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회 쿨투라 신인상 연극평론 부문 당선작] 눈眼을 문門으로: 이강백의 「죽기살기」론
[제3회 쿨투라 신인상 연극평론 부문 당선작] 눈眼을 문門으로: 이강백의 「죽기살기」론
  • 성유경
  • 승인 2010.03.01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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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백의 「죽기살기」(2009년 5월 16~27일 대학로 아르코시티극장 공연, 송선호 연출)는 ’반생반사’의 존재를 다루는 ’존재극’이자, 사건의 미스터리를 추적하는 ’추리극’, 그리고 희곡의 문제를 희곡 내에서 다루는 ’메타극’이다. 이 복잡한 연극은 도전적인 방식으로 관객의 흥미를 유발한다. 마치 수수께끼를 던지면서 어서 풀어보라는 식으로 말이다.

 

1. 슈뢰딩거의 고양이 상자와 이강백의 마구간

이강백의 「죽기살기」에는 ’반생반사’의 존재가 등장한다. 반생반사半生半死란 반은 살아있고 반은 죽어있는, 삶과 죽음이 ’중첩’되고 ’공존’되어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런데 생과 사의 양상이 분리되지 않고 공존하는 상태가 정말 가능한 것일까? 살아있으면서 동시에 죽어있는 존재라니, 이강백은 도대체 어떤 의도에서 반생반사의 존재를 구상한 것일까?

반생반사의 존재를 풀기 위해서는 먼저 물리학적 지식 하나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강백은 보다 낯선 영역으로 관객을 안내하기 때문이다. 그가 안내하는 곳은 일종의 실험실로, 실험실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슈뢰딩거의 고양이 상자.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 에어빈 슈뢰딩거Erwin Schrodinger는 1935년 자신의 상상 속에서 나온 고양이 사고실험을 발표했다. 그는 고양이 한마리가 밀폐된 상자 안에 갇혀 있다고 가정했다. 상자 안에는 고양이 말고도 알파입자를 방출하는 우라늄원천과 독가스 용기가 함께 들어 있다. 물론 그것들이 고양이와 직접적으로 접촉되어 있지는 않지만, 이 상자는 알파입자가 방출하는 순간 독가스가 발생되도록 고안되었고 그 후 고양이는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묘하게도 알파입자가 한 시간 안에 방출될 확률은 50%. 그렇다면 과연 한 시간 후 고양이는 죽었을까, 살았을까? 반대로 상자를 열지 않는다면 고양이의 생사는 어떻게 판별될까?

슈뢰딩거가 이러한 실험을 가정한 이유는 독일의 물리학자 베르너 하이젠베르크Werner Karl Heisenberg의 ’불확정성의 원리’를 비꼬기 위해서였다.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은 본래 결정되어 있는 게 아니며, 관찰자가 개입하기 전까지 불확정적인 상태로 남아있을 수밖에 없다는 하이젠베르크의 원리대로 하자면 상자를 열기 전까지 고양이는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살아있으면서 죽어있는 상태가 된다. 이것을 다른 말로 중첩이라 한다. 이에 슈뢰딩거는 고양이의 상태를 예측할 수 없는 것은 과학이 아니며, 상자 속 고양이는 분명 살았거나 죽었거나 둘 중 하나일 뿐이라고 비유적으로 하이젠베르크의 해석을 반박했다. 이강백은 이 흥미로운 고양이 문제에서 물리학적 논쟁이 아닌, 고양이의 존재 문제를 정교한 플롯으로 풀어나간다. 그가 생각하기에 고양이 문제는 다시 질문되어야 한다. 만약 독가스가 장치되어 있는 밀폐된 상자에 갇혀 있는 고양이가 50%의 확률로 살 수도, 죽을 수도 있는 가정 하에 있다면, 고양이가 살거나 죽는 문제가 중요한 게 아니라 고양이의 존재 이유와 존재 범위를 제약하는 비극적 상황이 중요한 게 아니냐고. 상자에서 고양이를 구출할 것이 아니라면, 고양이의 존재는 살아있어도 죽어있는 것과 같은 게 아니냐고. 그러면서 그는 「죽기살기」에서 고양이 상자를 마구간으로 제시한다. 무대 지시문을 살펴보자.

큰 길大路에서 꺾어져 들어오는 작은 길小路. 무대 왼쪽, 길 입구에 이층집과 가로등이 마주 서 있다. 가로등에는 ’도살장 길’이라는 표지판이 붙어있다. 길이 끝나는 막다른 곳에 도살장이 있으나 객석에서는 보이지 않늗나. 한 때 번성했던 도살장은 살인사건이 있은 후 폐쇄되었다. 길가를 따라 도살장 일꾼들의 숙소, 식당, 창고, 마구간 등 여러 건물들이 있었는데, 지금은 마구간이 남아있을 뿐 주택으로 개축되었다. 무대 오른쪽, 마구간이 있다. 도축용 가축들이 도살 순서를 기다리며 머물던 그곳은 어린이 놀이용 목마들의 보관 장소가 되었다. 목마는 마치 흔들의자처럼 앞뒤로 움직인다. 또한 이동하기에 편리하도록 바퀴가 달려있다. 마구간은 건물 형태 없이, 목마들이 있는 것으로 묵시적인 표현을 한다.1)

도살장 시설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마구간은 도축용 가축들이 도살 순서를 기다리며 머물던 곳이었고, 지금은 가축 대신 목마가 놓여 있다. 작품의 분석은 마구간이라는 공간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도살장의 시설들이 폐쇄되고 없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마구간만이 자리하는 건 필연적인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마구간은 고양이 상자와 같다. 가축들을 마구간에서 빼내어 구출해주지 않는 이상, 마구간에 갇혀있는 가축들은 살아있지만 살아있는 존재가 아니다. 가축들은 ’살과 피로 이루어진’ 생명체지만, 그들의 존재는 미궁의 안개에 빠져있다. 마구간은 가축들에게 우호적으로 제공된 장소가 아니다. 도살 직전 감금된 장소, 절대로 빠져나갈 수 없는 올가미와 같다. 가축들이 아무리 포동포동한 살집에 기름기가 흐르며, 좋은 혈색을 가졌다쳐도 그들에게 생은 불리하게 작용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마구간에서 가축들의 삶과 죽음의 경계는 확실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내리는 최종심급은 언제나 ’살아있음’이다. 살아있다고 정의내릴 수 있는 잣대는 의학적이고 과학적인 모범 답안에 근거한다. 이 점에서 왜 작가가 자신의 희곡으로 존재에 대해 다른 해석을 내리고 ’존재의 철학’을 파고드는지 그 진의를 파악해볼 수 있을 것이다.

작가가 보기에 우리가 몸담고 있는 물리적인 세계는 살아있는 것, 존재하는 것, 활동하는 것만을 실재로 간주한다. 하지만 그것은 거울에 비친상像만을 보는 것과 같고, 상 너머의 것, 비치고 보이는 것 너머의 것을 외면한다. 이강백은 이미 91년 작 「물거품」에서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세계를 거울의 논리에 따른 세계라고 정의내렸다. 살아있음만을, 있는 것만을, 인간의 육안으로 보이는 것만을 인정하는 거울의 논리는 진실을 은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울의 논리가 세계의 ’표준’으로 자리 잡은 건 그것이 매우 설득력 있는 알리바이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상식’이기 때문이라는 것. 상식이기 때문에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고 믿어야만하는 증거로 채택된다. 이와 같은 사실적 ’증거주의’의 세계에서 생각해보자. 「죽기살기」에서 그려지는 마구간의 가축들은 분명 실재한다. 인간의 감각이 그것을 보고, 듣고, 느끼기에, 어떤 과학적인 측정으로 살아있음을 확인할 수 있기에 그것의 실재함을 의심할 수 없다. 마구간에서 가축들은 죽지 않기에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이 살아있지 않다고 정의할 일체의 의심가는 근거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구간의 가축들은 실재의 범주를 넘어선다. 이강백이 묘파하는 반생반사의 존재는 이런 역설 속에서 징후적으로 포착되고, 「죽기살기」의 문제 제기는 일반적인 생, 사의 개념에 균열을 낸다.

 

2. 죽느냐 사느냐, 그것은 문제가 아니다!

이강백의 수수께끼를 푸는 작업은 매우 곤혹스럽다. 평론가 이영미가 지적했듯이 이강백의 작품 관람은 작가가 던져놓은 힌트의 조각들을 짜맞추고 분석해 나가면서 작가가 할 말에 도달하게 되는 일련의 과정을 거치는데, 작가의 사유가 강할수록 작품의 이해도가 불분명해지기 때문이다.(이영미, 「이강백, 냉철한 이성으로 다루어진 사회와 인간」, 《문학판》 9호)

「죽기살기」에서 드러나는 작가적 사유는 모든 경계에 대한 비판이다. 특히 눈에 보이는 경계인 안계眼界와 판단과 인식의 경계인 인식계意識界를 들춰낸다. 인간의 몸이 가진 여섯 가지 감각(六根, 눈 · 코 · 혀 · 귀 · 피부 · 의식)은 현상을 끊임없이 분별하고 착각하게 만들지만, 특히 인간은 맨 먼저 눈이라는 감각기관을 통해 대상을 보고 식별하기에 눈으로 보이는 것만 인정하고 관심을 갖는다. 크고 화려한 것을 좋아하고, 성공이나 자본, 명예를 쟁취하는 것도 인간의 시각적 속성에 기인한다. 그리고, 호불호好不好를 나누고 우위優位를 구분하는 것은 인간의 마음으로 인식하는 의식이다. 『화엄경』에 나오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일체의 모든 법은 마음이 만드는 것)나 유식철학에서 주장하는 만법유식(萬法唯識: 만법은 오직 인식)은  모두 일체 존재를 가늠하는 의식을 내세우고 있다. 마구간 속 가축들이 숨을 쉬고 움직인다 해서 ’살아 있는 존재’로 단정 짓는 것과 본인의 삶만을 중요하게 여기는 「죽기살기」의 많은 인물들은 모두 안계와 의식계를 따르고 있다. 안식과 의식계는 선을 긋고 이것과 저것으로 나누며, 인간은 경계의 방식을 합리적이고 당연한 것이라 믿으며 따른다. 이강백은 그러한 인간의 세태를 꼬집어 이야기를 직조해 나가고, 관객에게 질문한다. 당신의 눈은 진실을 바로 보고 있냐고.

극 내용을 살펴보면, 도살장이 폐쇄되자 마구간은 어린이 놀이용 목마들의 보관 장소로 사용된다. 목마는 나무로 만든 장난감 말이다. 흔들의자처럼 앞뒤로 움직이고, 이동하기 편하도록 바퀴가 달려있어 살아있는 말처럼 느껴져도 마구간에 붙박여 있는 사물일 뿐이다. 마구간의 목마는 마구간으로 끌려온 가축들을 지칭하는 또 다른 비유이며, 삶과 죽음의 이분법으로 파악할 수 없는 존재이다. 이처럼 마구간의 목마는 도살용 가축들의 상황과 맞닿아있기에, 극에서 누가 마구간의 목마와 동일성과 직접성을 이루는가를 살펴야 한다. 마구간 속 존재는 가축들과 목마, 그리고 인간으로 변형되고 그 의미가 심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극에서 이와 같은 인물은 살인범 육손과 창녀 선녀로, 그들은 마치 실타래처럼 짜인 촘촘한 마구간 안에 놓여있다. 그들은 우여곡절을 거치고 누군가에 의해 끌리는 인생, 마구간의 가축처럼 정체되어 살아있는 삶의 형태를 보여준다. 그리고 이강백은 「죽기살기」에서 그들의 속내 이야기를 자세히 털어놓는다.

주인공 육손은 과거 소와 돼지, 닭과 오리 등 가축들을 죽이는 도살장 인부였다. 그는 ’여섯 개의 손가락’을 지닌 자신을 조롱했단 이유로 ’오두’라는 동료도 죽이려 했다. 실제 살인은 일어났지만 육손이 죽인 사람은 ’김두’라는 다른 동료였고, 육손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경축일 때마다 형량은 가벼워졌고, 무기징역은 17년으로 감형되어 출소를 명받게 된다. 그리고 감옥에서 나온 육손은 도살장이 있던 마을로 향한다. 여기까지 보면 「죽기살기」는 복수극의 서사를 떠올리게 하지만, 작가는 그런 관례적인 해석을 거부한다. 육손은 죄 없는 가축들을 잘못 죽였듯 죄 없는 사람을 잘못 죽인 자신의 죄가 제대로 처리되지 않자 마을에 들어왔고, 살해된 동료의 가족들 앞에서 죽겠다고 선언하기 때문이다. 그는 죽음을 통해 죽음을 갚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육손의 희망은 좌절된다. 유가족 중 형제는 죽은 아버지가 자신들을 구타하고 괴롭힌 의붓아버지여서 그가 죽기를 빌었는데, 소원을 이뤘다며 육손을 은인 취급한다. 그들의 모친은 육손에게 죽음 대신 보상금 천만 원을 내놓으라고 한다. 마지막 남은 유가족은 딸 선녀다. 선녀라면 육손의 죽음을 받아줄 것 같다. 하지만 선녀는 극에서 대담한 반전을 일으키는 인물로, 극의 결말을 관객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치닫게 한다. 선녀는 그녀의 오빠들과는 의붓남매로, 죽은 김두의 친자식이다. 그런 이유에서 오빠들처럼 김두가 빨리 죽기를 바라며 기도하지 않았을 테고, 육손을 은인으로 생각하지 않을것이다. 또한, 모친은 남편이 죽자 생활고의 이유로 그녀를 유곽에 팔아 화대를 생계비로 받고, 포주와 결탁해 그녀를 감시한다. 따라서 자신의 인생을 바꿔놓은 원인 제공자인 육손에게 그간의 분노와 슬픔을 털기 충분하다. 하지만 선녀는 육손에게 이렇게 말한다. 죽고 싶을 만큼 절망과 고통을 느낀다는 것 자체가 당신이 살아있다는 증거라고. 굴욕, 수치, 고통을 느끼지 않게 마비된 나는 오히려 당신이 부러울 따름이라고. 이제 극의 초점은 반생반사의 인물에 맞취져 있다. 작가의 견해에 따르면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고 외쳤던 햄릿마저 선녀에 비하면 비극적이지 않다. 햄릿은 죽고, 선녀는 살아있지만 그 물리적인 죽고, 살고의 문제는 진정한 해석을 낳지 못한다. 선녀는 살아있지만 죽어있고, 죽어있으면서 살아있다. 죽음보다 지나친 삶, 삶보다 가까운 죽음, 이것이 선녀의 존재양상이다.

 

선녀 당신은 당신 이야기를 많이 하셨으니, 이젠 내 이야기를 들어주세요. 나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온갖 남자들과 사랑을 해요. 남자들은 강간하듯 내 몸을 즐기면서, 나도 즐겁냐고 꼭 물어요. 난 그렇다고 대답하지만, 사실 내 몸은 아무 감각이 없어요. 굴욕, 수치, 고통을 느끼지 않게 마비된 거죠. 사람들은 그런 나를 선녀라고 부릅니다. 난 당신이 부럽군요. 절망과 고통을 느낄 수 있다니...... 죽지 말아요. 오래오래, 당신은 죽지 않고 사셔야죠!

 

선녀는 목마에 탄 채 모친에게 끌려 유곽으로 향하고, 육손은 충격 받는다. 육손이 자신의 과거를 반성하고 죗값을 치르기 위해 유가족을 찾아나선 이유는 자신의 삶만이 중요하여 타자他者의 삶을 무시한 잘못된 생각을 벗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육손은 법의 처벌대로 죗값을 치르거나, 감옥에서 회개하여 죄를 용서받는 보편적인 해법 대신 유가족에게 ’죽음의 맞불’로 호소했다. 하지만 유가족에게 죽음의 가치는 조금도 인정되지 않았다. 죽이고 싶은 의붓아버지를 대신 죽인 은인이라 추켜세우는 형제나, 죽는 건 필요 없고 보상금이나 내놓으라고 으르렁대는 모친을 통해 작가는 본인의 삶만이 중요하다는 자기동일적 사고와 ’살기’ ’삶’의 방어 기제가 ’죽기’ ’죽음’의 그것보다 강력하고, 집요하며, 사적 욕망의 메커니즘과맞물리기 쉽다는 사실을 상정한다. 육손의 죽음에 대한 유가족들의 입장을 강조함으로써 인간 내부에 자리하는 ’살의보다 강한 살기의 욕구’를 짚어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선녀는 다르다. 그녀에게 삶은 죽지못해 사는 것과 동일한 질감을 이루며, 살아있지만 죽어있는 존재이기에 그 어떤 ’살기의 욕구’도 갖고 있지 않다고 말한다. 그녀의 입장에 따르면 고통과 절망을 느낀다는 것 자체가 살아있다는 증거다. 그런데 그녀는 굴욕과 수치, 고통을 느끼지 않게 마비되었다고 한다. 그녀의 발화는 미묘한 울림을 자아낸다.

고통과 절망을 느낀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증거가 된다. 그런데 선녀는 고통과 절망을 느끼지 못 하기에 살아있는 존재가 아니란다. 그렇게 말하는 선녀는 분명 육손의 눈앞에 살아있는 존재이기에 모순을 일으킨다. 육손은 난감하다. 고통과 절망을 느끼지 못한다는 그 말이 오히려 그녀의 고통과 절망을 강력하게 반증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번에는 달리 생각해보자. 고통과 절망을 느끼는 것이 살아있다는 증거라면, 죽고자 하는 육손은 선녀를 남겨두고 죽음과 동시에 고통과 절망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렇다면 육손은 본래 의도대로 죽을 수 없다. 육손은 깊은 딜레마에 빠진다. 그리고 그 순간 모친의 손에 끌려 목마를 타고 유곽으로 사라지는 선녀를 똑똑히 보게 된다. 이 괴물 같은 사건이 육손을 짓누른다.

선녀가 처한 상황은 기존의 가치관을 위협하고, 자극한다. 인간은 누구나 살아있음을 원하고, 죽음을 싫어한다. 죽으면 끝이라는 생각이다. 그래서 인간은 과거 도살장 인부였을 때의 육손처럼 “오직 사는 것만 생각“하고 “죽는 건 생각하지 못“한다. ’죽기살기’라는 합성어가 실은 ’살기’의 강한 긍정을 함의하는 것처럼 인간은 ’죽기살기’로 ’살기’를 꿈군다. 하지만 선녀의 삶을 생각할 때 상자 속의 고양이, 마구간 속의 가축과 마찬가지로 살거나 죽는, 생사의 문제는 중요하지 않다. 유곽에서 선녀의 삶과 죽음의 경계는 확실하지 않다. 선녀는 살아있으면서도 동시에 죽어있다. 그녀는 정체되어 있고, 아무것도 느낄 수 없다. 그녀는 분명 눈앞에 실재하는 존재이지만, 그녀의 존재 이유와 존재 범위를 제약하는 비극적 상황은 그녀를 실재하지 않는 인물로 만든다. 게다가 유곽에서 목마를 타고 잔치에 나온 선녀를 다시 유곽으로 이끄는 모친은 목마에 달린 끈을 잡아당긴다. 모친에게 “꼬박꼬박 돈을 갖다 주“는 “마음 착한 선녀“는 이리저리 끌리는 목마처럼 움직이며, 마구간에 붙박여 있는 목마인 양 유곽에 붙박여 있는 사물로서만 기능한다. 육손의 눈에 선녀의 이런 비극적인 모습은 포착된다.

살아있는 유가족 앞에서 죽음으로 용서를 구하고자 했던 육손은 살아있으면서도 살아있지 않은 선녀를 본 뒤 죽음을 실행하지 못한다. 그리고 육손도 선녀처럼 반생반사의 삶을 살게 된다. 선녀와 육손을 반생반사의 존재로 몰아가는 것은 보이는 그대로만 보고 단정 짓는 안계眼界의 인물들이다. 그들의 눈에 선녀는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仙女처럼 아름다운 외양으로 남자를 홀리는 요녀, 하룻밤 즐거움을 선사하는 유녀遊女, 집안 망신, 돈을 주는 착한 딸 선녀善女로 비친다. 육손은 여섯 개의 손가락을 지닌 기분 나쁜 동료, 보상금 대신 죽음으로 갚겠다는 염치없는 사람, 소원을 이뤄준 은인, 남자다운 남자로 비친다. 그들의 눈에는 선녀의 존재 양상이 보이지 않고, 육손이 죽겠다는 본질적인 의미도 보이지 않는다. 선녀와 육손의 고통을 똑바로 응시하는 자가 없기에 선녀와 육손은 반생반사의 존재로 남겨지게 된다. 그리고 의식은 자기동일성을 만든다. 2007년작 「황색여관」에서 이강백은 “인간의 일상적인 희망은 언제나 자기동일성에 이르는 것“이라고 말했고, 인도 철학자 용수는 『중론中論』에서 자기동일성, 자성自性이란 만들어지지도 않고 다른 존재에 의존하지도 않은채 성립된 것을 뜻한다고 언급했다. 쉽게 말해 A는 다른 존재와 연결되어 있지 않기에 A는 A일 뿐, A가 아닌 것은 ~A로 철저히 구별되고 제외된다. 자기동일적 관점에서 보면 삶은 삶일 뿐 죽음일 수 없다. 내 존재의 성립 근거는 오직 내 삶 속에서만 가능하다. 나의 고유한 삶은 나를 개별적인 존재자로 만들고, 내 존재를 보존하기 위한 방법은 나와 ’나 아닌 것’ 사이에 담을 쌓는 일이다. 이처럼 자기동일성이란 자신의 존재이유를 자신 속에서 발견하는 자족적인 본성이기에 자신 외에 타자他者를 고려하지 않는다. 본인의 삶만이 중요하다는 자기동일적 사고는 피를 나눈 가족마저 선녀를 타자로 내몰고, 죽음으로 용서를 구하고자 하는 육손의 의도는 본인의 삶에 영향을 끼치지 않으므로 버려둔다.

이강백은 극의 결말에서 선녀와 마찬가지로 육손에게도 목마와의 동일성과 직접성을 부여한다. 선녀가 감정이 없는 것처럼 육손은 맹인이 되어 시각이 사라진다. 그리고 억지로 끌려나와 움직이지도 않는 목마를 타고 세상 끝가지 달리는 놀이를 반복하게 된다. 결국 육손은 죽지 못한다. 그리고 죽지 못하기 때문에 제대로 살지 못하는 존재로 추락하고 만다. 달리 말해 육손은 살아있으면서 동시에 죽어있는 존재, 반생반사의 존재로 남겨지게 된다. 고통 받는 반생반사의 운명, 여섯 개의 손가락보다 기형적이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한다. 왜 이강백은 「죽기살기」를 따뜻하고 감동적인 드라마로 만들지 않았을까. 누군가 의로운 존재가 반생반사의 존재를 구출하거나, 위협적인 마구간의 완전히 없애는 극적 효과 말이다. 하지만 작가의 극작법은 본질적인 문제에 판에 박은 답을, 던지거나, 강력한 힘으로 난데없이 갈들을 해소하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의 트릭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사건의 해피엔딩은 텍스트 속의 뉘앙스를 파괴하고 관객 스스로가 성찰하도록 길을 내주지 않기 때문이다. 이강백은 상처를 덧내는 덧의 방법으로 텍스트를 직조한다. 상처의 틈을 비집고 들어가 더 큰 장애를 만든다. 물론 이런 접근방식은 반생반사의 존재가 희생의 대가라는 인식에서 비롯된다. 이강백의 마구간에서 반생반사의 존재는 시력이 없거나 굴욕, 수치, 고통을 느끼지 못하도록 마비되어 있다. 그런 그들의 빈틈이 마구간에서 살아갈 수 있는 생존방식으로 연결되는 점은 「죽기살기」를 비판적인 텍스트로 읽게반든다.

 

3. 사건의 진실은 언제나 시각 너머에

「죽기살기」는 육손의 살해와 자해 행위를 염두에 두면서, 살해와 자해 행위가 어떠한 이유에서 이루어졌는지 밝히는 추리극적 요소를 내재하고 있다. 극의 전반부가 육손이 동료 김두를 죽여야 했던 필연성을 집중적으로 드러내고 있다면, 중 · 후반부는 육손이 자신의 눈을 찌르는 미스터리를 드러내는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비교적 단순명료하게 밝혀지는 살해 사건의 전모와 달리 육손의 자해는 사건의 실마리가 조각으로 나누어지고 불투명하게 잡힌다. 이는 작가가 일관되게 고집하는 ’보이는 것 너머의 진실’을 파헤치는 작업이 만만치 않으며, 그것이 풀기 어려운 수수께끼임을 입증해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눈을 찌르는 육손의 행위에 대해 「에쿠우스」에서 정신과 의사 마틴 다이사트가 말의 눈을 찌른 알런 스트랑의 범행을 추리하듯이 좀 더 깊은 해석을 시도해야 하며, 통일성을 이루는 구조를 발견해야 한다.

육손이 동료 김두를 죽인 사건은 다음의 경로를 통해 진실이 밝혀진다. 육손이 감옥에서 출소하여 마을로 들어오면 육손의 동료들이 ’감’으로 이방인을 감지해낸다. 그러나 그들은 앞이 보이지 않기에 눈이 보이는 ’이층집 남자’에게 사실을 확인하기로 한다. 장님인 동료들의 눈을 대신하는 이층집 남자는 “성능이 아주 좋은“ 망원경을 소지하고 있다. 높은 위치에서 좋은 기기로 미세한 것까지 다 파악할 것 같은 그는 눈 먼 이들의 눈이 되어 마치 해설자처럼 사건의 정황을 설명해주지만, 사건의 본질에는 조금도 다가가지 못한다.

 

이층 남자 네. 이 망원경, 성능이 아주 좋아요. 얼굴 표정까지 선명하게 보입니다.
정두 얼굴 표정까지 보인다면 누군지 알겠군. (이층 남자를 향해) 그 남자, 누구요?
이층 남자 난 모릅니다.
박두 모른다......?
정두 우리는 못 보니까 모르지만 당신은 보면서도 모르오?
이층 남자 보는 것에도 한계가 있죠. 저 남자가 누구인지, 이름이 무엇인지, 왜 도살장에 들어갔다가 나왔는지, 나는 보앗지만 알수가 없습니다.

 

작가는 의도적으로 사건의 전모를 모두 육손의 입에서 나오게 한다. 동료들과 이층집 남자의 대화에서 아무 정보도 얻지 못했던 독자와 관객은 극의 1막 3장에서 육손의 대사를 통해 그가 누구이며, 왜 마을에 들어왓는지 알아채기 때문이다. 무기징역을 받은 육손이 출옥한 정황과 김두를 죽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 죽음을 죽음으로 갚고자하는 육손을 둘러산 비밀 모두 육손이 스스로 밝히기 전까지는 오리무중에 빠져 있다. 아무리 최첨단 기기를 이용하고 시력이 좋아도 현상 너머의 것을 보고할 수 없고, 진실을 포착할 수 없다는 작가의 통각점은 여러 차례 반복되어 표출된다. 이 점에서 두 눈이 안 보이는 장님과 시력이 좋은 사람은 극과 극이 아닌 동일한 모습을 보인다.

눈은 용적 5.5ml, 직격 24mm 정도 되는 작은 공과 같다. 주지하다시피 인간은 눈으로 물리적 대상을 분별하고, 세계 내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지각한다. 눈으로 인해 인간은 세계 내 관찰자가 된다. 인간은 그가 속해 있는 이 계에세서 눈의 작용으로 물체를 보고 색깔이 무엇이며 크기가 어떠한지 파악한다. 눈의 망막에 맺힌 상이 시신경으로 옮겨가고 이것이 뇌의 후두부에 전달되면 외부의 물체를 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 눈으로 받아들인 정보는 객관적인 관찰에 다름 아니고, 그것은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는 단서가 될 수 없다. 추리극에서 탐정이 사건을 파헤치는 능력은 시각의 힘이 아닌 범죄자의 심리를 궤뚫는 추리력이다. 사건의 진실은 언제나 시각 너머에 존재한다. 그런 의미에서 눈이란 위증의 가면과 같다. 무엇이 진실을 보았는가를 추적할 때 누구나 ’나의 눈’이라고 답하겠지만, 그것은 정답을 가리는 가리개로서 기능한다. 작가는 육손의 살해사건이 범인 스스로의 진술에서 나오도록 하여, 이와 같이 눈의 허위를 강조하고 눈으로 파악할 수 없는 진실에 방점을 찍고 있다.

이번에는 육손이 자신의 눈을 찌르는 자해 사건을 살펴보자. 이 사건은 단지 육손의 의지에서 비롯되었다고 하기엔 의심쩍은 면이 많다. 다시 한 번 작가의 진의를 강조해보자면 진실은 보이는 것 너머에 있다. 그렇다면 이강백이 교묘하게 세워놓은 사건의 용의자들을 추리하는 과정을 통해서야만 비로소 사건의 진실에 도달할 수 잇을 것이다. 앞서 눈이란 위증의 가면과 같고, 정답을 가리는 가리개로서 기능한다고 서술했다. 가면과 가리개(Mask)는 변장의 수단으로 사용되거나, 신체를 보호하기 위한 보호물로 사용되기도 하며, 연극의 페르소나(Persona)처럼 등장인물을 연기하기 위해 배우가 써야 하는 역학을 의미하기도 한다. 가면과 가리개는 숨김과 보호, 자아의 이중화와 관련을 맺고 있다.

가면과 가리개는 희곡에서 중요한 함의를 지닌다. 문제의 초점은 누가 육손을 자해하도록 만들었는가, 혹은 육손이 눈을 스스로 찌르도록 유도한 사람은 누구인가에 달려있다. 유가족 중 형제들은 이 사건에 깊이 연루되어 있다. 의붓아버지가 죽기를 기도했다며 육손을 은인 취급하는 형제들은 극의 말미에서 당나귀 가면을 쓰는데, 이는 이강백이 독자와 관객에게 주는 힌트로 작용한다. 형제들의 심리를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왜 그토록 육손에게 감사해하는지 알 수 있게 된다. 김두를 실제로 죽인 사람은 육손이지만, 형제들의 무의식에는 육손이 자신들의 분신으로서 김두를 죽였다는 믿음이 들어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프로이트S.Freud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잇다. “누가 실제적으로 범죄를 저질렀는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심리학은 단지 누가 그것을 감정적으로 원했고, 사건이 일어날 때 그것을 반겻는가에만 관심을 갖는다.“(「Dostoevsky and Perricle」) 그런 이유로 형제 중 아우는 육손의 환영파티에 방해꾼인 모친이 오지 못하도록 당나귀 가면을 쓰고 가서 모친이 육손에게 요구한 보상금을 새 가구로 대신 치른다. 아우와 동일인인 형은 아우가 모친의 집에서 합의하는 동안 당나귀 탈을 쓰고 정육점에 가서 고기를 산다. 살인사건 이후 채식주의자로 변모한 육손의 환영파티에 고기로 대접하겠다는 뜻은 분명 아버지 살해의 정당성과 직접적인 대응관계를 이룬다. 형제들이 아버지 살해의 향연을 ’도살장 길’에서 열고, 부친 살해의 죄로 장님이 되는 오이디푸스의 결말을 본인들이 아닌 육손에게 떠넘기는 행위는 사건의 심리적 이유까지 설명해준다. 형제들은 오이디푸스의 운명을 고스란히 육손에게 떠넘김으로써 엔딩 장면에서 목마를 타고 세상을 유랑하는 육손의 행위를 지켜보는 관찰자로 군림하게 된다.

희곡에 등장하는 또 하나의 가리개는 색안경이다. 정두, 박두, 오두는 잔치 당일 육손에게 맹인용 색안경을 선물하는데, 여기에는 망해 없어진 도살장에서 할 일 없는 그들의 보상심리를 육손이 자신들과 같아지는 방법으로 해결하려는 욕구가 담겨 있다. 게다가 색안경은 온통 눈자위가 하얀 정두, 박두, 오두의 눈을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가려주어 그들이 누군가의 시선에 좌지우지되는 것을 막고, 외부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게 해주는 물건이다. 어둠 속에서 사람들의 박수소리와 조롱 섞인 환호를 받지만, 그것에 동요될 수 없는 육손의 상황 이면에는 인간의 잔인한 마음이 자리한다. 이강백은 다시 관객에게 질문한다. 당신의 눈은 진실을 바로 보고 있냐고. 자해의 행위자가 육손이라고 해도 그것이 진실은 아닌 것처럼.

 

4. 반생반사의 희곡

이강백의 희곡을 무대로 옮기는 작업에서 연출가는 두 부분을 수정했다. 하나는 육손이 눈을 찌르는 장면이다. 희곡에는 육손이 지니고 있던 칼로 눈을 찌른다고 되어 있지만, 연출가는 잔칫상 위에 놓인 촛대로 눈을 찌르도록 변형했다. 이것은 시각적 효과를 고려한 변형이기에 무심히 넘길 수 있다. 그 다음은 무대 설정이다. 이강백이 희곡에서 설정한 「죽기살기」의 무대는 막에 따라 자유자재로 옮겨진다. 그는 1막의 무대를 2막에서 “무대 왼쪽에 있던 이층집이 무대 가운데로 옮겨져 있다.“고, 3막에서 “무대 가운데의 이층집이 무대 앞으로 옮겨져 있다.“고 바꿔 기술했다. 물론 실제 공연에서 무대는 옮겨지지 않고 1막에 등장했던 무대는 그대로 3막까지 이어진다. 연출의 변을 굳이 듣지 않아도 공연과정에서 무대를 옮기는 작업은 일종의 ’불가능’이자 ’금기’이기에, 이강백이 왜 하필 불가능과 금기에 도전하려 했는지 그 의도가 궁금해진다. 더불어 이강백은 마구간이라는 중요한 장소 역시 “건물 형태 없이, 목마들이 있는 것으로 묵시적인 표현을 한다.“고 기술했고, 마구간이 과거 도축용 가축들이 도살 순서를 기다리며 머물던 곳이라는 정보도 희곡의 지문에만 기술했다. 아직 미개발지역인 도살장 마을의 뒤편이 실은 “고층빌딩과 시청건물도 잇는“ 중심상업지역이라는 풍경 역시 희곡을 읽지 않고 공연을 관람했을 경우 그 뉘앙스를 파악하기 힘들기에 의구심은 증폭된다. 물론 연출의 양식적 형상화에 따라 작가의 공간적 지침은 보완될 수 있는 사항이지만, 연출가에게 공간의 메타포를 표현해내라는 난감한 문제를 안기고 있음은 분명하다.

희곡은 문학의 한 장르이면서 연극 공연을 위해 쓰인 작품이다. 희곡은 문학성과 공연성을 동시에 충족해야 하는 이중적 작업 사이에 잇다. 작가의 사유를 고스란히 전달하면서도 흥미로운 연극적 장치를 내부에 축조해놓아야 하는 것이 희곡 글쓰기의 특징일 것이다. 달리말해 문학과 연극 사이에 다리를 놓아주는 역할이 내재되어 잇다고 할 수 잇다. 그러나 공연의 현장에서 희곡은 언제든지 내용이 바뀔 수 있는 ’가변적인 텍스트’이고, 작가적 사유는 때로 연극의 스펙트럼에서 보이지 않는 자외선에 위치할 수 있다. 직설적인 어법이 아닌 고도의 상징과 은유로 표현되는 사유일수록 그러하다. 공연의 시작始作인 희곡을 찾아 읽고 되새김질하는 이가 드문 현 시대에서 희곡 작가의 딜레마는 발생한다. 희곡은 있지만 없고, 없으면서 있다. 이러한 문제 제기를 무학중심의 연극관이라고 매도하거나 희곡 독서를 가중하는 원론적인 접근으로 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이강백이 희곡의 담론을 메타적인 위치에서 집필한 첫 작품은 2005년 작 「맨드라미꽃」은 작가가 처음부터 희곡의 존재를 염두에 두고 집필한 작품이다. 그는 희곡이 처한 상황과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는 미묘한 부재를 은유적으로 표현했다. “넌 마치 무슨 해설자 같구나.“ “꾸민 이야기처럼 죽지 말아요!“라는 대사가 나오는 「맨드라미꽃」에서 주목할 점은 하숙집에 기거하는 정민의 고통과 그 고통을 읽어내는 하숙집 손녀 주혜, 그리고 피어나는 맨드라미꽃이다. 이강백은 희곡이 고통과 같다고 느꼈다. 희곡은 고통과 같아 그 고통을 남이 알아주지 않는 이상 드러나지 않고, 고통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유무有無의 날카로운 통찰이다. 작가가 보기에 희곡은 ’은고隱苦의 시학’이다. 하지만 그의 고통에 관심을 갖는 자, 그의 고통을 읽는 자가 있다면 마침내 비밀은 밝혀지게 된다. 주인공 주혜가 하숙집에 기거하는 정민의 고통에 관심을 갖고, 그의 고통을 읽어낼 때 맨드라미꽃은 피어난다. 맨드라미꽃을 본 사람은 오직 주혜뿐이다. 그런 주혜는 정민이 자살하려고 할 때 외친다. “꾸민 이야기처럼 죽지 말아요!“ 그리고 「죽기살기」는 맨드라미꽃의 계보를 이은 보다 내밀한 메타극이라 볼 수 있다. 이강백은 관객이 보이는 것 너머의 것을 보기 원했다. 막에 따라 무대를 바꿀 때 무대의 뒤켠에서 보이지 않았던 중심 상업지역의 풍경을 보여주고 싶었고, 무대 앞 입구부터 무대 뒤쪽 막다른 곳까지 도살장 길을 보여주어 그 의미를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관객의 ’눈眼’을 ’문門’으로 만들어 주고픈 그의 바름은 연극에서 이루어지지 않았다. 희곡과 연극이 한 쌍으로 연결되지 못한 점은 희곡 내부의 형식적 문제만이 아닌, 작품의 주제로까지 확장된다. 있으면서 없고, 살았으면서 동시에 죽은 반생반사의 존재란 연극 속에 완전히 용해되지 못한 희곡의 상황과 별반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극예술에 대한 작가의 시학이 반영되어 있는 극을 메타극(Metadrama)이라고 지칭할 때(황계정, 『메타드라마』, 연세대출판부) 「죽기살기」는 분명 ’메타극’으로 읽힐 수 있다. 그래서 희곡이라는 반생반사의 존재 앞에서 그의 고통에 관심을 갖고, 그의 고통을 읽어내야 함은 작가가 던져놓은 우리 모두의 과제일 것이다. 희곡 작가로서의 이강백의 의무는 시작일 뿐, 아직 끝나지 않았다.

 

 


1) 이강백의 「죽기살기」는 《한국연극》 5월호(통권 394호)에 전문 게재된 것을 참고한다.


성유경 이화여대 철학과, 동대학원 국문과 졸업

 

* 《쿨투라》 2010년 봄호(통권 17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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