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 북한의 기록영화와 컬러영화를 개척한 선구자 정준채, 정철훈, 『정준채 평전』
[북리뷰] 북한의 기록영화와 컬러영화를 개척한 선구자 정준채, 정철훈, 『정준채 평전』
  • 손희(본지 에디터)
  • 승인 2022.08.04 0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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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 박찬욱, 황동혁 등 한국 영화감독들이 칸영화제와 아카데미 등에서 수상하며 한국영화가 세계를 휩쓰는 K-무비 시대가 됐다.

그렇다면 한국인 중에서 국제영화제에서 제일 처음 수상한 이는 누구일까. 언론인 출신 시인이자 소설가 정철훈은 ‘정준채’라는 낯선 이름을 불러낸다. 영화인 정준채는 남한에서는 생소한 이름이다. 정철훈 시인은 우리 영화사에서 잊혀진 영화인을 『정준채 평전』을 통해 되살려낸다.

백석의 행적을 찾아 나선 ‘나’와 내 안의 ‘정준채’가 마찰을 일으키고 있었다. 영화인 정준채의 꿈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어떤 영화를 만들고 싶었던 것일까. 장춘의 인파 속에 백석과 정준채의 그림자가 함께 어른거렸다. 나는 백석을 경유해 정준채를 소환하고 있었다.
…(중략)…
정준채는 1952~1959년에 걸쳐 모스크바 음악원에 유학 중인 동생 정추(1923~2013, 카자흐스탄
망명 작곡가)에게 모두 39통(서신 36통, 엽서 3장)의 서신을 보냈다. 카자흐스탄 알마티의 정추 유품에서 수습된 정준채의 서신들은 일종의 하이퍼텍스트와 같았다. 서신은 한 영화인의 예술에 대한 고뇌와 지성인으로써의 갈등, 그리고 전후 복구 시기 북한의 실체를 여실히 보여주는 구체적 증언이기도 하다. 정준채와 동생 추는 각각 평양과 모스크바에서 각자의 예술을 추구했다. 언젠가 정준채가 연출한 영화에 동생 추가 음악을 맡아 대작을 완성하는 꿈을 꾸었으나 그 꿈은 영영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렇게 보면 예술은 상실된 꿈의 반영일지 모른다.
- 저자의 서문에서

저자에 의하면 광주 명문가 출신의 정준채는 일본에서 영화를 공부하고 귀국한 뒤 2년 남짓 남한에서 활동했다. 1945년 11월 서울 혜화동에서 열린 조선프롤레타리아영화동맹(프로영맹) 결성식에서 29세의 젊은 나이에 서기장으로 선출되었지만 프로영맹은 불과 1개월 남짓 존속했다. 그해 12월 16일 개최된 전영화인대회에서 프로연맹은 조선영화건설본부와 함께 조선영화동맹으로 통합했으며, 조선영화동맹 중앙집행위원인 정준채는 1946년 1월 기록영화 〈민주주의 민족전선〉 촬영차 입북했다.

정준채의 북한 행적은 그해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중앙위원회 선전부를 찾아가 ‘영화반’을 조직하자고 제의한 것에서부터 찾아진다. 저자 정철훈은 “정준채는 1949년 소련의 북조선 지원을 필름에 담은 기록 영화 <친선의 노래>를 제작했고 이 영화로 1950년 제 5차 체코슬로바키아 카를로비바리국제영화축전에서 기록영화 부문 작품상을 수상했다. 이는 남북한을 통틀어 최초의 국제영화상 수상”이라고 말한다.

아울러 그가 연출한 <1950년 5·1절>(1950)은 북한 최초의 기록영화부문 컬러영화이고 1956년 최승희 주연의 무용극 <사도성의 이야기>는 북한 최초의 극예술영화부문 컬러영화이다. 정준채는 북한의 기록영화와 컬러영화를 개척한 선구자만 그의 이름은 1960년 이후 북한의 모든 문헌에서 사라졌다. 이런 배경에는 북한 체제에 대한 입장이 달랐던 예술가 형제의 가슴 아픈 이야기가 숨어있다.

정준채의 생애는 윤심덕과 함께 현해탄에서 동반 투신한 김우진(고모부), 남과 북 모두에게 버림받고 카자흐스탄에 정착했던 천재 음악가 정추(동생), 세계적인 발레리노 백성규(친구), 무용가 최승희 등과도 연결되어 있다. 500쪽이 훌쩍 넘는 이 책은 한국 근대 영화 초기사를 풍성하게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정준채가 보낸 수십 통의 편지 속에서 드러나는 북한 영화 초창기 장면들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영화사의 귀한 자료이다.

서울키노 시절 아이모 촬영기와 함께

예술!! 그렇다. 나의 갈 길은 예술이다. 이렇게 나의 주관을 내걸고 모름지기 전진하는 때 나는 가지가지의 감명 깊은 현실을 몇 번이고 접했다. 이 무수한 감명의 생활의 하나에 최승희 여사의 무용관람도 헤아릴수 있는 터이다.
- 본문 166쪽

우리 영화사에서 잊혀진 영화인을 『정준채 평전』을 통해 되살려낸 저자 정철훈은 시인, 소설가이자 역사 학자이다. 러시아 외무성 외교아카데미에서 역사학박사학위을 받았으며, 현재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역사연구소 객원연구위원, (사)유라시아문화연대 이사, 도봉문화원 편지문학관 관장이다. 시집으로 『살고 싶은 아침』 『내 졸음에도 사랑은 떠도느냐』 『개 같은 신념』 『뻬쩨르부르그로 가는 마지막 열차』 『빛나는 단도』 『만주만리』 『가만히 깨어나 혼자』와 장편소설 『인간의 악보』 『카인의 정원』 『소설 김알렉산드라』 『모든 복은 소년에게』 평전·탐사기 『오빠 이상 누이 옥희』 『백석을 찾아서』 『내가 만난 손창섭』 『문학아 밖에 나가서 다시 얼어오렴아』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김』 『뒤집어져야 문학이다』 『소련은 살아있다』 『옐찐과 21세기 러시아』 등이 있다.

 


 

* 《쿨투라》 2022년 8월호(통권 98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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