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산책] '볼레로'를 들어보시라!
[클래식 산책] '볼레로'를 들어보시라!
  • 한정원(클래식 칼럼니스트)
  • 승인 2019.03.25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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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은 기억을 담아내는 투명한 그릇이다. 그 안에는 문득, 익숙하지는 않지만, 가슴을 따뜻하고 충일하게 하는 또렷한 순간이 담겨 있다. 기분 좋을 정도의 무거운 울림이 마음 깊이 들어오기도 하고, 매끈하고 단정한 솜사탕 같은 울림이 한동안 귀를 즐겁게 하기도 한다.

처음 만나는 듯한 강렬한 느낌, 그 소리의 울림이 매혹적이고 아름다운 만큼, 음악은 우리 삶에서 대체할 수 없는 선명한 자리를 차지한다. 고단하고 팍팍한 삶의 줄기속에서도 음악은 번번이 우리로 하여금 순간적인 감동과 위안을 경험하게끔 해주지 않는가.

 

 얼마 전 화제가 된 한 드라마에서 클래식 음악을 적절하게 사용하여 그 묘미를 더하는 경우를 보았다. 대사 한 마디 없이 배경 음악만으로 연기자의 내면 상태를 잘 표현한 것이다. 매회 본방 사수를 한 것은 아니지만, 그 드라마는 과연 다음에는 어떤 클래식 곡을 들려줄까 하는 궁금증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제작진의 선곡選曲이 눈부신 바 있었다.

그 배경 음악 가운데 가장 긴 여운으로 남은 곡이 있었는데, 한동안 묻어 두었던 추억을 선명하게 소환해준 프란츠 슈베르트(1797~1828)의 가곡 「마왕 Erlkonig Opus 1, D.328」이었다.

 

 

 

마왕, 무겁고 날카로운 속삭임

「마왕」은 피아노로 시작하는 도입 부분이 무거운 울림으로 전해지면서 빠른 템포의 셋잇단음표 G음이 속사포처럼 날아오는 곡이다. 건반을 바삐 오르내리는 소리들은 애초에 사람의 감정이란 없었던 듯 날카롭게 번져온다. 이 작품에서는 한 아버지가 아픈 아들을 품에 안은 채 말을 타고 숲을 달린다. 영혼을 데려가려는 마왕의 악마 같은 속삭임에 아들은 공포에 사로잡혀 있다.

아버지는 두려움에 떠는 아들의 마음을 달래주면서 말을 몰지만, 여정 끝에서 결국 아들은 아버지 품 안에서 죽고 만다. 「마왕」은 슈베르트의 출판물 1호이다. 열여덟 살 청년 슈베르트는 평소 독일의 대문호 괴테의 시에 매료되어 있었는데, 어느 날 아침 대화체 형식으로 씌어진 괴테의 담시에 크게 감동을 받아 단 하루 만에 이 곡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날 저녁 친구들과의 모임에서 슈베르트는 이를 선보였고, 「마왕」은 6년 후 빈의 케른트너토어 극장에서 정식으로 발표되기에 이른다.

 

 잘 알려져 있듯이, 슈베르트는 근대 독일 가곡의 창시자 또는 가곡의 왕이라고 불린다. 그는 고전주의 형식을 바탕으로 하여 인간의 주관적 감정을 마음껏 표현하는 낭만주의 음악의 문을 연 작곡가이다. 그는 서른한살 꽃다운 나이에 빈에서 생을 마감했다. 신동 모차르트보다도 무려 4년이나 더 짧은 삶이었다. 슈베르트는 그 길지 않은 생애 동안 천여 곡의 작품을 남겼는데, 사람들은 그 가운데 그의 음악적 구심점이 되는 가곡을 650곡 정도로 셈한다.

 

 당시 베토벤은 아이텔레스의 시에 곡을 붙여 가곡집 「멀리 있는 연인에게」를 펼쳐냄으로써 예술 가곡의 선구자적 역할을 하였다. 후에 그 맥은 슈만, 브람스, 볼프로 이어지면서 피아노와 사람의 목소리만으로 음악을 이루는 예술 가곡으로 자리를 잡는다. 대표적 예술 가곡집으로는 하이네 시집에 곡을 붙인 슈만의 「시인의 사랑」, 뮐러의 시집에 곡을 붙인 슈베르트의 「아름다운 물방앗간 아가씨」와 「겨울 나그네」 등이 있다. 그 가운데 극중 구조물 피라미드와 묘한 조합을 이루며 매혹적으로 흘러나오던 또 하나의 곡이 있다. 인상주의 작곡가 모리스 라벨(1875~1937)의 「볼레로Bolero Op. 81」이다.

 

 

 

볼레로, 다양한 음색의 대담한

흐름 ‘볼레로’는 스페인의 무곡에 기원을 두고 있다. 4분의 3박자 캐스터네츠 리듬에 맞추어 두 명 또는 여럿이 짝을 이루어 추는 춤이다. 1780년경 스페인의 남서부 항구였던 카디스에 살던 무용수 세바스티안 세레소가 처음 창안하였다. 작품 「볼레로」는 라벨의 마지막 관현악 곡인데, 러시아 안무가 이다 루빈스타인의 위촉을 받아 만들어진 이 발레 음악은 1928년 파리 오페라극장에서의 초연 이후로는 주로 연주회용 관현악곡으로 연주되었다고 한다. ‘판당고’라는 원래 제목도 나중에 ‘볼레로’로 바뀌었다.

 

 「볼레로」는 비록 단순한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매우 흥미롭다. 이 곡에는 오직 크레셴도만이 존재한다. 그 안에는 크게 두 개의 주제가 흐른다. 3박자의 볼레로 리듬 주제는 두 마디 단위로 약 17분 동안 169번 반복하여 연주된다. 처음 도입은 작은 작은북(사이드 드럼)의 볼레로 리듬과 비올라, 첼로의 피치카토 음이 피아노시시모의 들릴 듯 말 듯한 음들로 시작한다. 작은 소리와 긴장감이 넘치는 고른 리듬이다. 조심스럽게 그 리듬 위에 음을 얹듯이 플루트가 제1주제를 연주하고 이어서 클라리넷이 반복한다.

뒤이어 제2주제를 바순이 연주하면 그 선율을 받아 피콜로클라리넷이 다시 한번 반복한다. 그 다음 계속해서 오보에(제1주제), 플루트와 약음기를 끼운 트럼펫(제1주제), 테너섹소폰(제2주제), 소프랑섹소폰(제2주제), 피콜로플루트, 이렇듯 악기를 달리하거나 더해가며 두 개의 주제를 번갈아 반복 연주하게 된다. 전체 악기가 합주하는 마지막에서 갑자기 E장조로 전조했다가 다시 원래 조성인 C장조로 돌아와 끝을 맺는다.

 

 대부분의 음악 구조는 선율과 리듬을 변화시키면서 곡의 흐름을 이어가는데, ‘볼레로’는 그와 달리 마지막까지 일정한 리듬과 주제 선율을 유지한다. 악기들의 순차적 배치와 음의 강약, 음색의 변화만으로 색다른 음악 세계로 우리를 이끌어간다. 열여덟 개의 변주곡으로 구성되며, 동일한 멜로디가 여러 악기로 바뀌어 음색을 다양하게 변화시켜 가면서 대담한 흐름을 전개해간다.

라벨의 「볼레로」는 최근 발달한 악기들 덕에 대중적 인지도가 높아졌지만, 여전히 연주자에게는 부담이 적지 않은 곡으로 알려져 있다. 많은 독주 악기의 솔로 연주를 들을 수 있는 흔치 않은 곡이며, 연주 시간 내내 온 집중력을 발휘해 흔들림 없는 볼레로 리듬을 책임지는 멋진 드럼연주자를 만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자, 한번, 라벨의 「볼레로」를 들어보시라!

 

 

* 《쿨투라》 2019년 3월호(통권 57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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