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문화 에세이] 바퀴벌레를 싫어한다면...
[사회문화 에세이] 바퀴벌레를 싫어한다면...
  • 설규주(경인교대 교수)
  • 승인 2019.03.25 13: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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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미국의 한 잡지사에서 성인 3,000여 명을 대상으로 ‘가장 싫어하는 동물’을 묻는 설문조사를 실시하였다. 이 조사에서 당당히 1위를 차지한 것은 바퀴벌레였다(2위부터 5위까지는 각각 모기, 쥐, 벌, 뱀). 약 40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비슷한 조사를 실시한다면 어떨까? 적어도 1위는 바뀌지 않을 것 같다.

사람마다 개성이 있고 취향이 다르긴 하지만, 과연 바퀴벌레를 좋아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곤충학자와 같은 관련 분야 종사자가 아니라면 바퀴벌레 근처에도 가고 싶어 하지 않을 것 같다. 바퀴벌레를 보면 누군가는 바로 때려잡으려 하고 누군가는 비명을 지르며 자리를 피한다. 바퀴벌레는 수많은 곤충 중에서 유독 사람들의 혐오를 대량으로 신속하게 불러일으킨다. 세균을 주렁주렁 달고 다녀서 비위생적인데다 밟아도 금방 죽지 않고 약을 쳐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만큼 생명력과 번식력이 무시무시하다고 알려져 있다. 암컷 한 마리로 시작한 바퀴벌레가 1년이면 수십만 마리까지도 늘어날 수 있다고 한다.

우리 사회에서 사용되는 말에도 바퀴벌레 비슷한 게 있다. 한남충, 맘충, 급식충, 틀딱충, 공장충… 여기서 충蟲은 물론 ‘벌레’를 뜻한다. 한남충은 한국 남자를, 맘충은 아이 키우는 엄마를, 급식충은 학교 급식을 하는 어린 학생을, 틀딱충은 딱딱거리는 틀니를 낀 노인을(꼭 틀니를 안 끼었어도 상관없다), 공장충은 생산직 노동자를 각각 벌레에 비유하여 혐오하는 표현이다. 일부 극단적인 성향의 인터넷 사이트에서 회원들끼리만 은어처럼 통용해 오던 혐오 표현이 슬금슬금 경계를 넘더니 어느덧 상당수 사람들의 일상에도 깊숙이 파고 들어와 버렸다. 사용 초기에는 가부장적이고 꽉 막힌 한국 남자를 한남충으로, 이른바 ‘무개념’ 육아맘을 맘충으로 한정해서 불렀는지 모르지만, 현재의 맥락에서 그런 구분 따위는 없다. 그냥 한국 남자면 한남충이고, 아이 키우는 엄마면 맘충으로 불린다.

게다가 이제는 특정 집단에 대한 혐오를 넘어 특정 행동에 대한 혐오마저 확산되고 있다. 예를 들어, 진지충은 상황에 관계없이 진지하고 고지식한 사람을, 노력충은 노력하면 된다고 믿고 노력(해야 한다고)하는 사람을, 맞춤법충은 어떤 문장의 맞춤법이 틀렸다고 알려주는 사람을 비꼬고 폄하하는 표현이다. 시도때도 없는 누군가의 진지함이, 노력에 대한 누군가의 맹신이, 맞춤법 틀린 곳을 콕 집어내야만 직성이 풀리는 누군가의 오지랖이 상황에 따라서 약간의 핀잔의 대상은 될 수 있을지언정, 그게 ‘무려’ 혐오의 대상이 되어야 할 정도로 심각한 행동일까? 최근의 혐오 표현은 이렇게 무차별적이고 무자비하다. 혐오의 아이콘이라 할 수 있는 바퀴벌레 한 마리가 수십 마리, 수백 마리로 급속히 번식하듯이 ‘-충’이라는 혐오 표현은 우리 말 곳곳에 따라 붙어 왕성한 번식력을 자랑하고 있다.

‘-충’으로 끝나는 단어만 있는 게 아니다. 포털 사이트 주요 기사나 댓글에 조금만 눈을 돌려 보면 김치녀, 김여사, 개저씨, 기레기 등과 같은 혐오 표현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이러한 혐오 표현은 단지 ‘표현 자체’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살아 움직인다.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행동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육아맘을 죄다 ‘맘충’이라 부르는 A는 커피숍을 드나드는 육아맘에게 눈을 흘기며 남들 들으라고 커피숍이야말로 ‘노키즈 존’으로 지정되어야 한다고 목청을 높일 수도 있다. 자기만큼의 주차 실력을 갖추지 못한 여성 운전자를 맹렬히 혐오하는 B는 여성 운전자만 보면 ‘김여사 나셨네.’라며 혀를 끌끌 차거나 주차 좀 빨리 하라고 경적을 울려댈 수도 있다(그나저나 ‘김씨’는 무슨 죄가 있다고 하필 ‘김’여사일까). 외국인, 장애인, 특정 종교, 특정 직업 등을 향한 다양한 혐오 표현들은 각기 맡은 바 ‘사명’을 다하며 우리 사회의 혐오 증가에 일조하고 있다.

혐오(hate)는 무언가를 극도로, 숨이 막힐 정도로 싫어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러한 감정은 혐오의 대상이 존재론적으로 내가 아니라는 점, 나와 다르다는 점에서부터 출발한다. 혐오는 기본적으로 자신의 외부를 향해 있고 그 외부를 적으로 삼는다. 이것은 자기 방어, 자기 보호를 위한 본능적인 것이다. 이러한 본능은 자연스럽게 혐오의 대상이 주는 물리적, 심리적 피해에 주목한다. 브로콜리를 먹고 알레르기를 일으킨 사람은 브로콜리를, 바퀴벌레를 보고 징그럽다고 느낀 사람은 각각 브로콜리와 바퀴벌레를 혐오할 수 있다.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해관계를따져 보았을 때 누군가로 인해 자신의 몫이 실질적, 잠재적으로 줄어들게 되면 그 사람이나 집단을 혐오할 수 있다. 한편, 혐오의 대상을 혐오하는 현상이 학습된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개인적으로는 특정 집단을 미워할 이유가 없더라도 그 집단을 혐오하는 사회 구조와 문화 속에 있으면 그냥 자연스럽게 그 집단에 대한 혐오를 배우기도 한다.

누군가에 대한 비하, 경멸, 차별, 혐오는 언제나 어느 정도 있었겠지만, 이렇게까지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 스며들어 광범위하고 적나라하게 드러난 적이 있었을까? 예의, 도덕, 공동체 등을 무수히 강조해 왔던 한국 사회에서 이 같은 극도의 미움을 담은 혐오 표현(hate speech)이 넘쳐나는 것은 왜일까? 그 이유가 무척 복합적이라 어느 하나로 단정할 수는 없지만 몇 가지는 짚어 볼 수 있다. 우선, 혐오 표현을 만들고 사용하는 것을 가벼운 놀이나 감정의 배설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누군가의 가슴을 후벼 파고 주저앉힐 수도 있는 혐오 표현을 기껏 유희나 감정 표출쯤으로 여기다니 무시무시한 발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또 어떤 집단은 기득권 유지나 쟁탈을 위해, 자기 집단의 특정한 목적 달성을 위해 외부의 적을 만들어 혐오의 표적으로 써 먹기도 한다. 외부의 적은 그 존재만으로도 내부를 결속시킨다는 사회학적 명제를 지독히도 충실히 따르는 셈이다. 또 다른 이들은 이분법적인 선악 구도에 빠져 자신은 옳은 쪽에, 타 집단은 그 반대편에 둔다. 이러니 혐오 표현에 성찰이란 있을 리 없고 차별과 독선이 가득 담겨 있을 수밖에…

말에는 힘이 있다. 사람을 세워주는 말은 사람을 살릴 수 있고, 사람을 혐오하는 말은 사람을 죽일 수 있다. 우리에겐 언젠가 ‘틀딱충’으로 불릴 날이 없을까. 우리를 낳은 모든 어머니에게 ‘맘충’ 아닌 적이 있었을까. ‘한남충’ 속에는 우리의 아버지도 들어 있고 ‘김여사’ 속에는 우리의 아내도 들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있을까. 우리가 살아온 시절을 우리의 자녀 세대가 살고 있고, 우리의 부모가 살아온 시절을 우리도 살아갈 것이다. 그 시절이 바퀴벌레만큼 싫지는 않다면, 혐오 표현은 멈춰야 한다. 이 세상은 영원히 나 혼자서만 살 수 있는 곳이 아니라, 나의 아내와 딸이, 당신의 남편과 아들이, 우리의 부모가 사는 곳이기도 하다. 우리의 아들이 누군가에게는 외국인이 될 수 있고 우리의 딸이 장차 운전대를 잡을 수도 있다. 그들이 바퀴벌레만큼 싫지는 않다면, 혐오 표현은 말려야 한다.

 

 

* 《쿨투라》 2019년 3월호(통권 57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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