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관탐방] 편운재의 조각구름에서 배우는 시와 삶 조병화문학관
[문학관탐방] 편운재의 조각구름에서 배우는 시와 삶 조병화문학관
  • 김종회(문학평론가, 본지 자문위원)
  • 승인 2019.03.27 09: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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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의 숨결을 찾아 떠나는 봄날 서울 강남에서부터 남으로 뻗은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오산 인터체인지까지 내닫는 길이다. 바야흐로 온 산하가 봄빛에 잠겨 연초록 움을 돋우고 바람에 한들거리는 가지마다 새 생명의 약동을 품었다. 그래서 봄을 일러 청양靑陽이라고도 하고 목왕木旺이라고도 하지 않던가. 햇볕이 싱그럽고 나무의 기맥이 되살아난다는 뜻이다. 굳이 오산 인터체인지인 것은 그 길이 안성시 양성면 난실리에 자리한 조병화문학관에 이르는 초입이기 때문이다. 생전의 시인 또한 이곳을 지나다녔고 그 나들목의 감상을 시로 남겼다.

 

자, 그럼 하는 손을 짙은 안개가 잡는다

넌 남으로 천리

난 동으로 사십 리

산을 넘는 저수지

마을 식지 않는 시간,

삭은 산천을 돈다

- 「오산 인터체인지」 부분

 

 만남과 헤어짐의 평이한 일상 속에 담긴 인생의 여러 감정, 사소한 언어들 가운데서 세상살이의 맥락과 이치를 발굴한 조병화 시인. 시인이자 수필가요 화가이자 교육자이며 주요 문학단체들의 수장이었다. 1921년 조병화문학관이 있는 난실리에서 태어나 경성사범학교와 일본 동경고등사범학교에서 물리·화학을 전공했다. 젊은 날의 시인은 럭비 선수였던 때도 있었다. 1949년 제1시집 『버리고 싶은 유산』을 출간한 이후 2003년 서울에서 세상을 떠나기 까지 무려 53권의 창작시집, 28권의 선시집, 5권의 시론집, 37권의 수필집, 2권의 번역서, 5권의 화집을 상재했으니 우선 그 분량에 있어 범인이 흉내 내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교육자로서는 경희대와 인하대에서 오래 교편을 잡았다.

시인을 찾아가는 길목, 오산 인터체인지를 나와 안성 땅의 난실리로 향하는 비교적 한적한 국도와 지방도는 여행을 좋아하고 여행에 관한 시와 산문과 그림을 많이 남긴 시인을 추억하기에 알맞았다. 저만치 문학관이 바라보이는 소로에는 ‘조병화문학 관’ 그리고 ‘시와 조병화 문화마을’이라는 안내표지가 나란히 길손을 반겼다. 야트막한 돌담에 작은 철문이 열려 있는 문학관 경내로 들어서니, 샛노란 꽃 망울을 매단 산수유나무 몇 그루가 먼저 눈길을 끈다. 문학관은 양지바른 산자락에 잘 다듬어진 교목과 관목들을 거느린 채 각기의 구역을 지키는 깔끔 한 몇 채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이미 여러 번 와본 곳이어서 자연스럽게 왼편의 문학관으로 먼저 발길을 돌렸다. 조병화문학관은 시인의 창작 저작물과 그림, 그리고 유품을 전시하는 상설 기념관이다.

 

시와 산문과 그림의 상설 전시관

 한국, 더 나아가 세계 문학사에서 이 시인만큼 사후에 문학적 유품을 많이, 체계적으로 남긴 경우는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그것은 평소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자신의 삶을 관리했던 그 품성에서 비롯 된 터이기도 하지만, 생전에 스스로 편운재라는 이름으로 문학관을 준비하고 작품을 분류하며 관리한 정성스러운 손길에 힘입은 바 크다. 이 문학관 은 1993년 시인이 대지를 내놓고 국고의 지원을 받아 건립한 경과를 갖고 있으며, 그러기에 누구나 찾아올 수 있는 문학 사랑방의 역할도 한다. 2층 건물에 1동의 부속 건물이 있고, 1층은 전시실이며 2층은 세미나실로 되어 있다. 시인의 호는 편운片雲, 곧 조각구름이다. 그는 그 명호처럼 세상을 부드럽고 자유롭게 살았다. 전시실에는 그의 상징처럼 여겨졌던 베레모와 파이프 같은 유품도 소장되어 있다.

 시인이 일생을 두고 하나의 종교처럼 받들었던 분이 어머니 진종 여사였다. 그의 시 세계에는 기독교·불교와 유학의 세계관이 두루 스미어 있지만, 이 모두는 어머니에 대한 진충갈력盡忠竭力을 따르지 못한다. 독일의 문호 헤르만 헤세가 그의 장편소설 
 『지성과 사랑』 말미에서 “어머니가 있어야 사랑할 수 있고 어머니가 있어야 죽을 수 있다”고 적은 그 어머니 제일주의가 이 문학관의 들머리에 화강암 비석의 모양으로 서 있다. 「꿈의 귀향」이란 시의 형식, ‘묘비명’이란 부제를 달고 있는 그 문면은 다음 과 같다. 오죽했으면 그렇게 부제를 붙이고, 오죽했으면 1998년 6월 자신이 타계하기 5년 전에 사후 제막을 당부하며 이 비석을 세워 두었을까.

 

어머님 심부름으로 이 세상 나왔다가

이제 어머님 심부름 다 마치고

어머님께 돌아왔습니다

- 「꿈의 귀향」 전문


 이렇게 아름다운 귀환 또는 귀향을 원하는 아들은 시제詩題에 있는 말 ‘꿈’의 다른 이름이다. 시인은 어디에서나, 이를테면 자신의 시집을 서증書贈할 때 나 휘호를 쓸 때 꼭 이 말을 병기했다. 그는 일생 꿈을 꾸며 살았고 그 바탕에는 어머니와 교감하는 무 한대한 사랑이 있었던 것이다. 문학관에서 시인의 묘소가 있는 오른쪽 낮은 언덕을 거슬러 오르면, 편운재片雲齋라는 아담한 건물이 있다. 1962년 어머니가 별세하자 그 이듬해 묘소 옆 묘막으로 지은 집이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면, 시인이 서울 성북구 혜화동에 살 때 작업실로 썼던 서재를 그대로 옮겨놓은 모습을 볼 수 있다. 실내의 벽에는 “살은 죽으면 썩는다”던 그 어머니의 평소 언사가 새겨져 있다. 그렇다면 시인에게 썩지 않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시는 영혼의 화석’이라고 대답했다. 

 

시를 ‘영혼의 화석’이라 부른 시인

 편운재 앞에는 청와헌靑蛙軒이라는 건물이 비탈길을 의지해 서 있다. 1986년 대학에서의 정년을 모두 마치고 집필과 휴식을 위해 지었다. 들판가에 위치 한 집이어서 ‘개구리 소리를 듣는다’라는 뜻으로 붙인 이름이다. 이 집 바로 옆에 앞서 살펴본 「꿈의 귀향」 시비가 있고, 이는 유언에 따라 2003년 4월 시인의 49재에 제막됐다. 조금 더 오른쪽으로 걸어 나가면 장재봉 자락 따뜻한 기슭에 시인의 묘소가 있다. 시인이 그토록 애모하던 그 어머니 곁이다. 지나고 보면 그렇게 성심을 다하여 시와 사람과 삶을 거두던 생애도 결국 한 점 조각구름이었던 것을! 일찍이 중국 당대唐代의 시인이 절창으로 읊었던 한 구절, ‘연년세세화상사年年歲歲花相似 세세년년인부동歲 歲年年人不同’이 거기에도 있었다.

 해마다 꽃은 한가지로 같은데 해마다 사람은 옛날 같지 아니한 터이니, 인생이 허망하기 그지없으나 다만 시인의 시가 화석처럼 남아 길손의 마음을 달래는 격이다. 그 ‘영혼의 화석’은 화려하지도 난해하지도 않고 세상사에 대한 강한 의지를 표명하지도 않는다. 시인은 쉽고 평이한 어조로 또 때로는 너무 빈발해 보이기도 하는 반복적 표현을 통하여 삶과 죽음, 만남과 헤어짐, 기쁨과 슬픔, 고독과 허무, 여행과 귀환을 노래했다. 누가 읽어도 이해할 수 있고 누구와 만나도 친숙하게 악수할 수 있는 시의 행렬이 그의 삶 전체를 채우고 있었다. 그래서 필자는 그의 시를 두고 ‘생활문학의 개가凱歌’라 불렀다.

 시가 삶에 힘이 되고 삶이 시를 통해 풍성해지는 오묘한 언어의 비기祕記가 그의 것이었다. 일찍이 괴테는 ‘하늘에는 별, 땅에는 꽃, 사람에겐 사랑’을 꼽았으나 우리의 편운 조병화 시인은 하늘과 땅 의 상관물은 그대로 두고 ‘사람에겐 시’를 내세웠다. 그에게는 ‘시’가 ‘사랑’을 포괄할 수 있는 절대명제였다. 군계일학群鷄一鶴이란 말이 있다. 닭이 많아야 그 가운데 학이 있는 것이라는데, 무려 50여권의 창작 시집을 가진 시인의 시 세계에 어찌 수발秀拔한 시편들이 즐비하지 않겠는가. 그동안 가장 깊이 필자의 가슴에 와닿은 짧은 시 한 편.

 

큰 절이나 작은 절이나

믿음은 하나

큰 집에 사나 작은 집에 사나

인간은 하나

- 「해인사」 전문


 대가일성大家一聲의 면모가 선명한 시다. 해인사 여행 중에 얻은 ‘절창’인 듯하다. 그러기에 그의 시는 곳곳에 삶의 흔적을 새겨두고 그의 삶은 여려 형용으로 시를 잉태한다. 시인은 「천적」이란 시에서 “결국 나의 천적은 나였던 거다”라는 짧은 문장을 전문全文으로 썼다. 그렇게 모든 노력과 수고를 다 한 생애를 되돌아보니, 결국 그 시와 삶이 자신을 넘어서기 위한 싸움이었던 셈이다. 이는 독자들에 게도 비길 데 없이 소중한 하나의 깨달음이다. 안성 편운재 나들이 길에서 필자는 시인을 만나고 시심을 만나고 생활문학의 요체를 만났다. 그 보람으로 올해의 봄은 참으로 기껍고 흔연하다.

 

 

* 《쿨투라》 2019년 3월호(통권 57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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