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에세이] 세상의 모든 색, 쿠바
[문화에세이] 세상의 모든 색, 쿠바
  • 이수현(소설가)
  • 승인 2022.09.01 00: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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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엔 다양한 색이 있어. 분명 너도 좋아할 거야.” 푸른 눈을 반짝이며 그녀는 말했다. 그녀의 말에 왜 이리 가슴이 뛰던지. 무언가에 홀린 듯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색채심리학 수업에서 만난 교환학생, 헤일리의 고향은 쿠바였다. ‘힘’을 상징하는 그녀의 이름처럼 헤일리는 늘 당차고 자신감이 넘쳤다.

이제 막 고된 입시를 끝낸 뒤 입학한 대학교는 온통 낯선 세계였고, 새로운 친구를 사귀는 일 또한 쉽지 않았다. 나는 언어도, 생김새도, 살아온 환경도 다른 그녀와 이상할 만큼이나 통하는 게 많았다. 아마도 인생에 대한 열정적이고 적극적인 자세 때문이었을까. 이루고 싶은 삶의 목표도, 욕심도 많은 그녀에게 나는 왠지 모르게 끌렸다. 쏟아지는 시험공부와 과제에 힘들고 외로울 때마다 그녀는 어른스럽게 날 위로했다. 쿠바는 수업 과제로 봤던 영화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의 배경지였다는 것과 음악이 꽤 인상 깊었다는 것 이외에는 전혀 알지 못하는 나라였다. 대학교 여름방학을 앞두고 쿠바로 가는 항공권을 끊었다. 달뜨고, 긴장된 마음을 쉬이 가라앉힐 수 없었다.

장장 열다섯 시간의 비행을 거쳐 쿠바에 발을 디뎠다. 공항에서 기다리던 헤일리는 날 보자마자 신나게 뛰어와 안겼다. 그녀가 끌고 온 핑크색 포드를 타고 아바나로 향했다. 드넓게 펼쳐진 해안은 마치 보석을 풀어둔 듯 윤슬이 반짝였다. 도로에는 1940년대에서 1970년대까지 유행했던 올드카가 즐비했다. 비틀즈, 라다 쥐굴리, 머큐리 등 올드카 덕후인 아버지가 보시면 감동의 눈물을 줄줄 흘릴 것 같은 광경이었다.

“차들 좀 봐. 정말 아름다워. 마치 수채화 한 편을 보는 것 같아.”

내 감탄에 헤일리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잘못 본 것이겠지 생각하며 시선을 돌렸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아바나는 스페인 식민지 시절 지어진 크리스토발 대성당부터 웅장한 규모의 산 프란시스코 교회, 음악과 춤이 흐르는 아르마스 광장까지 볼거리가 다양했다. 다채로운 색상의 건물과 친절한 쿠바인들, 그리고 도로에서 흘러나오는 경쾌한 살사 음악이 나를 꼭 사로잡았다.

쿠바인들은 언제 어디서나 멈추어 서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모든 행동이 자유롭고 자연스러웠다. 첫날, 내가 만난 쿠바는 정열적인 레드, 그리고 쨍한 빛의 오렌지를 연상케 했다. 이토록 환상적인 나라, 쿠바에 온 것이 감격스러워 마음이 절로 일렁였다.

다음 날, 길거리에서 한 사내가 사진을 찍어주고 싶다는 포즈를 취했다. 하지만 헤일리는 나를 위해 준비한 곳이 있다며 내 손을 빠르게 잡아끌었다.

“글쓰기를 좋아하는 네가 정말 마음에 들어할 곳이야.”

우리가 도착한 곳은 헤밍웨이가 단골로 들렀다는 ‘라 보델기타 델 메디오’라는 술집이었다. 원래는 구두잡화점이었다가, 주인이 헤밍웨이에게 모히또를 한 잔씩 주기 시작하며, 그의 단골 술집이 되었다는 재미있는 후문에 나는 한참 웃었다.

마침 바에서는 공연이 진행 중이었다. 헤밍웨이가 자주 마셨다는 모히토를 홀짝이며, 마치 대작가가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예술과 낭만이 살아있는 이 도시. 이 순간의 분위기와 온도, 습도를 낱낱이 기억하고 싶었다.

그러던 중, 연주를 마친 예술가 한 사람이 내 곁에 다가와 서성였다. 쿠바 여행은 마음에 드는지로 시작된 질문은 본인의 연주에 대한 물음까지 이어졌다. 처음에는 웃으며 대답하던 나도 계속된 질문 공세에 살짝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대놓고 손을 내밀어 팁을 달라는 행동을 취하는 게 아닌가.

옆에 앉아있던 헤일리는 그만하면 됐다며, 남자에게 살짝 언성을 높였다. 그녀는 인상을 구긴 채 내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갔다. 거리는 벌써 어둑해져 있었다. 그렇게까지 할 건 없었는데. 주저하는 나를 보고 헤일리는 말을 이었다.

“아직 쿠바에는 어두운 색채가 많이 남아 있어.”

호텔로 돌아와 헤일리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쿠바가 좋아질수록, 그 속에 숨은 역사적 의미와 사람들의 이면을 알고 싶었다. 쿠바에 대해 찾아보니 내가 봤던 아름다운 색채 곳곳에 어두움이 숨겨져 있었다.

특히 아바나 해안가를 달리던 수많은 올드카에는 아픈 과거가 있었다. 쿠바는 한때 미국인 부호들의 휴양지로 유명했고, 그들은 너른 해안도로를 따라 레이싱을 즐겼다. 하지만 1959년, 체 게바라와 피델 카스트로가 이끄는 쿠바 혁명이 승리를 거두며 미국인들은 쿠바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미국은 쿠바를 압박하기 위해 경제를 봉쇄했고, 쿠바 내에서는 자동차 수입을 금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 여파로 쿠바인들은 새 차를 사지 못하고, 전에 미국인들이 버리고 간 차를 고쳐 타기 시작한 것이다.

동시에 거리나 식당에서 손을 내밀던 사람들의 행동 역시 이해가 갔다. 구소련 붕괴 이후 쿠바는 최악의 경제위기를 겪었다고 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 자체적으로 관광업에 집중했고, 쿠바인들 역시 여행객을 상대로 돈을 벌 수 있는 다양한 수단을 생각해냈다. 활기 넘치던 거리와 다채로운 차들의 향연과 생동감 넘치는 공연에 그러한 의미가 담겨 있는 줄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제야 헤일리의 얼굴에 드리웠던 그림자를 읽을 수 있게 되었다. 보여주고 싶은 고국의 모습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부분도 분명 있었을 터였다. 하지만 아픔을 직면하고 다시 자신만의 방법으로 앞을 향해 나아가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10박 11일의 모든 여정이 끝난 뒤, 헤일리에게 말했다. 어쩌면 우리가 친해진 이유는 네가 쿠바를 닮았기 때문이라고. 아바나의 바다색처럼 때론 타지에서도 차분하고 침착하게 현실을 파악하고, 섬세한 파스텔톤으로 상대의 감정을 위로하고, 때로는 정열의 원색으로 삶을 향해 나아가는 그 모습이 좋았다며 말이다. 그러니 어두운색도 나름의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너의 나라를 충분히 자랑스러워해도 될 것 같다고 덧붙였다.

“초대해줘서 고마워. 진심으로.”

내 말을 들은 그녀는 눈물을 글썽였다. 나는 세상의 모든 색을 담은 그녀와 쿠바를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헤일리는 떠나는 내가 아주 작은 점으로 사라질 때까지 힘차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안녕. 쿠바.

 

 


이수현 IT회사를 다니고 글을 쓴다. 제26회 충북작가 신인상 소설부문, 27회 동양일보 신인 문학상 수필부문을 수상. 언어의 온도가 맞는 이와 자주 보며, 누군가의 마음의 계절을 바꿀 수 있는 글을 쓰고 있으며, 첫 소설집 『유리 젠가』가 있다.

 

* 《쿨투라》 2022년 9월호(통권 99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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