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영화 월평] '극한직업'이 남긴 것들
[3월 영화 월평] '극한직업'이 남긴 것들
  • 윤성은(영화평론가, 본지 편집위원)
  • 승인 2019.03.27 10: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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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 추석부터 연말연시까지 한국 블록버스터들이 줄줄이 고배를 마시면서 배급사들 간의 과도한 경쟁이 화를 불렀다는 분석이 나왔다.

예를 들어, 2017년 연말에는 <강철비>(양우석), <신과 함께: 죄와 벌>(김용화), <1987>(장준환)이 일주일 간격으로 개봉해서 모두 좋은 결과를 얻은 반면, 2018년에는 <마약왕>(우민호), <스윙키즈>(강형철)가 같은 날 개봉하고, <PMC: 더 벙커>(김병우)가 일주일 뒤 개봉한 탓으로 관객들이 분산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영향이 전혀 없었다고 단정 짓기는 어렵지만, 2017년과 2018년 연말 개봉작들은 대중성 면에서 격차가 크다. <강철비>와 <신과 함께: 죄와 벌>이 같은 날 개봉했다고 해도 <마약왕>과 <스윙키즈> 같은 결과를 내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의미다. 그러나 제작이끝난 영화를 더 재밌게 만들 방법은 없으므로 설 연휴를 겨냥한 두 편의 한국 상업영화는 여느 때보다 조심스럽게 날을 택했고, <극한직업>(이병헌)은 음력설보다 약 2주 빠른 1월 23일에, <뺑반>(한준희)은 설 연휴가 시작되기 직전인 1월 30일에 개봉했다. 결과는 <극한직업>의 압승이었다.

 

 

 18번째 한국 천만 영화, 개봉 15일 만에 천만 명 돌파, 설 연휴 기간 최다 관객 동원, 코미디 영화 최다 관객 동원. <극한직업>의 혁혁한 성공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콘텍스트적 맥락부터 말하자면, 관객들이 가볍게 소비할 수 있는 코미디 영화들을 예전보다 더 많이 찾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물론 실화를 바탕으로 한 진지한 작품들, <암수살인>(김태균), <국가 부도의 날>(최국희)도 호응을 얻었지만, 오랫동안 인기를 끌지 못했던 로맨틱 코미디 <너의 결혼식>(이석근)이나, 블랙 코미디를 지향한 <완벽한 타인>(이재규) 등의 기대를 뛰어 넘은 성공이 영화계에 남긴 여파는 컸다. <극한 직업>은 철저히 관객들에게 웃음을 주겠다는 목표하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다양한 종류의 코미디로 직조되어 있다.

우선, <과속 스캔들>, <써니> 등 강형철 감독 흥행작들의 각본을 함께 썼던 이병헌 감독은 그가 가장 잘하는 말맛 코미디를 바탕으로 시츄에이션 코미디, 슬랩 스틱 코미디까지 동원해 관객들을 쉴 새 없이 즐겁게 만든다. <완벽한 타인>이 궁지에 빠진 인물들의 행동을 세련되게 희화화 시킨 코미디라면, <극한 직업>의 코미디는 훨씬 직관적이다. 마약상 중간책을 쫓는 장형사(이하늬), 영호(이동휘), 재훈(공명) 등 세 명의 멤버 옆으로 오토바이를 탄 마형사(진선규)가 유유히 지나가는 첫 시퀀스에서 슬로우 모션을 통해 두 무리를 과장되게 대비시킬 때, B급 감성을 지향하는 이 영화의 콘셉트는 분명히 드러난다.

마약상 감시를 위해 차린 치킨집이 입소문을 타기 시작하면서 삽입되는 아내를 향한 고반장(류승룡)의 내레이션과 영상은 감성적인 CF의 관습을 모방한 것인데, 위장 창업을 한 형사들이 광고를 찍었을 리 만무하기 때문에 이것은 의식의 흐름 안에서만 소비될 수 있는 장면이다.

 

 

 이처럼 비현실적이고 판타지가 가미된 코미디까지도 관객들에게 어필한 것은 기본적으로 탄탄한 플롯과 흥미로운 캐릭터가 바탕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경찰로서 대우받지 못했던 마약단속반 멤버들이 치킨 사업에서 잭팟을 터뜨리게 되는 설정부터 유쾌한데다 고반장이 사업에 집중하려고 할 때, 이무배(신하균) 조직이 마약을 손쉽게 배달하기 위해 제 발로 고반장을 찾아오고, 마약단속반이 그들과 동업하기로 한 테드창까지 일망타진하게 된다는 내용이 작년 개봉한 백억대 작품들의 내러티브보다 훨씬 설득력 있게 진행된다. 다섯 명의 경찰 캐릭터 구성도 창의적이다. 저임금 공무원의 비애에 엉뚱한 매력을 겸한 고반장부터 욕쟁이 장형사, 사고뭉치 마형사, 냉철한 영호, 의욕충만 재훈까지 전형성에 신선함이 가미된 인물들이 영화를 사이좋게 이끌어간다.

 

 

 뺑소니전담반의 성적은 대조적이다. <뺑반>은 개봉 2주 동안 180만 명의 관객을 불러 모았는데, <극한직업>의 두 배에 달하는 130억의 제작비를 들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재앙이나 다름없는 수준이다. 공효진, 조정석, 류준열 등 좋은 배우들이 있었고, 이례적으로 조연까지 여성 경찰 캐릭터가 세 명이나 등장하며 F1 선수 출신의 사업가를 악역으로 설정하는 등 독특한 면이 있었던 반면, 최근 개봉한 대부분의 한국 블록버스터들과 마찬가지로 주제의식과 오락성 사이의 균형을 맞추는데 실패했다. 서민재(류준열)와 정재철(조정석)에게 공히 부여한 어두운 개인사가 영화를 무겁게 만들었고, 액션과의 강약조절이 매끄럽지 못했던 것을 그 요인으로 짚어 볼 수 있다.

 

 

 블록버스터들은 최소한 손해를 보지 않는다는 공식이 처절히 깨진 요즘, 65억으로 만든 중간규모의 <극한직업>이 남긴 의미는 크다. 개별 작품 뿐 아니라 한국영화계의 리스크를 줄인다는 측면에서 이런 작품들의 제작은 더욱 중요해졌다. 무엇보다 초심으로 돌아가 탄탄한 각본에 심혈을 기울일 타이밍이다. 스타 감독이나 배우, 시각 효과가 보장해주지 못하는 흥행의 비기祕器가 그 안에 다 있다. 

 

 

* 《쿨투라》 2019년 3월호(통권 57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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