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월평] 스스로를 뜯어보는 프로: 김경욱, 『누군가 나에 대해 말할 때』(문학과지성사)
[문학 월평] 스스로를 뜯어보는 프로: 김경욱, 『누군가 나에 대해 말할 때』(문학과지성사)
  • 허희(문학평론가)
  • 승인 2022.10.11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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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은 ‘나’라는 1인칭 대명사 대신 ‘김중근’이라는 고유명사를 사용한다. 소설에는 다음과 같이 서술된다.
“머릿속에서 수백 개의 팽이가 돌아가면서 메스꺼운 느낌이 들 때 내가 아닌 김중근이라는 사람의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일이라고 여기면 도움이 된다. 사회적 거리 두기. 세상에는 바이러스뿐 아니라 스스로와 거리를 둬야 하는 사람도 있다.”
이처럼 ‘바라보는 나’와 ‘활동하는 나’를 분리시키는 방법은 자기 이야기를 고백하는 데 나름의 효과를 발휘한다.

한 편의 소설은 누구나 쓸 수 있지만 두 편 이상의 소설은 누구나 쓸 수 없다. 그것이 아마추어와 프로를 가르는 차이다. 아마추어는 내킬 때마다 작품을 쓰다 중단해도 아무도 비난하지 않는다. 프로는 다르다. 컨디션이 좋든 나쁘든 꾸준히 쓰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면서도 양질의 작품을 선보여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린다. 발표하는 소설의 수준이 하락하면 더 이상 집필 기회를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속적으로 (좋은) 소설을 출간하는 작가는 언제나 주목할 만하다. 성실성 또한 창작 능력의 지표이다. 1993년 등단한 뒤 단편 소설집 여덟 권, 장편소설 여덟 권을 쓴 김경욱은 프로의 모범적 사례라고 할 만하다. 오죽하면 그의 별명 가운데 하나가 “소설 기계”일까.

올해 8월 말을 기점으로 김경욱의 작품 이력에 한 권이 더해졌다. 아홉 번째 단편 소설집 『누군가 나에 대해 말할 때』이다. 미리 밝혀두건대 해설은 내가 맡았다. 맞다. 나는 이 책과 상관없는 사람이 아니다. 그렇다고 일부러 소개를 피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이 글을 쓰는 가장 큰 목적은 읽을 만한 문학 신간을 독자 여러분께 제안하는 일이니까. 해설을 청탁 받아 나는 여러 번 꼼꼼하게 이 책을 읽었다. 『누군가 나에 대해 말할 때』의 첫 번째 독자로서 이 책이 어떠한 점에서 추천할 만한가를 이제부터 설명하겠다. 먼저 염두에 둘 사안은 일급 작가들은 저마다의 세계를 구축하고 그곳으로 독자들을 초대한다는 사실이다. 김경욱의 경우는 어떨까.

그는 당대 문화 현상에 관심을 기울이고 소설로 형상화하는 특징을 갖고 있다. 『누가 커트 코베인을 죽였는가』(2003), 『장국영이 죽었다고?』(2005) 등의 단편 소설집이 이를 예증한다. 그래서 김경욱에게 붙여진 또 다른 별명이 “바람둥이”이다. 실제 그렇다는 뜻이 아니다. 일곱 번째 소설집 『소년은 늙지 않는다』(2014) 해설에서 김경욱의 소설 쓰기를 사랑론에 빗댄 비유이다. “모든 소설에 충실했지만 어떤 하나에 얽매이지 않아 온 그의 산뜻한 족적”(백지은)은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바 없고, 독자를 끌어들이는 흥미로운 무대를 형성한다. 이것은 바깥을 경유하여 안을 들여다보는 김경욱 특유의 방식이고, 세상과 내가 어떻게 연결고리를 맺는가를 묻는 그만의 화법이다.

표제작 「누군가 나에 대해 말할 때」로 접근할 수 있다. 흘깃 보면 이 작품은 뉴스에 종종 보도되는 은둔형 외톨이의 기이한 행적을 소재로 쓴 세태소설의 범주에 속하는 듯하다. 이렇게 여겨지는 까닭은 주인공이 집밖으로 거의 나오지 않는 사람이고, 집밖에 나왔을 때는 ‘뭔가 이상하다’라고 느껴지는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이기에 그렇다. 그가 숨기고 있는 엄청난 비밀은 후반부에 드러난다.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언급할 수는 없지만, 부모와 얽힌 문제라는 점은 거론할 수 있다. 가족도 ‘나’의 바깥이다. 더불어 이 소설을 독해하는 경로 중 하나는 제목에 물음표를 달아보는 데 있다. ‘나’에 대해 말하는 ‘누군가’가 누구인가를 따져보자는 것이다.

그 ‘누군가’의 정체는 다름 아닌 ‘나’이다. 이 소설의 ‘나’는 본인을 이름으로 지칭한다. 치기 어린 행위는 아니다. 로마 영웅 카이사르가 자신을 객관화하는 글쓰기 스타일을 참고한 것이다. 그리하여 주인공은 ‘나’라는 1인칭 대명사 대신 ‘김중근’이라는 고유명사를 사용한다. 소설에는 다음과 같이 서술된다. “머릿속에서 수백 개의 팽이가 돌아가면서 메스꺼운 느낌이 들 때 내가 아닌 김중근이라는 사람의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일이라고 여기면 도움이 된다. 사회적 거리 두기. 세상에는 바이러스뿐 아니라 스스로와 거리를 둬야 하는 사람도 있다.” 이처럼 ‘바라보는 나’와 ‘활동하는 나’를 분리시키는 방법은 자기 이야기를 고백하는데 나름의 효과를 발휘한다.

소설가 김경욱
소설가 김경욱

김중근은 자신이 코스타리카 블루진 같다고 느낀다. 코스타리카 블루진은 BBC 자연 다큐멘터리에서 그가 본 중앙아메리카 정글에 서식하는 딸기독화살개구리의 별칭이다. 포식자가 코스타리카 블루진을 삼키면 피하 분비샘에서 강력한 독을 내뿜는다. 포식자는 먹잇감을 뱉을 수밖에 없고 이후 그와 비슷하게 생긴 개구리는 쳐다보지도 않게 된다. 코스타리카 블루진은 뒷다리만 청바지를 입은 것처럼 파랗고 나머지는 온통 새빨간데, 이와 유사하게 김중근은 붉은 아웃도어 점퍼에 남색 카고 바지를 입고 외출에 나선다. 외면만 비슷하게 꾸민 게 아니라, 타인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경계하는 기운을 발산하는 것은 물론이다. 그는 코로나19 시대의 사회적 거리두기를 더욱 격렬하게 수행한다.

실은 김중근에게는 아버지가 낸 교통사고 가해 책임을 대신 뒤집어쓰고 감옥에 간 아픈 과거가 있다. 그러기에 그가 자신을 보호하는 일에 온통 신경을 쏟는 행동의 알리바이도 자연스럽게 생겨난다. 이것은 김중근의 자아가 그만큼 연약하다는 의미이다. 그는 “누군가 자신에 대해 말할 때면 어김없이 그러하듯. 통째로 삼켜지는 느낌. 옴짝달싹할 수 없이 숨통이 조여지는 느낌”을 받는다. 이를 회피하고자 김중근은 스스로와 거리를 두는 전략을 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서 좀처럼 헤어 나오지 못한다. 애초에 불가능한 시도였으리라. ‘나’라는 존재는 자명한 주체라기보다는, 바깥과 상호 영향을 주고받으며 구성되는 주체에 가까워서다. 바깥을 통제할 수 없으므로 ‘나’ 역시 제어하기 어렵다.

「튜브」라는 소설의 구절로도 제시된다. “어떤 종류의 말은 천 일, 만 일, 백만 년이 지나도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존재의 깊디깊은 안쪽 어딘가에 나이테처럼 새겨져 날카롭게 베이는 한 순간 어떻게든 잊으려는 마음 가장자리로 비어져 나온다.” 가짜 현실을 진짜 현실이라고 믿으며 살아도, 진짜 현실은 가짜 현실 사이의 틈새를 기어코 열어젖힌다. 이 책에서 김경욱은 ‘맨얼굴이란 대체 무엇인가’ 하는 질문부터, ‘내 얼굴은 내 것이나 결코 나는 내 얼굴을 직접 볼 수 없다’는 역설까지 ‘나’를 총체적으로 아우른다. ‘나’에 대한 글쓰기야말로 제일 쉬운 거라고 간주하는 아마추어와 대비되는, 집요하게 스스로를 뜯어보는 프로다운 실력과 품격이 인상적이다.

 


허희 대학과 대학원에서 문학을 공부했다. 2012년 문학평론가로 활동을 시작해 글 쓰고 이와 관련한 말을 하며 살고 있다. 2019년 비평집 『시차의 영도』를 냈다.

 

 

* 《쿨투라》 2022년 10월호(통권 100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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