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수미와 ‘함께 보는 미술’] 그 조각: 정서영이 ‘오늘 본 것’
[강수미와 ‘함께 보는 미술’] 그 조각: 정서영이 ‘오늘 본 것’
  • 강수미(미학. 미술비평. 동덕여자대학교 교수)
  • 승인 2022.10.05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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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서영: 오늘 본 것》 전시 전경, 서울시립미술관, 2022.
사진: 강수미

물건의 감각

그저 사물, 우리가 쉽게 ‘물건’으로 취급하는 것들이 어떤 감각을 느낄까? 살아 숨 쉬는 존재, 가령 사람부터 동식물까지 감각기관을 지닌 생명들처럼 지각 경험을 할까? 그러리라고 생각하기는 쉽지 않다. 예를 들어 나무로 만든 책상이, 골조에 덧대진 스펀지가, 진녹색 플라스틱 이파리가 나사못이 박히면 아프다거나, 살랑대는 바람에 간지럼을 탄다거나, 갑자기 켜진 조명에 ‘—어’하며 당황한다고 상상하면 얼마나 기이한가. 이를 두고 누군가는 지극히 인간중심적 세계관과 편향된 지각 경험이라고 타박할 것이다. 또 상상력 박약이라고 지적할 것이다. 발터 벤야민의 미학을 언급하며, 아직 세상에 편견 없는 아이들은 사물과의 유희적 관계 맺기로 얼마든지 그것들의 생기生氣를 알아챈다면서. 하지만 물건의 유기체적 기관이나 지각 구조를 증명할 수 없는 한 우리가 그 물질적 존재‘의’(‘에 대한’이 아니라) 느낌을 상상하는 자체가 이미 ‘사물을 의인화’하는 인간 문법의 그물에 걸리는 일이다.

그런데 이 글에서 주목할 미술가 정서영은 뭔가 다르다. 그녀는 자기 작업 이력에서 “조각 공부는 어떻게 사물이, 물건이 예민해지는지 열심히 생각할 수 있게” 한 원천이 됐다고 했다. 그것도 2007년 아뜰리에 에르메스에서 가진 개인전 관련 인터뷰 중 자신의 1990년대 초중반 독일 유학시절을 돌아보며 한 진술이다. 이에 근거해 볼 때, 정서영은 창작 초기부터 “사물이, 물건이” 인간의 대상이 아니라 독립적 존재라는 관점 혹은 아이디어로 작업해온 것 같다. 그리고 2022년 9월 초 서울시립미술관에서 개막한 정서영 개인전 《오늘 본 것What I saw today》에 이르기까지 사물, 물건의 주체적 감각을 살피고, 생각하고, 조각으로 출현시키는 여정을 걸어온 것으로 보인다. 객관적인 증명의 제시가 아니라, 가시적이고 촉지적인 예술로의 구체화materialization 여정 말이다.

정서영, 〈-어〉, 1996, 나무, 비닐민속장판, 페인트, 130 x 140 x 3 cm, 개인 소장,
사진: 권오열 ⓒ 1996, 정서영

조각의 실체

미술의 세부 장르 중에서 ‘조각’은 통념상 크고 무거운 입체 형상으로 우리 머릿속에 떠오른다. 대리석을 깎아 만든 고대 그리스의 니케 상, 청동으로 주물 뜬 로마의 기마상, 7톤 무게를 버티고 선 로댕의 지옥문, 권진규의 황토 빛 테라코타 인물상, 거울보다 완벽한 반영을 이루는 아니쉬 카프어의 스테인리스스틸 구체球體 등 시대부터 재료와 모티프까지 제각각이라도 ‘조각’하면 대체로 일치하는 상식적 조형성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19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국내외 현대미술Contemporary Art Scene에서 ‘조각’은 그러한 조형성과는 상통하지 않는 이질적인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 물론 한쪽에서는 꾸준히 마초적인 공공조각이 세워지고 형상을 빚든(소조) 깎아 만들든(조각) 스테레오타입의 조형물이 유통돼 왔다. 그런데 현대미술계에서 일컫는 ‘조각’이란 이제 예민하고 약한 형식, 초라한 재료와 현실적 매너, 비물질에 가깝거나 유동적인 상태, 물질과 공간을 통해서가 아니라 행위와 시간을 매개하는 사건 쪽으로 스펙트럼을 넓혔다. 또는 장르 자체가 해체되고 다원화하며 ‘조각’의 실체를 바꿨다.

정서영은 한국 현대 조각의 축 또한 그렇게 옮아가고 장르가 변하는 데 선명한 역할을 했다. 그 사이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다행히도 그 면면을 오늘의 우리는 《오늘 본 것》전시에서 볼 수 있다. 전시를 마치 실물을 가지고 실제 공간에서 도록을 펼친 것처럼 구성했기에 가능한 감상이다. 칸막이를 세우지 않아 뻥 뚫린 비스타vista가 확보되는 서울시립미술관 1층 전시실에 약 30년에 걸친 정서영의 작품 총 33점이 —1993년 초기작부터 2022년 신작까지— 정연하게 제시된 것이다. 전시 공학적으로 설명하면, 흰 띠로 경계선을 표시한 거대한 직사각형 안에 다양한 성향과 맥락의 정서영 조각들이 각자의 고유 영역을 점유하며 디스플레이 되었다.

정서영, 〈아이스크림 냉장고, 케이크 냉장고〉, 2007, 철, 유리, 조명 기구, 89.5 x 110 x 67cm/87 x 112 x 70 cm, 개인 소장
사진: 김용관 ⓒ 2007, 정서영

그 조각

전시는 관객이 들어서자마자 마주하게 되는 〈전망대〉(1999)와 〈파도〉(1998)로 시작해, 〈조각적 신부〉(1997), 〈가운데 서고 가운데 눕고 가운데를 열어서 밖으로 나가 다시는 돌아오지 마라〉(2022) 등 앞서 언급한 흰 띠 내부의 작품 군으로 정점을 이루고, 전시장 끝에 만든 작은 방에 배치한 〈아이스크림 냉장고, 케이크 냉장고〉(2007)를 돌아 나와, 〈말 그대로〉(2022)로 종결된다. 나는 여기서 일부러 작품 제목과 제작연도를 명시하며 전시 전체를 스케치했는데, 그런 이유가 있다. 정서영의 조각이 현재까지 수 십 년 동안 탐구하고 실현시킨 예술의 실체가 얼마나, 어떻게 상식적 조형성과 간극이 있는지 독자들이 짐작할 수 있도록 말이다. 〈전망대〉는 현실의 전망대 건물처럼 보이지만 그 위에 올라 전망을 즐기기에는 애매한 규모의 건축적 조각이다. 〈파도〉는 찰나에 철썩이는 비정형의 파도가 아니라 그 액체상태의 한 귀퉁이만 유토로 빚어서 제스모나이트로 단단히 캐스팅한 조각이다. 〈조각적 신부〉는 드레스의 치마 뒷부분이 사라져 크리놀린을 들킨 모습처럼 세 축의 나무다리에 미색 스펀지가 봉제된 형국의 조각이다. 그 나무다리들에는 하얀색 도자기 같은 것이 물받이인 양, 신발인 양 끼어 있다. 이번 전시의 신작인 〈가운데 서고…〉는 동물의 가죽 대신 비건 가죽을 깔고 그 한가운데서 작가가 몸을 움직여 흑연으로 그린 드로잉 조각이다. 제목에서처럼 거의 누운 자세로. 〈아이스크림 냉장고…〉는 업장의 그것을 형태상 모방하되 아이스크림이나 케이크 대신 내부를 전기 빛으로 채운 조각이다. 그리고 신작 〈말 그대로〉는 전시실 바닥에 목재용 접착제를 섞은 소금 녹인 물을 사방으로 흘려서 자연 건조시킨 자국이다. ‘말 그대로’ 시간이 그린/말라붙은 결정結晶 조각이라고나 할까. 이상 나의 언어로 묘사한 정서영의 전시작들은 그 각각으로, 제작 당시마다, 기성의 조각과는 다른 미학적 질과 형식을 창안해낸 성과다. 그래서 단일한 장르 개념으로서가 아니라 집합적이고 열린 개념으로서 ‘조각(들)’이라고 표기하게 된다. 정서영은 이를테면, ‘조각’이라는 둔탁한 덩어리를 칼로 내려치듯 모서리를 치고 정교히 세공하듯 여러 각도의 다채로운 입면들을 만들어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크고 무거운 조형물로서 조각 영역에서 비례의 상대성을, 액체의 사물화를, 물질을 통한 수사학을, 퍼포먼스의 물리적 잔존을, 일상 물건의 심미화를, 시간에 의한 공간 등등으로 분절·다양화 해낸 것이다.

《정서영: 오늘 본 것》 전시 전경, 서울시립미술관, 2022.
사진: 강수미

조각가

다른 한편, 앞서 인용한 정서영의 말, 즉 “어떻게 사물이, 물건이 예민해지는지” 열심히 생각했다는 말을 조각가의 입장에서 해석하면 어떨까. 그 경우 우리는 물건에 귀나 피부가 있다는 생각보다는 더 일반적으로 공감할만한 뜻을 얻을 수 있다. 그 말인즉슨 좋은 조각을 하기 위해서 물질을 어떻게 조형해야 할까, 각 사물의 물질적 속성을 어떻게 예민하게/정교하게 구체화 할까를 고민한다는 의미다. 이 경우 주체는 사물이, 물건이 아니라 ‘조각가’다.

정서영은 모더니즘 미술사까지 정립된 조각 장르의 컨벤션으로부터 더 자유롭고 유연하며 다원적인 미술을 추구해왔다. 그리고 각각의 작품들로 일정한 성취를 이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조각가”라고 정의하고, 그렇게 불리기를 희망한다. 혹자는 이 작가를 느슨한 의미에서 ‘설치미술가’로 부른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이 작가 스스로 공연 연출을 도입해 개인전을 하고(《Mr. Kim과 Mr. Lee의 모험》, LIG 아트홀, 2010), 비디오와 사운드 작업(〈세계〉, 2019)도 지속해 왔기에 ‘조각가’라는 명명이 조금 빡빡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정서영이 조각가의 정체성으로부터 달아나거나, 반대로 그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적은 없다고 봐야할 것 같다. 데생을 하고, 질료를 써서 형태를 만들고, 그렇게 해서 3차원 공간을 점유하며 감각의 대상이 되는 인공의 미적 존재를 창출해왔다는 점에서 그렇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다원적으로 확장된 현대 조각의 여러 요소들을 괄호치고도 끈질지게 현존하는 ‘공간’과 ‘물질’이다. 요컨대 정서영이 조각가인 것은 조각을 시간, 일시성, 비물질, 소리, 영상, 사건, 일상, 언어 등으로 다양화하면서도 결코 공간의 존재와 사물의 본질을 삭제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녀는 그 두 가지를 조각(“조각 공부”)의 토대로 삼아 《오늘 본 것》에 이르렀을 일이다.

정서영, 〈파도(〈유령, 파도, 불〉 중 일부)〉, 1998-2022, 제스모나이트, c. 50 x 70 x 40 cm, 유토 원본을 제스모나이트로 캐스팅
사진: 정민구 ⓒ 1998-2022, 정서영

언어, 본 것

앞서 열거한 작품명들에서 이미 느꼈겠지만, 정서영은 독특한 작품 제목과 전시 타이틀을 짓는 것으로 꽤 유명하다. 그 독특함은 현대문학의 실험적 문장 같은 추상성과 활자를 읽는 것만으로 어떤 이미지들이 연상되거나 감촉되는 구체성이 배합되었기에 발생한다. 정서영에 따르면 그녀는 “언어가 되었을 때 작품과 같은 성질이면서 작품을 가둬 놓지 않을 수 있는 상태”의 제목을 지으려고 애써왔다. 유독 ‘가둬 놓지 않을 수 있는’이라는 말이 신경 쓰이는데, 이로써 정서영 조각과 언어의 관계를 생각해보자.

서울시립미술관 개인전 제목이 ‘오늘 만난 것’이라거나 ‘오늘 만진 것/맡은 것/들은 것/맛본 것’이 아니라 하필 ‘오늘 본 것’인 의도가 뭘까? 우리가 접촉하거나 그 내부로 들어갈 수 없는 대상, 또는 섭취하거나 소유할 수 없는 타자적 존재에 대해 할 수 있는 행위란 그저 ‘보는 것’이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선 넘지 않으면서, 침해하지 않으면서, 잡아먹지 않으면서, 파괴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우리말 ‘파악把握하다’는 한자어로 ‘손에 쥠’이라는 뜻이 있고, 재미있게도 같은 뜻의 독일어 번역어 ‘ergreifen’과 영어 번역어 ‘seize’나 ‘grip’ 또한 ‘움켜쥠’, ‘장악함’, ‘지배’ 등의 함의를 갖는다. 그런데 조각가가 숙명처럼 하게 되는 행동은 재료를 손에 움켜 쥐고서 예술적 기교로 깎고 연마하고 세공해 작품으로 탄생시키는 일이다. 이를 위해 조각가는 질료의 성질을 파악해야 하고 창작과정 전반과 모든 세부를 컨트롤해야 한다. 그런데 정서영은 ‘오늘 본 것’을 말한다. 이로부터 나는 다시 한 번 정서영이 사물을 가둬놓지 않고, 조각 장르나 언어의 그물, 나아가 감상자의 교육된 시선으로부터 독립적인 존재를 발견하려 하는 조각가라는 해석을 내놓는다.

 


강수미 미학. 미술평론. 동덕여자대학교 예술대학 회화과 부교수. 『다공예술』, 『아이스테시스: 발터 벤야민과 사유하는 미학』 등 다수의 저서와 논문 발표. 주요 연구 분야는 동시대 문화예술 분석, 현대미술 비평, 예술과 인공지능(Art+AI) 이론, 공공예술 프로젝트 기획 및 비평. 현재 한국연구재단 전문위원, 국립현대미술관 운영심의위원, 《한국미학예술학회》 편집위원, 《쿨투라》 편집위원.

 

* 《쿨투라》 2022년 10월호(통권 100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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