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Theme] 헤밍웨이가 사랑한 나라, 쿠바의 영화들
[9월 Theme] 헤밍웨이가 사랑한 나라, 쿠바의 영화들
  • 김효정(영화평론가, 한양대 겸임교수)
  • 승인 2022.09.0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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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바나 셀피〉 스틸컷
〈하바나 셀피〉 스틸컷

‘완성도’만을 기준으로 영화를 평가한다는 것은 때로는 필요한 일이지만 어리석은 일이다. 기술적인, 혹은 이야기적 완성도가 영화의 전적인 평가기준이 된다면 존 워터스의 〈핑크 플라밍고〉 같은 괴작이나 1990년대 나이지리아 영화들, 1970년대 엑스플로이테이션 영화들은 애초에 영화(사)적 가치를 인정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내겐 쿠바 영화들이 그러했다. 이번에 한국에서 열린 쿠바영화제에서 공개 된 쿠바영화들이 아니었다면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1999, 빔 벤더스) 정도의 영화(엄밀히 말하면 독일 감독 연출의 독일 프로덕션)로 쿠바 시네마의 전반을 가늠하는 우를 범하며 살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앞서 언급했듯, 쿠바영화는 완성도로 평가한다면 부족한 요소들이 명백하다. 산업 자체가 작아서 제작 편수도 적고, (자금 부족으로) 대부분 해외 합작으로 만들어지는 데다가 테크니컬한 레벨도 세계적인 평균을 밑도는 수준이다. ‘쿠바’라는 나라와 문화에 대한 최소한의 호기심이나 애정이 없다면 쿠바 영화는 꽤나 지루하거나 수준 이하로만 느껴질 것이다.

물론 표면적으로 그렇다는 말이다. 이번 영화제를 통해 공개 된 총 8편의 영화들을 기반으로 본 쿠바 영화의 공통점은 장르와 상관없이 (마치 농담처럼) 스치듯 공유하는 예술적, 문화적, 정치적 깊이와 문제의식이 놀라울 정도로 심오하다는 것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상영 된 작품들 중 한 편이었던 〈하바나 셀피〉는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영화는 6개의 이야기로 이루어진 옴니버스 형식의 로맨틱 코미디다. 그 중 한 에피소드는 고급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3명의 직원들을 주인공으로 한다. 직원들은 모두 무명 단역배우들이며, 할리우드 유명 감독이 온다는 소식에 흥분한다. 미국으로 가서 연기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까 싶어서다. 그러나 이들이 부엌에서 호들갑을 떠는 사이 감독은 식사를 취소하고 자리를 뜬다.

이 작은 이야기 안에서 직원 캐릭터들은 영화에 대한 각자의 꿈을 이야기하며 많은 대사를 폭포처럼 쏟아낸다. (중간에 발리우드 영화를 연상시키는 ‘집단 댄스’ 시퀀스도 등장한다) 모두 영화에 관련된 대사들인데 그 주체가 파졸리니에서부터 펠리니까지 가벼운 코미디 영화에서 마주칠 법한 수준은 아니다. 우디 앨런이 〈애니 홀〉에서 마샬 맥루한에 대해 장황한 설명을 (이 대목에서 마샬 맥루한이 직접 카메오로 출연해 전설이 되었다) 늘어놓는 것만큼이나 난감한 순간이다. 중요한 것은 비단 영화 속 캐릭터들이 보여주는 문화적 리터러시literacy의 수준 뿐만이 아니다. 이 영화에서 코미디적 장치로 쓰이는 요소들은 사실상 정치적 상징으로 기능한다. 예컨대 감독이 들뜬 직원들과 마주 칠 기회도 없이 떠나버린다는 설정이 그것이다. 이들이 기다리는 ‘할리우드 영화감독’은 에피소드의 중추적인 존재지만 영화 속에서 한번도 자세히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다. 다시 말해 직원들에게 할리우드 행이 그러하듯, 쿠바인들에게 미국은 ‘이상’이지만 마주해서는 안 되는 이상인 것이다. 쿠바인들이 ‘탈 쿠바’하고 싶어한다는 사실 (영화 속에서는 늘 ‘미국’에서 온 누군가로 인해 계기가 되는)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남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정치적 상징은 다수의 쿠바 영화들에 존재한다.

〈시체들의 후안〉 스틸컷

상영 된 또 다른 영화, 〈시체들의 후안Juan of the Dead〉(2011) 도 비슷한 맥락에서 읽을 수 있다. 〈시체들의 후안〉은 조지 로메로의 〈시체들의 새벽〉을 패러디한 제목이 암시하듯, 좀비 영화다. 주인공인 후안은 중년의 나이에도 별 다른 직업 없이 술과 여자를 전전하는 실패한 아버지다. 그의 전 부인은 미국으로 이주한 상태이고 딸은 외할머니와 함께 아바나에서 살고있다. 후안은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동네 친구들과 하루하루를 비루하게 보내는 중이다. 가난하고 지루한 일상이 반복되는 와중에 아바나에 좀비 떼가 들이닥친다. 후안은 친구들과 함께 이 때다 싶어 좀비퇴치 비즈니스를 시작한다. 어쩌다보니 후안의 딸도 못미더운 아버지지만 사업에 동참하게 된다. 좀비의 습격 이후로 영화는 많은 재난영화에서 사용되는 관습적 수순대로 진행된다. 그럭저럭 사상 초유의 사태를 버텨내는 가운데 후안과 친구들의 우정은 돈독해지고 사이가 멀었던 딸과도 서서히 가까워진다. 물론 좀비와의 싸움이 길어지면서 팀원들을 하나 둘씩 잃게 되는 비극적인 일도 생긴다. 그러나 이 영화와 다수의 좀비 영화, 혹은 아포칼립스 영화의 차이점은 엔딩에서 드러난다. 일반적인 엔딩이라면 주인공이 사투를 벌인 끝에 결국 안전한 곳으로 도피한다는 것이겠지만 이 영화에서는 난데없는 ‘선택의 순간’이 등장한다. 아바나의 끄트머리까지 싸움에서 밀린 후안과 팀은 결정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눈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보트 자동차로 미국으로 떠날 것인지, 아니면 아바나에 남아 밀려드는 좀비떼와 승산 없는 싸움을 계속 할 것인지.

그렇다. ‘미국’은 쿠바 영화에 있어서 모든 딜레마의 주인공이다. 〈시체들의 후안〉은 사회주의 나라의 ‘좀비 영화’ 답게 후안이 미국행을 택한 친구들과 딸을 뒤로하고 혼자 쿠바에 남는 것으로 결말을 짓는다. 이 대목에서 후안의 대사가 의미심장하다. “난 생존자야. 마리엘 난민사태와 앙골라 내전, 특별시기 불황도 다 버틴 사람이야. 이번에도 살아남겠지.” 영화의 초반에서도 후안에 의해 반복되는 이 대사는 좀비 영화가 아닌 프로파간다 영화의 엔딩과 더 어울릴 법하다 (쿠바의 역사를 인지하고 있지 않으면 당황스러울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영화 전반이 후안과 친구들이 벌이는 좌충우돌 코미디와 코미디를 가장한 고어 장면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가 딸과 친구들을 모두 미국으로 떠나 보내면서도 좀비로 이미 점령당한 쿠바를 ‘국가위기’를 운운하며 떠나지 못한다는 설정은 억지스럽다. 이는 궁극적으로 영화가 ‘실패한 아버지’ 캐릭터의 입을 통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패한 것으로 보이는) 쿠바는 많은 위기를 넘겼으며, 여전히 이 곳은 떠날 땅이 아닌, 지켜져야 할 땅이라는 것을 호소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나머지 여섯 편의 작품들 – 〈우화〉, 〈더 이상 예전이 아니다〉, 〈율리〉, 〈품행〉, 〈결백〉, 〈하바나 스테이션〉 – 역시 장르를 모두 달리하지만 주인공들은 어느 순간, 쿠바를 떠나 미국으로 갈 기회를 갈망하거나 주어진 기회에 대해 고민한다. 이는 카스트로 이후에 여러가지 위기를 겪은 쿠바의 현 상황을 증거하는 잔재들이기도 하다.

결론적으로 쿠바영화는 이러한 정치적 전제들로만도 진입 장벽이 높은 내셔널 시네마다. 그럼에도 뛰어난 재즈 선율과 갖가지 예술적 레퍼런스들로 중무장한 이 영화들을 인생에서 마주할 수 있었다는 것은 내겐 굉장한 행운이었다. 쉽게 접할 수 있는 영화들이 아니라는 것은 정말로 아쉽지만, 기회가 된다면 반드시 쿠바영화를 경험할 수 있게 되시길 바란다. 과연 헤밍웨이의 편애를 받아 마땅한 나라의 영화답다.

 

 


김효정 영화평론가, 서울국제환경영화제 프로그래머, 『야한영화의 정치학』저자, 한양대학교 겸임교수

 

 

* 《쿨투라》 2022년 9월호(통권 99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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