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용에세이] 대상화된 여성의 몸, 그리고 허성임의 넛크러셔Nutcrusher
[무용에세이] 대상화된 여성의 몸, 그리고 허성임의 넛크러셔Nutcrusher
  • 임수진(무용칼럼니스트)
  • 승인 2019.03.25 11: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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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몸. 이 단어를 들었을 때 우리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는 뭘까. 몸매, 굴곡, S라인, 꿀벅지, 엉덩이, 글래머, 성형, 다이어트… 미투와 페미니즘 운동 등 젠더에 관한 사회적 담론이 충만함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몸은 여전히 주체가 아닌 누군가에 의해 관찰되는 대상에 머물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어쩌면 과거보다 더욱 성적 이미지에 갇혀 있는지도 모른다.

영상 미디어 시대에 범람하는 영상 콘텐츠들은 시청자들을 더욱 빠르게 사로잡기 위해 더욱 자극적이고 강렬한 이미지를 내세우는데, 이때 아마도 가장 흔히 소비되는 이미지가 바로 여자의 몸일 것이다. 아찔한 의상을 입은 굴곡진 몸매의 여자가 등장해 자신의 몸을 이리저리 보여주며 어필하는 것. 문제는 이러한 ‘평범한’ 섹슈얼한 이미지는 이 시대에 더 이상 자극적이지도 않는다는 점이다. 짧은 미니스커트에 가슴골을 강조하는 상의를 입은 여자 아이돌들은 너무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여기에 골반을 이리저리 뒤틀어 엉덩이를 흔들고 다리를 꼬며 섹시미를 강조하는 안무, 상대를 유혹하는 눈빛까지. 지나치게 말하자면, 너도나도 섹슈얼 어필을 하기 위해 안달이 난 것 같다고 할까. 언젠가 10대 지원자들이 아주 짧게 줄인 교복 디자인의 옷을 맞춰 입고 인형처럼 앉아서 웃고 있는 한 TV 오디션 프로그램을 우연히 봤을 때, 개인적으로 심한 불쾌감을 느끼기도 했다.

더욱 비통한 것은 그들을 제작 시스템 안에서 성장시키고 하나의 상품으로 대중문화시장에 내놓은 이들은 대부분 남성이라는 점이다. 여성을 철저히 대상화해, 남성이 좋아하는 이미지로 만드는 것. 넘쳐나는 콘텐츠들 사이에서 더욱 자극적이고 더욱 강렬하게, 그래서 소위 ‘잘 팔리는’ 상품을 만드는 것에 집중하는 그들에 의해 오늘날 대중문화 속에서 여성의 이미지는 만들어지고 있다. 안타깝게도 스스로 대상화됨을 인지하지 못하거나, 또는 어느덧 익숙해져 스스로 그러한 이미지에 갇혀 버리는 여성들도 많이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미 대중문화는 어느 선을 넘었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더더욱 자극적인 콘텐츠들을 쫒는 지금, 여성의 몸은 가장 손쉽게 접근하고 조작할 수 있는 상품일 테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주최하는 ‘2018 창작산실’ 프로그램에 선정되어 지난 1월 18일-20일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에서 공연된 허성임의 <넛크러셔NUTCRUSHER>는 이러한 대중문화 현상에 대한 의문으로부터 출발한 작품이다. 벨기에와 영국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현대무용가 허성임이 오랜만에 선보이는 이 작품에는 옌칭린(대만)과 마사 파사코폴로(그리스)가 무용수로 참여했다. 공연장의 문이 열리고, 객석으로 입장하는 관객들은 하얀 플로어 위에 놓인,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모두 검은 천을 휘감아 생김새나 표정, 피부색 등을 전혀 알아볼 수 없는 세 몸뚱이들을 발견한다. 타이즈와 같은 재질로 몸에 밀착된 검은 천에 의해 드러나는 몸의 굴곡과 천 사이로 빠져나와 길게 늘어진 머리카락이 여성의 몸을 연상시킨다. 몸뚱이들은 곧 굴곡을 더욱 강조하는 포즈와 움직임을 시작한다. 전자음악에 맞춰 골반을 뒤틀어 허리와 엉덩이 라인을 더욱 강조하거나, 엉덩이를 뒤로 뺀 채 바닥을 얼마간 기어 다닌다. 그러다 곧 검은 천을 벗어 던지자, 몸에 완전히 밀착되는 빨강, 노랑, 초록색의 반짝이 하의에 마치 앞치마 같이 앞면에 달린 끈을 뒤로 묶어 고정하는 상의를 입어 어깨와 등허리를 모두 드러낸 ‘섹시한 여성’의 몸들이 등장한다. 이제부터 이 세 여성들은 본격적으로 골반을 뒤틀고 엉덩이를 흔들어댄다. 이들은 무대 뒤를 바라본 채 서서 엉덩이를 좌우로 흔들며, 길게 늘어뜨린 검은 머리카락을 이리저리 휘날린다. 원, 투, 쓰리, 포, 파이브, 식스, 세븐, 에잇… 음악은 꺼지고 마치 구령과 같은 카운트에 맞춰 세 무용수들은 쉬지 않고 움직인다.

 

안무가 허성임은 제작노트에서 이 작품을 통해 광고와 케이팝 K-POP에서 성적으로 대상화되고 조작되는 여성의 신체를 여러각도를 통해 보여주며, 또다른 시점으로 여성성을 해석하려 했다고 밝혔다. 그의 말처럼 몇몇 동작들의 반복으로 구성되는 움직임들은 TV 광고 속의 여배우나 여자 아이돌 그룹의 안무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골반을 뒤틀고 엉덩이 흔들기’이다. 이때 길게 늘어뜨려 이리저리 흩날리는 머리카락도 빠질 수 없다.

하체에 완전히 밀착된 반짝이 타이즈를 입은 채 좌우로 튕기고 흔들리는 엉덩이들을 계속해서 바라보고 있자니 자극적이기도, 긴장이 되기도, 민망하기도, 때론 불편하기도 한데, 이는 안무가의 말대로 우리가 일상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대상화 된 여성의 몸을 바라볼 때와 같은 기분이다. 그러나 대중문화 속에서전시되는 이러한 여성의 몸들은 이제 너무 당연한 것이 되어 불편한 감정조차 무뎌지게 한다면, 세 무용수들은 이 대상화된 몸이 만들어내는 이미지들을 지속적으로, 그리고 공격적으로 보여줌으로써 관객의 시각과 사고를 계속해서 자극하고, 비판적 사고의 여지를 준다.

무대 뒤를 바라보고 선 채 엉덩이를 좌우로 흔드는 동작을 기본으로 꽤 오랜 시간 지속되던 움직임은 상의 탈의와 함께 전환된다. 상의를 탈의한 무용수들은 상체를 앞으로 구부렸다 펴며 헤드뱅잉을 하기 시작한다. 이제 무대 앞과 옆 모두를 자유롭게 바라보고 관객과 눈을 마주치며 춤추는 이들의 얼굴 표정은 희열에 가득 차있다. 작품의 하이라이트인 이 순간 이 세 여성의 몸들은 폭발적인 에너지를 발산하며 온 무대를 휘저어놓는데, 젖가슴이 그대로 드러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그들을 가둬둔 섹슈얼한 이미지는 사라지고 한 인간의 땀 흘리는 건강한 몸만이 남아있다. 전자음과 백색 조명 아래에서 앞뒤로 헤드뱅잉하며 몸을 굽혔다 피는 반복되는 동작에서 발산되는 이 에너지는 안무가이자 무용수인 허성임이 지닌 특유의 힘에서 비롯되는 것인데, 이 작품에서 역시 관객은 그 희열을 함께 경험할 수 있었다.

우리는 일상에서 성적 대상으로 이미지화 된 여성의 몸을 얼마나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있을까. 어쩌면 이제 여성 스스로도 대상화되는 것에 완전히 무뎌져, 오히려 그 틀에 자신을 맞춰가고 있지는 않을까. <넛크러셔>는 이러한 우리의 ‘무뎌짐’을 자극하고, 비판적 사고를 깨운다.

 

 

* 《쿨투라》 2019년 3월호(통권 57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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