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Theme] Romance - 숭고한 사랑 혹은 더러운 죄악으로서의 섹스
[4월 Theme] Romance - 숭고한 사랑 혹은 더러운 죄악으로서의 섹스
  • 전철희(문학평론가, 본지 편집위원
  • 승인 2019.03.27 10:2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영화와 애니메이션으로도 각색된 소설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이하 『췌장)』은 괴기스러운 제목과 달리 애절한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그 속의 중심인 물사쿠라(여고생)는 시한부 통보를 받은 후 하루키 (남고생)와 함께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일들을 해보기로 한다. 이후 그들은 신사에서 데이트하기 등등을 하면서 알콩달콩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삶에 대한 생각을 공유하게 된다.

 문제는 그들이 별의별 일을 벌이면서도 결코 섹스는 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있다. 죽기 전에 많은 일들을 해보고 싶다던 사쿠라의 버켓 리스트에 섹스가 없다니, 놀라운 일이지 않은가? 더욱이 그녀는 하루키를 고급호텔에 데려가서 한 침대에서 잤던 적도 있다. 그런 상황에서 서로 등을 돌리고 ‘잠만 잤다’는 것은, 무엇보다 죽음을 앞둔 사쿠라에게 안타까운 일이었으리라.

 그러나 어쩌면 이 이야기는 그렇게 진행될 수밖에 없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통상 사람들은 소설이나 영화 속에서의 섹스가 사랑을 상징하는 의식이라고 받아들이다. 그래서 만약 하루키와 사쿠라가 섹스를 했다면 이 소설은 조금씩 사랑을 키워가 던 연인이 (죽음이라는 비극적인 운명으로 인해) 헤어진다는 고전적 모티프의 변주로만 보였을 것이다. 섹스를 안 하고 ‘썸’만 타는 관계에 머물렀기에 그들의 관계는 단순히 사랑이라 정의할 수 없는 미묘한 것으로 남을 수 있었다. 그래서 이 소설은 사랑 뿐 아니라 젊음과 삶에 대해 이야기한 작품으로 독자들에게 기억된다.

 우리의 주변에는 이렇듯 사랑이라고 획정하기 힘든 애매한 관계의 인물들을 등장시킴으로써, 가령 우정이나 동경 같은 감정들을 다루었던 작품이 적지 않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의 주인공은 하루 종일 발기가 되어있고 틈만 나면 야한 동 영상을 보며 자위를 하는 청년이지만 결코 여주인공과 섹스를 하지 못한다(혹은 않는다). <건축학개론>에서 승민(이제훈)에게 허용된 스킨십의 최대치는 서연(수지)이 잠들었을 때(혹은 잠든 척할 때) 몰래하는 볼뽀뽀 정도이다. 이 영화들이 단순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청춘과 성장 그리고 추억에 관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던 까닭 중 하나는, 주인공들이 그 이상 진도를 나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사랑이 아니라 젊음이나 청춘 같은 소재를 주요하게 다루는 서사에서 섹스가 나오지 말아야 한다는 관념은 다소 ‘동양적’인 것이다. 적어도 미국에서는 그렇지 않다. 요즘 드라마나 영화는 말 할 것도 없고 1980년대의 미국을 뒤흔들었던 하이 틴 로맨스 영화 <조찬클럽>(The Breakfast Club)이나 <아직 사랑을 몰라요>(Sixteen Candles)만 봐도 그 속의 인물들은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대와 대수롭지 않게 섹스를 벌인다. 2000년 전후에는 노골적으로 <섹스 앤 더 시티>(Sex and the city)라는 제목을 단 드라마가 방영되기도 했다. 거기에 등장하는 커리어우먼들은 섹스를 대단한 사건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들에게 섹스는 숭고한 사랑을 확인 하는 성스러운 의식이 아니라 살면서 겪는 허다한 경험 중 하나일 뿐이다.

 물론 한국을 포함한 동양에서 섹스를 가볍게 그리는 영화나 드라마가 전무했다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섹스 자체에 대해 이야기한 영화가 몇몇 있었고, 섹스를 살면서 겪을 수 있는 우발적 사건 중 하나로 모사한 드라마도 아예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적어도 한국에서는 그런 종류의 작품보다 플라토닉한 사랑이 이루어지는 과정 내지는 그것이 허물어지는 모습에 천착하는 서사들이 훨씬 인기를 끌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랬다.

 한국에서 성에 대한 담론을 가장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장르는 속칭 ‘막장드라마’이다. 불륜이나 혼외자식에 대한 내용을 뼈대로 삼는 아침드라마는 결국 섹스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한편 막장드라마의 대명사로 불리는 <오로라 공주>는 한국의 드라마 중 섹스와 관련된 대사, 장면 등등을 가장 많이 넣은 것 중 하나였다. 이런 드라마들에서 섹스는 복잡한 치정극을 만드는 서사적 요소이자 원죄로 그려진다. 어쩌면 이렇게 섹스를 자극적으로 그리는 막장드라마들이 주기적으로 나오는 까닭은, 섹스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다른 창구가 우리에게 너무 적어서일 수도 있겠다. 나는 섹스를 고상한 사랑의 종착점 내지는 이후에 대가를 치러야 할 죄악으로 치부하지 않고 삶을 구성하는 경험 중 하나로 모사한 작품을 (문학이 아닌 대중문화에서도) 더 많이 보고 싶다. 그래야 고매하지도 비천하지도 않은 우리의 삶과 사랑도 더욱 절실하게 다뤄질 수 있을 것이 라 생각한다.

 

 

* 《쿨투라》 2019년 4월호(통권 58호) *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