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월평] 영화에 진심인 두 남자의 역작 〈헌트〉
[영화 월평] 영화에 진심인 두 남자의 역작 〈헌트〉
  • 이은주(서울신문 기자)
  • 승인 2022.09.01 0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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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헌트〉는 배우 정우성과 이정재에게 한 편의 자서전 같은 작품이다. 데뷔 후 30년 가까이 쌓아 올린 역량을 모두 쏟아부었기 때문이다. 〈태양은 없다〉(1999) 이후 23년만에 만난 두 사람은 막중한 책임감을 가지고 영화에 임했고 〈헌트〉는 2022년 여름 극장가의 다크호스가 됐다.

이 작품은 첩보 액션의 외관을 하고 있지만 격동의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한 시대물이자 고도의 심리 추리극이기도 하다. 동시에 이념, 독재, 국가폭력 등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묵직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1983년 대통령의 워싱턴 방문에서 암살 시도가 일어나는 오프닝 시퀀스는 이 영화의 성격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진압 작전을 수행하던 국가안전기획부 13년차 베테랑인 해외팀 차장 박평호(이정재 분)와 국내팀 차장 김정도(정우성 분)는 강하게 대립하고, 간결하면서도 강렬한 액션을 선보인다. 이후 영화는 125분 동안 마치 폭주하는 기관차처럼 빠른 호흡으로 관객들을 몰입시킨다.

안기부 내 조직의 충성 경쟁에 대한 내용을 담은 〈남산〉을 원작 시나리오로 한 만큼 초반에는 사냥개처럼 서로를 물고 뜯는 두 사람의 갈등에 초점이 맞춰진다. 매번 공작이 실패하자 새로 취임한 안기부장은 조직 내부의 스파이를 색출하라고 지시한다. 박평호와 김정도는 서로 암호명 ‘동림’으로 불리는 간첩이라고 끊임없이 의심한다. 이후 서로 주변을 파헤치는 과정에서 의심스러운 정황이 하나둘 드러난다.

박평호 주변에는 그를 ‘아저씨’라고 부르는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 출신 유학생이 있고, 김정도는 군납업자와의 모종의 관계가 포착된다. ‘동림’의 실체를 둘러싸고 반전을 거듭하며 관객들이 영화가 끝날 때까지 긴장의 끈을 풀지 못하게 만든다. 이정재는 신인 감독 답지 않은 노련함으로 관객 보다 반발짝 앞서 극을 이끌어 나간다.

이 작품의 백미 중 하나로 꼽히는 취조실 장면은 다른 듯 닮은 두 사람의 모습을 은유적으로 표현한다. 박평호와 김정도는 취조실의 매직미러를 사이에 두고 상대방에게 진실을 자백하라고 다그치지만, 이는 마치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처럼 들린다. 이후 평행선을 달리던 두 사람은 같은 목적을 같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영화는 또다른 국면을 맞는다.

이정재 감독은 〈헌트〉를 “흑에서 백이 되고, 백에서 흑이 된 두 남자가 회색 지대에서 만나는 이야기”라고 설명했다. 두 사람은 자신들이 놓인 체제와 이념 속에서 자신을 객관화하면서 딜레마에 빠지게 되고, 결국 자신들이 옳다고 믿는 신념을 향해 돌진한다.

특히 군인 출신의 강직한 성품을 지닌 김정도는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자행된 폭력에 대한 죄책감과 이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책임감을 동시에 갖고 있는 인물로 그려진다. 정우성은 원치 않게 가해자 입장에 서야했던 정도의 억울함과 울분은 물론 피해자들의 아픔, 평화에 대한 갈구를 담은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표현해냈다.

아웅산 폭탄 테러와 미그기 귀순 사건, 동백림 사건 등 1980년대 실제 사건을 연상케 하는 장면은 영화에 리얼리티와 역사적 무게감을 동시에 부여한다. 하지만 이정재 감독은 역사를 그대로 재현하기 보다 현재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그대로 투영한다.

이 감독은 5년 전 탄핵 정국에서 영화의 모티브를 얻었다. 그는 “사회가 양극화로 치닫고 국민들이 대립하고 분쟁하는 모습을 보면서 각자의 생각과 이념, 가치관이 과연 옳은 것인지, 혹시 누군가 갈등을 부추기는 것은 아닌지 이야기해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어 “잘못된 이념을 가지고 있는 두 사람이 어떤 사건을 통해 올바른 행동을 하게 되는 이야기는 전 세계적으로도 보편적인 소재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헌트〉가 다소 복잡한 이야기 구조와 무거운 주제를 가지고 있지만 마지막까지 강한 추동력을 발휘하는 것은 각본과 연출. 연기의 합이 톱니바퀴처럼 잘 들어맞았기 때문이다. 이 감독은 처음 〈남산〉의 시나리오 판권을 구입한 이후 5년 반 동안 수차례 각본을 고쳐 썼고, 박평호 시점에서 김정도와의 투톱 구조로 만들었다. 또한 철처히 스파이물에 집중된 원작과 달리 액션과 볼거리가 풍부한 작품으로 재창조했다.

총 제작비 230억원이 투입된 대작답게 서울과 워싱턴·도쿄·방콕을 무대로 한 대규모 총격전과 차량 추격전이 속도감 있게 펼쳐진다. 이를 위해 총탄 1만발과 차량 520대가 동원됐다. 정우성과 이정재는 난이도가 있는 액션신을 직접 소화하며 날렵한 첩보 액션을 완성했다.

한국 현대사 속 굵직한 사건들을 바탕에 두고 만들어진 만큼 지난 5월 칸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된 이후 일부 외신 기자들 사이에서 “다소 난해하다”는 평이 나왔던 것도 사실. 하지만, 이 감독은 서울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각본을 다시 썼다.

그는 “외국 관객들이 이해한다면 한국의 10~20대에게도 통한다고 생각했는데, 30%의 관객이 이야기를 놓치고 보셨다는 것이 굉장히 크게 다가왔다”고 털어놨다.

이 감독은 귀국 후 1980년대 당시 정치 사회적 배경을 좀더 자세히 묘사하기 위해 대사를 수정하고 편집본에 들어가지 않는 컷을 중심으로 다시 화면을 구성했다. 거의 영화를 다시 한 편 만들다시피하는 어려운 작업이었지만 각본가이자 연출가로서 작품에 대한 책임감이 그를 움직였다. 감독으로서 유연함과 집요함 덕분에 영화는 한층 매끄럽고 몰입도가 높아졌다.

영화계에서 넓은 인맥을 자랑하는 두 사람의 조우를 축하하기 위한 특별 출연진의 면면도 화려하다. 황정민, 이성민, 김남길, 주지훈, 조우진 등 배우들은 〈헌트〉출연을 자청했다.

1990년대 ‘청춘의 아이콘’에서 이제는 한국 영화계를 대표하는 배우가 된 두 사람은 이 영화를 통해 그동안의 쌓은 경험과 영화에 대한 경험을 허투루 쓰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했다. 성향은 다르지만 목표에 대해 깊이 있게 고민하고 행동에 옮기는 것이 닮았다는 정우성과 이정재. 영화에 대한 진심으로 달려온 두 사람의 열정은 배우 출신 감독의 데뷔작, 30년 절친의 동반 출연 등 세간의 우려를 기우로 바꾸기에 충분했다. 앞으로 ‘배우 출신 감독’의 길도 함께 걸어갈 앞으로의 이들의 행보가 더욱 기대되는 이유다.

 


이은주 서울신문 문화부 기자. 연세대학교 불문과·동대학원 영상학 석사. 제44회, 제46회 한국방송대상 심사위원. 유튜브 채널 〈은기자의 왜 떴을까TV〉 진행.

 

 

 

* 《쿨투라》 2022년 9월호(통권 99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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