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Theme] 잃어버린 여행 가방 같은 나라 쿠바, 그리고 그들의 음악
[9월 Theme] 잃어버린 여행 가방 같은 나라 쿠바, 그리고 그들의 음악
  • 김태훈(칼럼니스트)
  • 승인 2022.09.0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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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꽤 오래전 한 쿠바 피아니스트의 공연에 간 적이 있다. 그날의 날씨와 동행했던 이가 누구였는지는 잊어버렸지만, 가벼운 트레이닝복을 입은 채 피아노를 연주하던 한 남자는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곤잘로 루발카바Gonzalo Rubalcaba. 1963년생 쿠바 출신으로 알려져 있고, 1990년대에 이미 재즈계의 스타가 된 인물이다. 그의 탁월한 연주에 매료되기도 했지만, 연미복이나 정장이 아닌, 마치 동네 산책을 가듯 입고 나온 그의 자유로운 복장이 그날의 ‘어떤’ 무드를 만들고 있었다.

2.

쿠바는 낯선 나라다. 지도와 뉴스에는 등장하지만, 그곳을 다녀온 이는 많지 않다. 그래서 사람들은 쿠바를 상상한다. 1999년 빔 벤더스 감독의 영화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이 개봉했을 때 보여준 관심과 환호는 이런 낯섬에 기인한다. 이야기로만 구전되던 아티스트들이 공개된 적 없는 풍광과 함께 극장의 스크린 위에 등장했을 때, 관객들은 마치 오랫동안 기다리던 친구의 친구를 만난 기분이었을 것이다. 꼼빠이 세균도, 이브라힘 페레르, 오마라 포르투온도, 루벤 곤잘레스 등, 한 시대를 대표했던 뮤지션들이 미국의 정치, 경제 봉쇄의 시간을 넘어 다시 무대 위에서 노래할 때, 마침내 상상의 한 조각이 생생한 현실로 보여졌기 때문이다. 미국 카네기홀 공연장에서 쏟아진 관객들의 탄성은 유니콘의 실물은 만난 아이들의 즐거움 같은 것이었다.

쿠바의 음악은 1950년대 후반 쿠바가 공산화되기전 이미 미국 시장에 널리 퍼져 있었다. 15세기 후반 스페인이 쿠바를 점령한 이후, 아프리카 이주민들과 유럽의 음악이 섞여 들어간 쿠바 음악은 룸바의 형태로 발전했고, 세계로 퍼져 나갔다. 특히 쿠바 공산화 이전 쿠바의 아바나는 미국 부호들의 여행지이자 마피아들의 돈세탁 공간으로 각광(!)을 받았고, 화려한 호텔의 1층에는 이들을 위한 음악바들이 넘쳐났다. 자연스럽게 쿠바의 음악은 미국의 음악 씬에 이입되었고, 라틴 음악의 주요한 요소로써 사용되었다. 푸에르토리코계 미국인이었던 티토 푸엔테나 브라질 아티스트 세르지오 멘데스와 같은 빅 스타들은 없었지만, 아프로 쿠반 음악은 대중이 가장 사랑하는 음악이 되었다.

하지만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의 혁명군이 쿠바를 공산화하자 굵은 빗장이 채워졌고, 쿠바는 잊혀진 섬처럼 과거의 전설만을 전하게 되었다. 소련의 쿠바 미사일 사태 이후, 미국의 쿠바 봉쇄는 전면적이었고, 캐나다나 멕시코를 경유하지 않으면 쿠바에 들어갈 수 없었다. 특히나 쿠바의 입국 도장이 여권에 있으면 미국으로의 입국을 어렵게 하는 정책에 의해 쿠바를 찾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런 세월이 40년 가까이 흐른 뒤 도착한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은 쿠바 음악에 대한 새로운 발견(!)을 만들어 주었다. 기뻐도 흥청거리지 않고 슬퍼도 눈물 보이지 않는, 시간 속에서 터득한 관조와 여유의 리듬이 들려왔을 때, 사람들은 쿠바의 진짜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3.

몇 년 전 KBS TV의 프로그램 녹화를 위해 쿠바를 방문했었다. 25시간의 비행과 대기 시간을 거쳐 도착한 카리브해의 섬나라는 아침부터 밤, 건물과 거리 모든 곳들에 음악이 넘쳐나고 있었다. 관광객을 상대하는 상점들엔 밴드들에 의해 음악이 연주되고, 거리의 이곳저곳엔 스피커를 통해 음악이 들려왔다. 길가던 쿠바인들은 그 음악 소리에 맞춰 호흡하듯 춤을 추었고, 관람객들은 카메라를 꺼내 들었다. 국가의 크고 작은 행사나 기념일엔 말레꼰 광장에 무대가 설치되어 음악 공연이 펼쳐졌다. 도시 전체가 거대한 공연장인 나라가 그곳에 있었다.

4.

다시 오래전의 기억으로 돌아가본다. 아프로 쿠반 재즈 피아니스트의 공연을 예술에 전당에서 본날, 공연 관계자와 술자리를 가졌다. 무엇이 가장 좋았냐는 질문에 캐주얼한 그의 복장이 관객들을 무장해제시키는 최고의 퍼포먼스였다고 대답했다. 공연 관계자는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표정때문에 당황한 나에게 그가 말했다.

“사실 공항에서 옷가방을 잃어버렸습니다. 며칠을 기다렸지만, 공연날까지 찾지 못했고, 새 옷을 사러 나갔었지만, 마음에 드는 옷을 찾지 못했어요. 결국 입국 때 입고 온 트레이닝복으로 무대에 올라간 겁니다.”

5.

만남 없이 이야기되는 누군가는 신화화 된다. 쿠바를 떠올릴 때마다 곤잘로 루발카바의 잃어버린 여행가방을 떠올린다. 그 가방 속엔 어떤 옷들이 들어 있었을까? 가방의 주인만이 아는 그 옷들을 우린 상상으로 그려 넣는다. 화려하고 컬러감 돋보이는 셔츠였을까? 아니면 깔끔한 수트였을까?

비현실적인 바다 빛깔을 가진 섬나라에도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아침이면 눈뜨고, 낚시로 랍스터를 잡고, 다이끼리 한 잔과 라디오만 있으면 춤추는 사람들. 상상이 아닌, 존재하는 사람들. 마치 오랫동안 찾던, 잃어버린 누군가의 여행가방을 찾은 기분이 들었다.

 

 


김태훈 칼럼니스트. 음악을 듣고, 커피를 볶고, 바다에 갈 수 있는 날엔 서핑을 한다. 그 정도면 됐다 싶은 날들을 살고 있다.

 

 

* 《쿨투라》 2022년 9월호(통권 99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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