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회 쿨투라 신인상 문화평론 부문 당선작]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이라는 시뮬라크르: 당연하게 여겨지는 경쟁에 대하여
[제6회 쿨투라 신인상 문화평론 부문 당선작]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이라는 시뮬라크르: 당연하게 여겨지는 경쟁에 대하여
  • 박홍근
  • 승인 2013.03.01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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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거울 속 서바이벌

디션 프로그램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도 오디션 프로그램의 본질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답변이 일치한다. 바로 서바이벌이라는 것이다. 다만 전자는 서바이벌이 원석을 보석으로 다듬어내는 과정이라고 여기고, 후자는 이긴 사람이 모든 것을 가지는 승자독식주의로 가는 과정으로 본다.

하지만 경쟁이 가지는 다른 측면을 바라보고 있는 이 두 입장은 반대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오디션 프로그램의 존재를 강력하게 옹호하고 있다. 왜냐하면 두 입장 모두 서바이벌이라는 오디션 프로그램의 포맷을 실제 사회의 반영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이미’ 서바이벌 사회이므로 두 입장은 사회의 어떠한 면을 더 부각시키느냐의 차이일 따름이라는 것이다.

다수의 오디션 프로그램 비판자들 역시 전면적인 반대(폐지)가 아니라 탈락자에 대한 관용과 배려를 요구 한다는 점에서도 이러한 입장을 잘 알 수 있다. 이것은 마치 컵에 든 물이 반씩이나 남았나, 아니면 반밖에 안 남았나를 가지고 낙관론자냐 비관론자냐를 따지는 것과 유사하다. 하지만 문제는 컵에 물이 얼마나 남았는가가 아니라 물이 담겨 있는지조차 분명치 않다는 데 있다.

만약 오디션 프로그램이 실재 세계의 반영이라면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봐야하는가에만 초점이 맞춰질 뿐 그러한 세계 자체를 부정하는 것일 수는 없다. 이렇게 되면 몇 해 전부터 쏟아지고 있는 오디션 프로그램 홍수 현상은 한국사회가 최근 들어 급격하게 신자유주의화 되었기 때문이라는 결론에 너무나도 쉽게 이르게 된다.

하지만 실제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다고 여겨지는 서바이벌은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보여주는 서바이벌과 전혀 다른 원리로 작동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과 오디션 프로그램은 마치 쌍둥이처럼 실재와 그것이 비친 거울과 같은 관계를 가지며, 오디션 프로그램 서바이벌은 실재하지 않지만 실재한다고 여겨지는 담론으로서 시청자들에게 유포된다. 이 담론은 아주 강력하며 지배적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것이 존재하지 않는 실재, 즉 파생실재라는 것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며 그것이 처음부터 있는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여기고 받아들인다.

그런 의미에서 오디션 프로그램은 장 보드리야르가 말하는 시뮬라크르라고 말할 수 있다. 원본(실체) 없는 실재인 시뮬라크르는 현실보다 더 현실적이며 그것이 애초부터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다가와 실재의 자리를 차지한다. 그것은 하나의 이미지로서 우리에게 자리매김 하며, 현실의 실재적 본질을 감추고 왜곡하며 궁극적으로는 사라지게 한다. 이러한 이미지는 스펙터클을 통해 거부할 수 없는 폭력으로 다가오며, 하나의 신화로서 받아들여지도록 강요된다.

 

2. 만들어진 신화

신화는 신성한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일군 역사 이전에 있었으므로 우리의 손이 미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신화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며,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이 된다. 오디션 프로그램들의 공정함은 이러한 신화의 토대 위에서 역사를 써 내려간다.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말하는 공정함이란 무엇인가? 모든 참가자들을 평가하는 기준은 단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예외가 있을 수 없으며 그 기준을 적용받는다는 점에서 모든 참가자는 평등하다. 따라서 그러한 공정함을 바탕으로 한 심사에서 탈락자가 발생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정당한 승부’가 되기 때문에 탈락자에게 동정은 보낼지언정 서바이벌 자체가 잘못됐다고 말할 수 없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신화를 매번 목격하고 있다고 말한다. 출발선이 같다면 오케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현재 적용되고 있는 경쟁의 기준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생각을 공유하고 있다. 하지만 동일선상에서 같은 룰을 지키며 경쟁하는 것은 현실 세계에 존재하지 않을뿐더러 그러한 것을 실재한다고 믿고 경쟁에 달려들었다가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진 이들을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왜냐하면 지금 현실 세계에서 경쟁의 유일한 룰은 “네 빵을 먹어라. 그리고 할 수 있으면 네 옆 사람의 빵도 먹어라. 그리고 감사의 마음을 갖지 마라.”라는 것이기 때문이다.1) 오디션 서바이벌의 룰과 현실 세계 서바이벌의 룰은 전혀 다를 뿐 아니라 아주 상반되기까지 하다. 예컨대 오디션 프로그램의 서바이벌 룰을 페어플레이라고 정의한다면, 상대적으로 현실 세계의 서바이벌 룰은 더티 플레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2)

현실에서 무한 이기주의는 언제나 첫 번째로 고려되는 덕목이며, 규칙과 기준은 지켜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언제나 예외를 위해서 존재한다. 승자는 규칙을 따르는 것(오디션 프로그램 서바이벌)이 아니라 규칙의 안팎을 넘나들면서(현실 서바이벌) 승리를 거머쥔다. 따라서 여기에서 오디션 프로그램이 현실의 반영이라는 것은 허구임이 밝혀진다.

신화는 그 자체로 한 번 더 부정된다. 즉 모든 선수를 동일하게 판단하겠다는 공정함은 참가자들의 다양한 재능 아래 처음부터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다. 심사위원들은 입버릇처럼 참가자들을 두고 “하나같이 독특한 개성과 재능을 가졌다.”고 이야기 하는데 그렇다면 그들을 어떻게 동일한 기준으로 평가해 내거나 동일선상에서 두고 출발시킬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이 문제가 된 것은 〈나는 가수다〉가 대표적이다. 청중투표라는 단일 기준으로 탈락자를 가리는 것도 받아들이기 힘들지만, 이미 가수로 많게는 십년 이상 활동한 사람들이 쌓은 명예와 자존심의 손상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문제가 극단적으로 드러난 것이 〈탑밴드〉 2 였다. 이미 오랜 기간 활동하고 있는 프로 밴드들을 참가시킨 〈탑밴드〉 2의 경우 탈락으로 인한 충격은 방송 이전부터 활동하고 있던 팀을 실제로 해체하게 만들기까지 했다.

다수의 오디션 프로그램들이 가수를 희망하는 참가자들을 선발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기준은 노래를 가장 잘하는 사람일 수밖에 없지만, 음색·분위기·톤·가창력·리듬감 등 상이한 재능들을 가진 천차만별의 목소리를 어떻게 공정성 안에 놓고 심사할 것인가.

수영이란 스포츠를 예로 들면 수영은 영법에 따라, 거리에 따라 특화된 선수들끼리 모여 경쟁 한다. 예컨대 올림픽 수영 경기는 수영을 ‘가장 잘하는 사람’을 뽑는 게 아니라, 어떤 ‘특정 조건’에 가장 잘 특화된 사람을 뽑는 경쟁을 한다는 것이다. 모든 스포츠가 이렇게 세분화 하여 기준을 만든다. 그런데 대부분의 오디션 프로그램은 영법 불문, 장거리, 단거리 불문하고 모든 선수를 한데 모아놓고 같은 거리를 수영하게 한 뒤 순위를 가리게 하는 것이니 애초 ‘공정함’이라는 전제는 사실상 오디션 프로그램 서바이벌이 ‘공정하지 않다’는 것을 감추기 위해 내세우는 규칙이 될 수밖에 없다.

 

3. 도배된 노력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정하고 모든 조건이 동등한 상태라는 신화가 이미 담론으로 유포되고 받아들여진 이상, 그 속에서 실패는 전적으로 나의 책임이 된다. 상대를 얕봤거나 나를 과신했거나 아니면 노력이 부족하거나 방송사가 붙여준 트레이너(멘토)의 충고를 무시했거나 적극성이 부족했거나 등등 모든 것이 내 탓이고 내 탓이요 내 탓이어야 한다. 이것은 절대적이다. 왜냐하면 ‘같은 조건 속’에서도 탈락한 나와 달리 경쟁자는 다음 라운드로 진출했기 때문이다.

간절함이 부족했고, 거북이처럼 노력한 상대방의 땀방울이 당신보다 더 굵었다. 이제 나태, 태만, 게으름의 낙인이 탈락자에게 찍힌다. 그들은 쉬지 않고 달렸어야 했다. 심사위원들은 탈락자들에게 아쉬움을 표하면서 승패는 아주 작은 차이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또 강조한다. “남보다 조금 더”라는 것이 오디션 프로그램의 보이지 않는 슬로건인 셈이다.

이 때문에 그 많고 많은 오디션 프로그램 중에서 탈락자들이 승복을 하지 않는 경우를 찾아보기 힘들며 대부분 순한 양처럼 행동한다. 탈락자의 마지막 인터뷰에는 언제나 “부족했다”는 반성에서 시작해서 “더 노력하겠다.”같은 말로 끝맺곤 한다. “심사를 제대로 한 건지 묻고 싶다”거나 “심사위원들이 편견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하는 이들은 찾아보기 힘들다.3)

이제 오디션 프로그램의 중심은 슬며시 ‘재능’에서 ‘노력’으로 이동한다. 심사위원들은 재능을 살리지 못했다며 그 이유로 탈락자의 노력이 필요함을 역설한다.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오디션 프로그램은 재능을 겨루는 프로그램에서 성실과 노력을 겨루는 프로그램으로 자연스럽게 변모한다. 바로 이것이 최종 우승자가 신데렐라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원래부터 뛰어났기 때문에 뛰어난 이들이 아니라, 어떠한 악조건 속에서도 악착같이 노력하고 포기하지 않는 바로 그 ‘불굴의 노력’에 심사위원들은 격한 눈물을 흘리고 힘찬 박수를 보낸다.

사실 〈슈퍼스타K〉 2의 우승자인 허각이 낮엔 전기 수리공이었고 밤엔 밤무대 가수로 활동한다거나, 〈위대한 탄생〉 3의 우승자인 구자명이 과거 청소년 국가대표 축구 선수에서, 부상으로 선수 생활을 접고 현재 배달부로 일하며 생계를 이어가면서도 가수의 꿈을 키우는 등 우승자들은 언제나 감동의 스토리가 붙는 것은 노력의 정도와는 하등 상관이 없다. 다른 참가자들이 단지 그러한 스토리가 없다고 노력을 덜 했다고 볼 수 있는 증거가 어디 있는가? 하지만 미디어 이미지는 그들을 노력한 천재로 탈바꿈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역전은 일어났다. 분명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보이는 것은 동일한 기준 속에서 더 뛰어난 재능을 가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참가자들의 불우한 과거가 속속들이 공개 고백의 형태를 띠고 밝혀지면 참가자들은 축복받은 조건 속에서 ‘쉽게’ 재능을 꽃피운 이들보다 훨씬 뒤처져 출발하는 ‘안타까운’ 이들로 바뀐다. 이제 공정함의 기준은 동등한 조건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등한 조건’이 된다. 하루 종일 노래 연습을 할 수 있는 사람과 낮에는 생업을 하고 밤 시간이나 휴일 같은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소리 죽여 가며 연습하는 사람이 같아 보일 수 없게 된다.

결국 좀 더 노력한 자를 가리는 것이 되면서 승자를 가리는 주요한 기준이 달라진다. 즉 시작 조건이 남들보다 뒤처지더라도 성공할 사람은(노력하기에) 성공한다는 것이다. 이제 고통은 성공 신화의 쓴 보약이지 장애물이 아니다. 자신이 그런 출발지점에 서도록 주어진 불평등에 대해 불평하고 문제제기 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그것을 이기지 못하는 ‘자기 자신’이 문제여야 한다. “하면 된다!”는 낯익고 폭력적인 구호가 고개를 쳐든다. 변명의 여지가 없다. 탈락자는 스스로를 탓하며 사라져야만 한다.

 

4. 일본 소년 만화 공식

불행하게도 노력한 자가 언제나 승리하지는 않는다. 모든 사람이 최후의 최후까지 노력한들 다음 라운드 진출자의 숫자는 정해져 있기에 누군가를 탈락시켜야 하고, 최후의 승자가 가려져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노력한 자가 이기는 것이 아니라 이긴 자가 노력한 자가 된다.

이것은 일본 소년 만화의 패턴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소위 ‘배틀물’4)이라고 알려진 이 소년 만화 장르는 주인공이 처음에는 약하지만 끊임없이 강적들과 싸우면서(배틀) 급격하게 실력(레벨)을 높여 간다. 적에 비해 주인공은 언제나 열세에 있으면서도 마지막에 극적 반전을 통해 승리를 거머쥔다.

특히 배틀물이라고 해서 선악 구분이 두부 가르듯 뚜렷한 것은 아니다. 물론 등장하는 적들은 파렴치하고 잔악무도한 경우가 많지만, 비중 있는 적들의 경우 어쩔 수 없는 사연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들에게도 나름 싸움의 명분이란 것이 주어진다. 그래서 주인공이 이러한 적과 마주하게 되면 바로 배틀을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정의를 주장하며 한참을 옥신각신하게 되는데 이때 주인공이 자신의 정의를 관찰하는 것은 끈질긴 ‘대화와 설득의 힘’이 아니라 언제나 상대방을 힘으로 눌러 얻은 ‘주인공의 승리’이다. 즉 주인공이 승리했기 때문에 주인공의 정의가 상대방에게 인정받게 된다.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인정하는 ‘노력’의 실체도 이와 다르지 않다. 노력의 실체가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그가 다음 라운드에 진출함으로써 노력을 했다는 것이 증명된다는 것이다. 결국 참가자들은 자신의 노력을 증명하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기울이지만, 그것은 ‘미리 정해진 숫자’의 승자에 한해서만 참작이 될 뿐이다. 

아마추어가 출연하는 오디션 프로그램이라면 어디에서나 이것은 똑같다. 참가자들은 자신의 숨기고픈 과거(방황의 시절, 왕따 경험, 불우한 가정환경 등)를 눈물로 공개하고 심사위원은 노래로 그것을 승화시키라고 주문한다. 이제 어두운 과거와의 유일한 극복 혹은 단절 방법은 해당 오디션에서 성과를 거두는 것이 된다. 어렵게 자신의 과거를 공개했는데 초반 라운드에서 탈락한다면 이제 그 참가자는 더욱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행운을 거머쥐는 이들은 당연히 소수에 불과하며, 나머지 고백들은 프로그램 방영이 끝나도 각종 경로를 통해 공개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떠돌아다니게 된다. 만약 그러한 개인사 고백을 거부하는 출연자가 있다면? 아마 그랬다면 재능이 있느냐 없냐를 떠나 참가조차 불가능 했을 것이다.5) 결국 순수하게 재능만을 겨룬다는 취지는 사라진다. 자신의 개인사 공개는 필수 경쟁 요소가 된다.

노력을 위해 모든 것을 해라. 인권도 추억도 감정도 모두 남김없이 바치라. 이제 오디션 참가자들은 고해성사를 하기 위해 모인 죄인들이다. 그들은 죄(노력하지 않았다)를 벗어나기 위해 모든 걸 고백해야 한다. 하지만 이미 정해진 다음 라운드 진출자 숫자는 누군가의 노력은 ‘반드시’ 배신당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이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말하는 ‘노력’이다.

 

5. 닫힌 세계를 넘어서

다시 초반에 제기한 질문으로 돌아와 보자. 도대체 한국 사회에 오디션 프로그램 열풍은 무엇 때문인가. 혹자는 이를 정의로운 사회에 대한 갈증으로 풀이하는데 이는 현실 서바이벌의 약육강식에 염증을 느낀 나머지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유토피아(아름다운 서바이벌?)를 찾으려고 한 것에 불과 하다.

하지만 바꾸어 말하면 최종 우승자를 정점으로 하는 피라미드형 서열 중심주의를 철저하게 지켜내야 한다는 것이 바로 그들이 갈구하는 정의사회라는 것이 된다. 이렇게 되면 가장 아래 위치하게 될 무능력자들을 확실히 도태시켜야 하고 그 옆에 서 있는 무기력한 자들도 단호히 외면해야 하는 것이야말로 그들이 갈구하는 정의로운 사회의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현상이 될 것이다.

이것은 잔혹한 사회이지 정의로운 사회가 아니다. 정말 사람들이 이러 사회를 갈망한단 말인가? 만약 사람들이 현실 서바이벌에 낙오하고 치이는 것이 지치고 괴롭다면 그들이 갈망하는 것은 비틀거릴 때 누군가 옆에서 잡아주는 사회이지 아무리 그 과정이 ‘투명’하더라도 좁은 문을 통해 거르기만을 반복하고 패자를 가차 없이 떨어뜨려버리는 사회가 아닐 것이다. 결국 ‘정의사회 갈망’이라는 분석은 오디션 프로그램에 이상한 판타지를 부여할 뿐이며, 이것은 오디션 프로그램의 공정함을 하나의 신화로 견고하게 하는데 일조하는 역할을 한다.  

승자에 자신을 이입하는 대리만족이 열풍의 핵심이라고 하는 것은 또 어떤가. 우울한 과거를 벗어나 앞으로 물심양면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면서 자신의 꿈을 마음껏 펼치게 될 우승자의 모습에 자신의 꿈을 빗대어 본다든가 하는 것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욕망은 이미 훨씬 전부터 등장해 상당한 시청률을 끌어 모으곤 했던 수많은 신데렐라 드라마들 혹은 영웅설화의 최신 버전인 할리우드 영화가 충족시켜 주고 있다. 결국 이것은 왜 “오디션 프로그램인가?”를 묻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아니며, 이러한 대답은 오디션 프로그램의 본질을 감추는 해석이 되고 만다. 

오디션 프로그램만이 가지고 있는 본질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탈락 시스템’에 집중해 볼 필요가 있다. 적나라한 탈락 시스템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러한 시스템이 공정하다고 받아들이게 만듦으로써 묘한 위안을 준다. 즉 이러한 시스템이 현실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면 내가 지금 ‘탈락자’의 삶을 살고 있지 않을 것이라고 위안한다.

왜냐하면 ‘동등한 조건’이라면 나의 노력은 보상받았을 것이라고 스스로를 변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현실의 불평등은 받아들이기 훨씬 수월한 것이 된다. ‘현실의 불평등’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다. 오디션 프로그램이 클린 서바이벌이라는 하나의 놀라운 스캔들로 사람들에게 다가올수록, 현실 서바이벌은 더욱 리얼리티를 획득한다.6)

오디션 프로그램의 서바이벌과 현실 서바이벌은 서로를 보완한다. 전자는 후자에게 실체를 부여한다. 후자는 전자를 통해 자신의 실재를 사람들이 좀 더 쉽게 수긍하고 받아들이게 만든다. 이 두 세계는 마치 사물과 그것의 반영처럼 보이게 만듦으로서 둘 사이의 관계 외의 다른 것을 상상할 수 없게 만든다.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 모른 채 거울에 그것이 비추기 때문에 대상이 거기에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우리는 완벽하게 닫힌 세계 사이에 서 있다.

현실 세계의 서바이벌이 정말 당연할까? 우리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이윤을 좇으며 늘 경쟁하는 개인들을 자연스럽다고 여기고 있지만, 이러한 관점은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진 것이다.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이 주장하는 ‘경제적 인간’에 대한 문제 제기는 지금까지 여러 학자가 제기해 왔다. 대표적 인물인 칼 폴라니는 부족사회의 예를 통해 개인의 이윤추구가 자연적인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잘 설명하고 있다.

부족사회에서는 개인의 경제적 이해가 그 개인에게 최우선적인 고려사항이 아니다. 왜냐하면 공동체 전체 차원에서 어떤 구성원도 굶는 일이 없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공동체 자체가 재난에 압도당하는 경우도 물론 있겠지만, 이때에도 위협당하는 것은 집단 차원의 이익이지 개인 차원의 이익은 아니다. 즉 사회적 의무란 모두 상호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어서 그것을 제대로 지키면 개인적 수지타산이라는 차원에서도 최선의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이다.7)

현대에 와서도 이러한 설명은 타당하다. 여전히 연대의 힘을 통한 상호성은 집단의 이익인 동시에 개인의 이익으로 작동하거나 혼자라면 보장받지 못했을 이익까지 보장한다.8) 따라서 신자유주의 통치성은 언제나 연대를 파괴하여 홀로 남겨진 개인들을 만들어서 자본의 스펙터클에 저항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그러한 방식은 강압적인 방식(공권력을 이용한 탄압 혹은 법제도)에서 세련된 방식(자기 계발 열풍, 아프니까 청춘이다)으로 진화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핵심은 가혹하고 잔인한 무한 경쟁이 아니라, 경쟁이 존재하지 않는 지점까지 스며들어가서 마치 그곳에도 경쟁이 처음부터 존재했던 것인 양 만들어 버린다는 것에 있다. 현실 서바이벌 즉, 신자유주의 시뮬라크르는 사회 전체에 시장의 원리와 경쟁의 원리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연대가 해체되었음을 선언하고 사회적 결속이 해체된 바로 그 자리에 들어 앉아 있다. 하지만 이것은 일종의 자기-충족적 예언으로, 선언함으로써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에 불과하다. 이때 오디션 서바이벌은 이러한 현실 서바이벌의 이상적 형태의 반영으로서 현실 서바이벌의 실재를 확인시켜 준다.   

그렇다면 그 양자 사이를 오고가면서 비판을 수행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비판의 형태를 취하고 있으나 언제나 비판하는 대상의 존재를 긍정하는 것이 될 수밖에 없다. 기존 오디션 프로그램에 대한 비판들이 이런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에, 이런 비판들은 오히려 오디션 프로그램을 통해 유포되는 담론의 재생산에 봉사하게 된다.

보드리야르의 말처럼, 병의 시뮬라크르는 아픈 척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병의 어떤 징후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환자가 그 병으로 인해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인과관계가 성립된다면 의사는 이를 꾀병으로 진단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의사의 처방전은 병을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병의 존재를 실체화하고 실재하는 증명서를 발급하는 것과 같다. 병이 정말 있는가를 의사가 판단할 수 없다면, 그것을 누가 판단해야 하는가. 누가 만든 병의 징후를 마치 우리의 병처럼 공유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 우리는 정말 아프긴 한 것인가. 

따라서 지금 우리가 검토해야 하는 것은 허용된 것들이 아니라, 가능한 것들이어야 한다. 이미지가 아니라 그 작용을 결정하는 일련의 규칙들을 살펴보아야 한다. 그러한 가능성은 실재가 없는 자리의 실재, 즉 시뮬라크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시뮬라크르라고 인지하는 데 있다.

실재의 상실이 두렵더라도 그 너머를 볼 수 있는 용기를 가질 때9) 우리는 이중의 서바이벌 함정에서 벗어나 실제 발 딛고 있는 곳이 어디인지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서바이벌은 당연한 것이 아니며, 만들어 졌다는 것. 경쟁이 아닌 연대 힘이 주변에 있다는 것을 상기하는 것이야말로 서바이벌 오디션이라는 시뮬라크르의 주문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될 것이다.

 

 

 


1) 프리모 레비는 이것이 아우슈비츠의 수용자들이 유일하게 공유하고 있던 불문율이었다고 말한다. 프리모레비, 『이것이 인간인가』 244p 참조, 돌베게, 2007
2) 여기서 '현실 서바이벌', '현실'이란 표현은 오디션 프로그램 서바이벌과 상응하는 대상을 지칭하는 것으로만 사용한다. 나주엥 이야기 하겠지만 '현실 서바이벌' 역시 또 다른 시뮬라크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3) 오히려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언론이다. 언론은 인기 있는 후보가 떨어지거나 반대로 인기가 있기때문에 붙었다는 의혹을 때때로 문제 삼는다. 하지만 바로 이러한 문제 제기는 언제나 심사를 정당화하는 도구로서 작동한다. 왜냐하면 방송시간상 세세하게 설명하지 못했던 세부규정이나 어쩔 수 없이 예외를 허용하게 된 저간의 사정을 자세하게 해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러한 해명이 당시에는 일시적인 소동을 일으켜도 그것을 공식화함으로써, 바로 다음번 심사에 무리 없이 적용할 수 있게 된다. 결국 오디션 프로그램이 허용 가능한 비판은 언제나 오디션 프로그램의 정당화로 이어진다.
4) 일본 소년 만화 중 가장 많은 판매 부수를 자랑하는 장르가 이 배틀물로서, 국내에도 다수의 팬을 거느리며 큰 인기를 얻고 있다. 〈원피스〉, 〈나루토〉, 〈블리치〉 등이 모두 배틀물에 속한다.
5) 〈K팝 스타〉의 경우 참가자들이 작성하는 계약서에 2차 저작물의 저작권은 모두 방송사가 독점하며, 참가자의 가족과 친척 인터뷰 활용에 대해 동의할 것, 편집되어 나가는 방송 영상물에 대해서 방송사를 상대로 명예훼손이나 법적 청구를 제기하지 않을 것 등의 내용이 담겨 논란이 됐다. 더 자세한 내용은 이현진 기자, 〈'인권' 없는 오디션 출연자 동의서... 뜨고 싶으면 일단 '동의'해라?〉, 오마이뉴스, 2012.01.15. 참조
6) 미디어의 관점에서 쟁점이 되는 것은 A가 B에게 이렇게 혹은 저렇게 하라고 정해 주는 구체적인 메시지의 지시가 더 이상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환경 전반을 형성하는 것이다. 즉, 그것은 제한적인 시각들이 보편적이고 자연적이며 '현실' 자체와 일치해 보이도록, 자연적인 혹은 신성한 필연성을 부여해 주는, 사물의 질서에 대한 재현 방식이다. 세계에 대한 부분적이고 특수한 설명이 보편적 타당성과 정당성을 얻도록 하고, 이러한 특정한 구축물들이 '현실성'의 당연한 속에 뿌리 내리게 하려는 목적을 지향하는 이러한 움직임이야말로 '이데올로기성'의 특징이자 메커니즘이다. 스튜어트 홀, 「'이데올리기'의 재발견」 p249 참조 『스튜어트 홀의 문화이론』, 한나래, 1996
7) 칼 폴라니,「사회와 경제 체제의 다양성」 p185 참조, 『거대한 전환』,  길, 2009
8) 강수돌 교수는 청년 유니온 활동이나 배우 김여진 씨가 적극 결합해 주목을 끌었던 홍익대 청소 노동자 투쟁에서 연대의 가능성을 타진하고 잇다. 강수돌, 「자본의 파괴성 삶의 주체화로 맞서라」, 르몽드디플로마티크 2011년 3월호 참조
9) 바로 이것이야말로 영화 〈매트릭스〉에서 네오가 가상 세계를 벗어날 수 있었던 이유이다.


박홍근 80년 서울 출생. 홍익대 국문과와 고려대 대학원 사회학과 수료. 대검찰청 커뮤니티 비즈니스 센터에서 근무했으며, 현재 석사학위 논문 준비 중.

 

* 《쿨투라》 2013년 봄호(통권 29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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