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월평]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야
[드라마 월평]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야
  • 김민정(드라마평론가, 본지 편집위원)
  • 승인 2019.03.26 15: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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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초반, 여대생이라면 누구나 롤모델로 삼는 사람이 있었다. 전 세계를 누비며 자신의 꿈과 사랑을 마음껏 펼쳤던 ‘바람의 딸’ 한비야(현 월드비전 세계시민 학교 교장). 그녀가 이틀에 한 번 잔다는 걸 알기 전까지나 역시 그녀를 한동안 흠모했다. 직접 발로 현장을 누비고 싶다는 나의 꿈은 시간이 흘러 세계 여러 나라에서 제작한 드라마를 침대에 누워 보는 것으로 변했고, 한비야가 떠난 자리에는 새로운 사람이 자리를 잡았다. 바로 송재정 드라마 작가다.

그녀의 대표작 <나인>(2013)은 20년 전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신비의 향 9개를 얻게 되면서 펼쳐지는 이야기로, 반전의 반전을 거듭하는 긴장감 넘치는 서사 전개 덕분에 작품성과 대중성 모두 큰 호평을 받았다. 지금의 ‘작가 송재정’은 물론이고 ‘드라마왕국 tvN’이 되기까지 큰 주춧돌 역할을 한 작품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W>(2016)가 가장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 있다. 드라마를 보는 내내 고통에 몸부림쳤던 짜릿한 기억 때문이다. 서당 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오랫동안 드라마를 꾸준히 보아온 성실한 시청자들은 드라마가 어떻게 흘러갈지 훤히 꿰뚫고 있다. 다 아는 내용을 왜 보는 거냐고 묻고 싶겠지만, 매끼 먹는 밥맛의 미묘한 차이를 구분할 수 있는 사람만이 진정한 미식가인 것처럼 진정한 드라마 애호가들은 사소한 대사 한 줄에서도 품격을 감별해낼 수 있다. 명품과 짝퉁이 겉보기엔 비슷해 보여도 그 차이를 아는 사람은 알지 않는가.

웹툰 주인공 강철과 웹툰 작가의 딸 오연주의 사랑과모험에 관한 이야기인 <W>는 현실과 웹툰 세계를 오가며 벌어지는 사건들을 흥미진진하게 풀어낸다. 만화를 찢고 나온 남자, 일명 ‘만찢남’이란 표현은 송재정 작가의 손길에 힘입어 생명력을 얻게 된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철저하게 시청자들의 예상이 벗어난 지점에서 이야기가 시작되고 또 확장된다는 점이다. 내가 지금 먹는 게 찰밥인지 보리밥인지 질은 밥인지 된 밥인지 음미할 겨를이 없다. 웹툰 세계와 현실을 오가는 동안 너무나 낯선 맛이 혀를 휘감고 미각을 매혹한다. 극 전개를 추리하기는커녕 스토리를 따라가기에 바쁘다가 나중엔 그조차 포기하고 작가가 이끄는 대로 무력하게 드라마를 시청할 수밖에 없다. 끊임없이 추가되는 가상세계의 규칙이 인위적이라고 느껴질 때도 있지만 이런 규칙을 계속해서 만들어내는 엄청난 상상력에 압도되어 금세 고분고분해지고 만다. 일방적인 나의 패배였다.

 

최근 방영된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은 증강현실 게임을 주요 모티프로 현실과 게임 세계를 오가며 이야기가 전개된다. 이쯤 되면 송재정 작가를 끊임없이 새로움에 도전하는 ‘무한도전’의 아이콘이라고 불러도 되지 않을까 싶다. 한국드라마 역사에 있어 가장 문제적인 작품 중 하나로 기록될 것이 분명한 이 드라마는, 게임 유저들이 게임 캐릭터의 회복력을 높이기 위해 실제 편의점에 들어가 토레타를 마시고 서브웨이에 가서 샌드위치를 먹는 장면에서 감탄과 경의를 표하게 된다. 단순히 드라마 PPL로서 특정 브랜드의 음료와 음식이 등장하는 것이 아니다. 이 모습은 가까운 미래에 우리가 직면하게 될 세상, 그러니까 가상세계와 현실의 경계가 무너진, 더 나아가 실재보다 더 실재 같은 ‘시뮬라르크’의 세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이 아니라 ‘예언’이랄까.

그동안 송재정 작가는 시간여행 모티프를 기반으로 한 판타지 드라마를 연달아 선보여왔다. 판타지는 장르 특성상 현실의 논리와는 다른 환상적 세계를 그럴듯하게 재현하기 위한 정교한 내적 질서가 먼저 구축돼야 한다. 우리가 보았던 판타지 드라마들이 미지未知의 미래가 아닌 익숙한 과거로 가는 이유가 대부분 여기에 있다. 비현실적인 세계를 현실적으로 그려내야 하는 어려움, 즉 판타지는 비현실성과 현실성이라는 ‘양날의 검’이기 때문이다. 비겁하다, 욕하지 마라!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의 첫 회에서 주인공 유진오가 제일 먼저 획득한 게임 무기가 ‘검’이라는 것은 그래서 상징적이다. 검을 획득함으로써 그는 다른 유저와의 대결에서 승리를 거머쥐고 나중엔 마스터로 승격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게 된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정신이상자와 살인자로 내몰리면서 쫓기는 신세가 된다. 현실을 압도하는 비현실적 환상의 세계.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속 판타지는 ‘지금 여기 우리’의 삶을 담보로 게임 퀘스트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구현된다. 이것이 진정 현실인가 환상인가.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과연 드라마인가 게임인가 혹은 우리가 살아갈 미래인가. 모든 것의 경계가 무너진 혼돈의 세계. 판타지 드라마의 형식실험을 극대화한 작품이 바로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인 것이다.

안타깝게도 형식실험에 대한 찬사가 쏟아지던 방영 초반과 달리,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혹평이 많아졌다. 드라마 초반은 유진오가 게임 유저로서 레벨업 하는 과정을 다룬 모험서사 중심이다. 반면에 중반 이후부터는 게임의 오류를 발견하고 그것을 추적해가는 추리서사가 진행된다. 모험과 추리 모두 퀘스트(사건)을 해결한다는 점에서는 유사한 성격을 가진다. 하지만 모험은 속도감에, 추리는 지적 유희에 방점을 찍는다는 점에서 서사의 리듬이 다르다. 전자가 동적動的이라면 후자는 정적靜的이다. 이로 인해 드라마 전개가 상대적으로 느슨해졌다는 느낌을 주는 것이다.

서로 다른 두 서사의 충돌을 완화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주인공 유진오다. 그런데 드라마 15화에서 “나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났다.”라고 그는 이야기한다. 아직 드라마는 끝나지 않았는데 주인공의 이야기가 끝났다니 도대체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상황이란 말인가.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15화까지 메인 캐릭터로 활약하던 그를 죽음 혹은 소멸로 이끈 사람이 바로 정희주란 사실이다. 존재감이 없어도 너무 없다는 악평을 받았던 그 여자주인공.

 

사실 정희주는 극중 1인 2역으로 인간 정희주인 동시에 게임 캐릭터 ‘엠마’다. 유진오의 심장에 칼을 꽂으며 버그 삭제를 과감히 진행하던 그 여자. 평소에는 기타를 치며 최 팀장의 사무실 구석에 고이 앉아있다가 천국의 열쇠를 쥔 다음부터 돌변하여 게임을 리셋하는 인물이다.

“천국의 열쇠와 파티마의 손이 맞닿았을 때 비로소 천국의 문이 열린다.”

그렇다. 송재정 작가의 목표는 게임의 모든 퀘스트를 깨고 마스터가 되어 오류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다. 게임을 리셋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유진오의 모험과 추리는 드라마의 진짜 주인공 정희주가 등장할 무대를 만들어주기 위함이다. 유진오가 입맛을 돋우는 에피타이저라면 정희주는 코스 요리의 ‘메인 디쉬’인 셈이다. 아뿔싸, 작가에게 또 당했다!

게임 버그가 되어 존재가 지워진 유진오를 찾아 정희주가 게임 속으로 들어갔을 때 비로소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의 진짜 이야기는 시작된다. ‘엠마’ 정희주는 이 게임의 개발자인 동생을 엄마처럼 돌보는 누나이자 그 집의 가장이다. 그녀가 만들어갈 세상은 남자 개발자가 만든 세상처럼 폭력적이지도 않고 오류도 없는, 인간에 대한 연민과 사랑이 넘치는 세상이다. 그녀가 두 번 이혼한, 자기애가 지독히 강한 유진오를 사랑하게 된 건 그 때문이다. 그가 잘생긴 게임회사 대표가 아니라 그녀의 게스트하우스에서 추락한 불쌍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유진오가 마지막을 맞이한 장소가 성당의 예수상 앞이라는 것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필요에 따라 어디든 옮겨 다니는 엠마의 모습은 우리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우리 앞에 현현하는 신의 모습을 닮아있다.

극중 모든 것을 잃고 추락을 거듭하던 유진오는 정희주에게 묻는다. “날 믿어준다고 말할 수 있어요?” 벼랑 끝에 위태롭게 서 있는 우리를 구원해줄 한 마디, 그건 바로 ‘믿음’이다. 날 믿어줄 단 한 사람만 있다면 그래도 살만한 세상인 것이다. 두려워하지도, 걱정하지도 말자. 우리에겐 회복력을 높여주는 마법의 주문이 있지 않은가. 엠마!

‘엠마’라고 불렀는데, ‘엄마’나 ‘어머나’라고 들리는 건 전적으로 당신의 기분 탓이다. 자, 우리의 삶 속으로 용기 있게 로그인하자. 드라마는 끝났지만 우리가 살아갈 미래는 지금부터 시작이다. 열린 결말임에도 시즌2가 없는 이유는 그 후의 이야기가 지금까지 얌전히 앉아 드라마를 시청한 우리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 《쿨투라》 2019년 3월호(통권 57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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