추진위원장 이부영) 주최로 1천여 명의 추모객들이 모인 가운데 <김지하 시인 추모문화제>가 개최되다. 월간 《쿨투라》가 7월호 테마로 ‘김지하’를 선정해 발행하다.

 

 


 

 

* 《쿨투라》 2022년 7월호(통권 97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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