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월평] 시적인 것의 귀환
[문학 월평] 시적인 것의 귀환
  • 전철희(문학평론가)
  • 승인 2019.03.25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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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 이제니 시집

 1959년에 개봉한 영화 <벤허Ben-Hur>는, 로마시대의 귀족이었다가 누명을 쓰고 노예로 전락한 유태인 벤허의 이야기였다. 그는 각고의 노력 끝에 원수에게 복수할 기회를 얻는다.

그런데 목숨을 건 전차경주에서 패배한 원수는, 벤허의 가족이 이미 문둥병에 걸렸다고 조롱하듯 말하면서 죽는다. 벤허는 분노와 절망에 사로잡힌다. 그런데 이때 갑자기 예수가 등장해서 그의 가족들을 치유해주고 그 모습을 본 벤허는 마음의 안정을 얻게 된다.

 

 일설에 따르면 종교를 금기시했던 한 나라에서는 이 영화의 결말 부분을 통째로 잘라버렸다고 한다. 삭제판은 전차경주를 마친 벤허가 가족에 대한 비보를 듣고는 넓은 콜로세움의 한복판에서 당혹스러운 허무감을 느끼는 장면으로 마무리된다. 어쩌면 이 나라의 검열관들은 의도치 않게 작품을 ‘시적’으로 고양시킨 것일지도 모르겠다.

<벤허> 원작은 주인공이 예수라는 신성한 존재(deus ex machina)의 힘을 빌려 목표한 바를 이뤄낸다는 전통적인 권선징악 서사에 머물러 있었다. 그에 반해 삭제판은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절망과 허무를 처연하게 가시화시킨다.

 

 후자의 감각들이야말로 ‘시적’인 것이라면 어떨까. 서사는 누군가의 흥망성쇠를 완결된 형식으로 표현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서사물들은 어떤 인물이 특별한 사건을 통해 행복해지거나 파멸에 마주했다는 내용으로 귀결된다. 그에 반해 시는, 어떤 극적인 사건도 일어나지 않고 그래서 거창한 의미도 가질 수 없는 지리멸렬한 삶의 순간들에 천착한다.

누군가의 언명을 빌려 말하자면, 시는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에 대한 증언이다. 그런 기준에서 본다면 삭제판 <벤허>의 결말이야말로 진정으로 ‘시적’이라고 해야 한다.

 

 물론 이 분류는 완벽하지 않다. 모든 소설과 영화가 ‘서사적’ 인 특성을 완비한 것은 아닐뿐더러, 모든 시가 ‘시적’인 정서에 의해서만 추동된다고도 할 수 없다. 그런데 가끔은 너무도 우직하게 ‘서사적’이거나 ‘시적’인 것들만을 오롯하게 추구한 작품이 나와서 장르적 차이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강화시켜주기도 한다. 이제니의 세 번째 시집 『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이 그런 경우이다.

 

지금까지 평단은 이제니가 고착된 삶의 양태를 음울하면서도 재기발랄한 반복어법으로 표현한다는 점에 주목해왔다. 『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에서도 그런 기교적 특성은 계승되어 있다. 한데 이번 시집은 이전의 작품들보다 시인의 문학관을 더욱 명료하게 표현한다는 점에서 특히 주목할 만하다.

 

 이제니는 “나”보다 “너”에 대해 자주 이야기하는 시인이다. 가령 이런 구절을 보라. “새로운 세계를 위해서는 꾸미지 않는 목소리가 필요하다. 오래된 목소리를 상기시키기 위해서는 새로운 배열이 필요하다.(…) 아무것도 없으니까 막힌 부분을 골라냅니다. 나날이 새로워질 사건과 물건들을 가지런히 늘어놓습니다.

새로운 세기에 살고 있는 새로운 이야기를 바탕으로 너를 한문장 이전으로 옮겨둔다. 정확히 나를 전달하려고 노력하는 과정 속에 있기 때문이다. 냉담한 목소리가 흘러들어도 너는 계속 될 것이기 때문이다.”(「지금 우리가 언어로 말하는 여러 가지 이야기들」 부분)

 

 여기에서 시인은 세상을 “아무것도 없는” 공허한 곳으로 인식 하고 있다. 그러나 그녀는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보겠다고 공언한다. 이때 갑자기 “너”에 대한 이야기가 삽입된다. “새로운 세기에 살고 있는 새로운 이야기를 바탕으로 너를 한 문장 이전으로 옮겨둔다.” 그러니까 시인에게 새로운 이야기를 창조하는 작업은 결국 “너”에 대한 기록이 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여기에서 “너”는 특정한 인물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마치 한용운의 시에서 “님”이 실재하는 대상을 지칭하지는 않았던 것과 같은 이치다. 한용운의 “님”은 “침묵”하고 있는 상태로만 존재했다.

그의 시 속 화자는 세상의 무의미성에 대한 “시적”인 통찰을 가지고 있었지만, 부재하는 님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통해 더욱 굳건한 사람으로 성장하는 모습을 독자에게 보여주었다. 이제니가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을 “너”를 이야기하는 까닭도 이와 같을 것이다.

그녀는 “너”에 대한 마음을 기반으로 삼아야만 이 무의미한 세상에서 새로운 의미를 생성할 수 있다는 인식을 앞의 작품에서 보여준 것이다.

 

 이번 시집의 표제작에서도 시인은 단절된 어구들을 산발적으로 나열한다. 그리고 자신의 시는 내면에서 끊임없이 흘러가고 있는 모종의 대상들을 포착해서 “흘려 쓴” 것임을 언명한다. 이때의 주어도 “나”가 아닌 “너”이다. “흘려 쓴 글자들은. 머뭇거리고 있다. 멈칫거리고 있다. 그리하여 너는 다시 흘려 쓴다.”(「박화연습 문장-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 부분) 

 

그런데 “너”가 현실에서 부재하는 대상이라면 “너”를 염원하는 마음 또한 “나”의 내면에서만 생겨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제니의 시에서 중심이 되는 인물은 결국 “너”가 아닌 “나”이다. “너”에 대한 이야기들은 “정확히 나를 전달하려고 노력하는 과정 속에”서 생성된 결과물일 뿐이다.

 

 혹자는 이제니의 시가 보여주는 단절된 어구들의 연쇄가 “무의미”하다고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치면 우리의 삶 자체가 “무의미”의 연속이다. 오늘날은 아무래도 시보다 소설이나 영화 같은 서사물들이 인기를 얻는 상황이다.

어쩌면 현실이 무의미하고 “극적”이지 않은 탓에 우리는 더더욱 굵직한 서사의 인물들에게 몰입하려고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허무와 무기력이 관성화된 이 시대에야말로, “시적”일 만큼 무의미한 현실에 대해 무엇인가를 말해보려는 시인들의 노고에 눈을 돌려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이제니는 “남들과 똑같은 노래를 부르는 것에 어떤 즐거움이 있습니까”(「안개 속을 걸어가면 밤이 우리를 이끌었고」)라고 물으면서 우리에게 새로운 노래를 들려주고자 분투하는 시인이다. “새로운 노래”라고 해서 오해는 하지 마시길. 나는 이 글에서 그녀의 작품이 “시적인 것”의 전통을 충실하게 계승하고 있음을 강조하려 했다.

그러나 “오래된 목소리를 상기”시키려면 “새로운 배열이 필요”한 법이다. 그러니까 고쳐 말하자. 이제니는 시의 전통적인 목적을 오늘날의 시대에 맞게 갱신하고 있는 작가라고. 향후에 시가 무엇이고 “시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현대적으로 논하려는 사람들에게 그녀의 시집은 빼놓을 수 없는 참조항이 될 것이다.

 

 

* 《쿨투라》 2019년 3월호(통권 57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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