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용 월평] 리스트의 독창적인 피아노 선율 위에 그려진 몸짓: 김용걸의 발레 〈로렌스〉
[무용 월평] 리스트의 독창적인 피아노 선율 위에 그려진 몸짓: 김용걸의 발레 〈로렌스〉
  • 임수진(무용평론가)
  • 승인 2022.07.04 15: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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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걸댄스씨어터_로렌스 ⓒ박상윤ParkSangYun
김용걸댄스씨어터_로렌스 ⓒ박상윤ParkSangYun

  2022년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상을 수상한 이수지 작가의 일러스트책 『여름이 온다』는 비발디 사계 중 〈여름〉에 모티브를 둔 드로잉 그림책이다. 독자는 책의 표지에 안내된 QR코드를 통해 사계 〈여름〉을 들으며 이수지 작가의 드로잉을 감상하게 되는데, 책을 한 장 씩 넘기며 작가가 음악을 통해 느낀 감흥들, 여름날 아이들의 물놀이, 흥겨운 여름과 자연에 대한 인상과 기억들을 함께 경험하며 나아가게 된다. 마지막 페이지에 다다를수록 시각과 청각으로 채워지는 예술적 충만함, 두 장르의 성공적인 결합과 조화에 찬사를 보내게 된다.

  무용에게도 역시 음악은 영감의 원천이다. 클래식부터 대중음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곡들이 안무가들에게 예술적 영감을 제공해왔다. 안무 창작의 모티브가 되는 음악은 역사적 예술적으로 훌륭한 시대의 거장의 곡이 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그렇기 때문에 이와 동등한 관계로서 무대 위에 존재하기 위한 춤은 그만큼 독창적이고 훌륭한 완성도를 전제로 한다. 거대한 예술적 영감을 발판삼아 한 단계 도약하거나 반대로 그것의 존재감에 눌려 들러리로 전락해버리는, 비교적 쉬운 안무적 접근법에 반해 결과에 대한 부담이 매우 큰 작업 방식이라 볼 수 있다.

김용걸댄스씨어터_로렌스 ⓒ박상윤ParkSangYun
김용걸댄스씨어터_로렌스 ⓒ박상윤ParkSangYun

  이수지 작가가 비발디 사계 중 〈여름〉에 예술적 영향을 받았다면, 국내를 대표하는 발레 무용가 김용걸은 베토벤 이후 낭만주의 시대를 통틀어 가장 독창적인 소타나로 손꼽히는 프란츠 리스트Franz Liszt의 〈피아나 소나타 B단조〉에 매료되었다. 6월 16일-17일 제12회 대한민국발레축제에서 선보인 그의 신작 〈로렌스〉(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는 새로운 실험적 기법들을 성공적으로 구사한 리스트의 33분 길이의 이 피아노 곡의 영감으로부터 출발해 완성되었다. 1853년 발표된 리스트의 이 곡은 주제 변형 기법을 사용, 곡이 진행됨에 따라 주제를 다양하게 변주하며 구조에 있어 선구자적인 면모로 19세기 음악사에 있어 하나의 이정표로 추앙 받았다. 한국의 컨템포러리 발레를 대표하는 무용가 김용걸은 극적인 전개와 시적인 절제가 그 자체로 감동을 주는 이 곡을 아름다운 몸짓으로 재해석했다.

  작품은 리스트의 〈피아나 소나타 B단조〉에 셰익스피어의 고전 「로미오와 줄리엣」을 압축해 담아낸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로렌스〉는 「로미오와 줄리엣」, 그 중에서도 로렌스 신부에게 초점을 맞춘다. 두 젊은이의 죽음 후 상실감과 죄책감에 괴로워하는 로렌스 신부의 모습으로 열리는 이 비극적 전개의 서문은 젊은 남녀가 애틋하게 사랑을 나누는 장면에도 어두운 그림자를 내리며 원작의 분위기를 살짝 비튼다. 로미오(이은수 분)와 줄리엣(김민경 분), 줄리엣의 부모(이승현, 오한들 분)와 유모(이지희 분), 파리스(강경호 분), 그리고 로렌스(김다애 분) 등 여섯 명의 인물로 구성되는 작품은 줄리엣을 중심으로 그녀를 지지하면서도 갈등하는 어머니와 유모, 그리고 그녀의 부탁 앞에 갈등하는 로렌스 신부의 모습으로 압축된다. 컨템포러리 발레의 소재로 고전을 택하며 상투적 스토리텔링을 벗어나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안무가의 시각이 돋보인다.

김용걸댄스씨어터_로렌스 ⓒ박상윤ParkSangYun
김용걸댄스씨어터_로렌스 ⓒ박상윤ParkSangYun

  사랑과 갈등, 희망, 고뇌, 죽음, 후회 등의 감정들이 리스트의 변주를 타고 휘몰아치며 전개되는데, 마치 매 장면들마다 새롭게 편곡한 듯 음악과 혼연일체 되며 놀라운 몰입감을 준다. 30분으로 압축된 이 거대한 서사극의 매 장면들과 변화무쌍한 감정의 흐름들이 리스트의 피아노 곡이 그렇듯, 유려하게 연결되며 안무가의 저력을 증명한다. 감정표현과 테크닉, 극적 전개 등 구성은 클래식 발레의 기본을 따르고 있지만 작품을 이끌어가는 ‘로렌스의 고뇌’라는 큰 주제, 한국적 색체와 소재의 의상(민천홍), 무용수들의 수려하고도 자유로운 몸짓들이 작품에 동시대성을 더한다. 김용걸의 작품에서 늘 발견할 수 있는, 탄탄한 클래식 발레의 기반 위에서 유연한 순발력을 발휘하는 훌륭한 기량의 무용수들이 작품의 완성도를 높인다.

  한국의 컨템포러리 발레의 한 축을 담당하는 김용걸의 이번 신작에서 특히 그의 음악적 해석력은 더욱 돋보인다. 절제되면서도 제한된 틀을 벗어나는 그의 안무로 재해석되어 리스트의 변주 위에 쓰인 셰익스피어의 이 유명한 비극은 아름다운 몸짓과 청각적 충만함을 선사하며 동시대 무용관객을 사로잡았다. 오랜시간 천착해온 동시대 발레에 대한 진중한 그의 탐색이 한 단계 높이 도약하고 있음에 찬사를 보낸다.

 

 

 


임수진 퍼포먼스연구 및 문화연구의 방법론을 토대로 무용을 비롯한 다양한 공연예술에 대해 연구, 글을 쓰며 성신여자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에서 강의하고 있다. 한양대에서 무용을 전공하고 뉴욕대(NYU)에서 퍼포먼스연구(performance studies) 석사, 성균관대에서 예술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무용월간지 《몸》 편집장을 역임했다.

 

 

 

* 《쿨투라》 2022년 7월호(통권 97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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