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친 미술가들] 힐마 아프 클린트: 정상성 너머의 예술
[미친 미술가들] 힐마 아프 클린트: 정상성 너머의 예술
  • 신승철(강릉원주대 교수)
  • 승인 2022.11.01 00:1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자화상〉, 1880년 경,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추상 회화를 가장 먼저 그린 화가는 누구일까? 회화에서 구체적인 대상을 몰아낸 이들은 의외로 많으며, 시기도 비슷해 입증이 쉽지 않다. 우선 카지미르 말레비치가 첫 번째 후보가 될 것이다. 그는 〈검은 사각형〉으로 일체의 대상 세계를 초월한 절대적인 세계를 표현했다. 1913년의 일이다. 『예술에서 정신적인 것』을 추구한 바실리 칸딘스키는 또 다른 후보이다. 칸딘스키는 자신이 1911년에 최초의 비구상 회화를 그렸다고 주장했는데, 작품이 남아 있지 않다. 그의 에이전트가 모스크바의 옛 작업실을 샅샅이 뒤졌지만, 그림을 찾아내지 못했다.

최근에는 힐마 아프 클린트Hilma af Klint가 엄청난 유명세를 얻으며 새로운 후보로 부각되고 있다. 아프 클린트는 말레비치와 칸딘스키보다 조금 앞선 1906년 비구상 회화를 그렸고, 작품도 남아 있다. 다만 그녀는 백 년 가까운 세월 동안 전혀 주목받지 못한 무명 화가였다. 그녀에 대한 미술사학자들의 평가는 남아 있지 않으며, 전시 횟수 역시 몇 차례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무명 화가를 추상 미술의 역사에 포함시킬 수 있을까?

1915년에 제작된 신전을 위한 회화 연작. Credit The Hilma af Klint Foundation, Stockholm
1915년에 제작된 신전을 위한 회화 연작. Credit The Hilma af Klint Foundation, Stockholm

미술사 밖의 여성 예술가

힐마 아프 클린트는 여성 예술가였고, 미술사의 관심 밖에 놓여 있었다. 이는 우리가 추상 미술의 역사를 되돌아보아야 하는 중요한 이유가 된다. 린다 노클린의 유명 아티클 「왜 위대한 여성 예술가가 없었는가?」를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남성 중심의 지배 구조 속에서 여성의 활동에 제약이 있었음은 추측이 어렵지 않다. 그러나 아프 클린트의 경우 사정이 조금 복잡하다. 아프 클린트는 마리 퀴리가 차별을 딛고 노벨상을 두 번이나 수상한 시대를 살았다. 여성의 미술 아카데미 입학이 허용되고, 전시 참여 역시 어렵지 않았다. 불충분하지만 이전보다는 나은 환경이 펼쳐진 것이다. 칸딘스키와 말레비치의 옆자리를 차지할 정도의 예술가라면, 이 정도 기회만으로도 자신을 각인시켰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아프 클리트는 유명세라는 단어와 거리가 멀었다. 그녀는 유럽 미술계에서 변방에 가까운 스웨덴에서 태어났고, 칸딘스키와 말레비치처럼 곳곳에서 단체를 만들고 전시와 작업, 교육 활동을 펼치지 못했다. 사회 구조적인 영향 때문이었겠지만, 아프 클린트 개인의 성향도 이에 한 몫 했다. 그녀는 유럽 전역을 다니며 지적 탐구에 힘을 쏟았지만, 정작 작업실은 스웨덴 말라렌 호수에 있는 작은 섬에 마련했다. 은둔 생활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저 과도한 물질문명과 선동적인 예술 캠페인이 그녀의 작업에 어울리지 않았을 뿐이다. 비구상적인 회화의 역사를 주도적으로 이끈 칸딘스키나 말레비치의 선언적인 예술과 다르게, 아프 클린트의 작업은 광기의 산물로 의심받을 수 있을 만큼 비의적이었다.

힐마 아프 클린트가 노트에 그려놓은 영적인 존재들. ⓒ힐마 아프 클린트 재단
힐마 아프 클린트가 노트에 그려놓은 영적인 존재들. ⓒ힐마 아프 클린트 재단

보이지 않는 세계

힐마 아프 클린트는 미술 아카데미에서 정규 교육을 받았지만, 고전적인 화풍의 그림을 선호하지 않았다. 그녀는 초상화나 풍경화에서 벗어나 영적인 세계를 표현했다.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관심은 당시 예술가와 과학자들 사이에 일반적이었다. 로베르트 코흐는 현미경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결핵균을 찾아냈고, 콘라드 뢴트겐은 X선으로 사물의 이면을 드러냈다. 토머스 에디슨은 죽은 이와 통화하는 ‘심령 전화’의 개발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예술가들은 속속 등장하는 새로운 장치와 경쟁이나 하듯 보이지 않는 세계의 가시화에 적극 나섰다. 말레비치는 대상 세계를 초월한 절대적인 세계를 꿈꾸었고, 칸딘스키는 예술이 펼쳐 놓은 인공적인 세계만을 진정한 실재로 간주했다. 아프 클린트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녀는 물질 세계 너머의 고차원적인 존재와 소통하면서, 그것을 예술로 표현했다.

영적인 세계의 시각화는 언뜻 허황돼 보인다. 여기에 다양한 과학 지식이 동원된 것 역시 황당무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당시 유럽인들은 근대의 지식으로 기존 통념을 확인하는 데 적극적이었다. 영적인 세계는 우선적인 검토 대상이 되었다. 심령사진과 영혼의 목소리를 듣는 청각 장치, 그들과 소통하기 위한 심령 기록 장치 등이 투입되면서, 예술은 과학과, 과학 실험은 비의와 뒤섞였다. 급격한 산업화로 삶이 피폐해 지면서 영적 세계에 의존하려는 마음이 커진 것도 이러한 분위기에 한몫했다. 예술가들은 세상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했고, 스스로 심령 기록 장치 또는 영매의 역할을 맡았다. 그들은 영적인 존재와 소통하면서, 자신이 받은 메시지를 예술로 구현했다. 힐마 아프 클린트는 1891년 가을 처음으로 영매가 되었다. 그녀는 “거대한 힘이 자신을 통해 그림을 그리는” 것을 경험했다.

〈가장 위대한 열 점, No. 7, 성년〉, 1907. ⓒ힐마 아프 클린트 재단
〈가장 위대한 열 점, No. 7, 성년〉, 1907. ⓒ힐마 아프 클린트 재단

영적 세계의 현시

힐마 아프 클린트는 강령회에서 게오르그, 그레고르, 지드로, 에스터, 아말리엘, 아난다 같은 이름의 영적 존재들과 소통했다. 손에 쥔 연필이 종이 위에서 움직였고, 의미를 알 수 없는 그림들이 나타났다. 나선이나 원, 타원 같은 기하학 형태부터 꽃과 나뭇잎, 아메바 같은 생물학적 형상에 이르기까지 종류 역시 다양했다. 아프 클린트는 영적 존재들의 요청에 따라 이를 캔버스에 옮겼다. 1906년부터 시작된 〈신전을 위한 회회〉 연작은 무려 193점이나 제작되었다. 1907년에는 328x240cm 크기의 거대한 캔버스에 그림을 그렸다. 캔버스가 너무 커 이젤에 올리기는커녕 벽에 기대 놓을 수도 없었지만, 아프 클린트를 사로잡은 위대한 힘은 바닥에 놓인 캔버스를 엄청난 속도로 채워갔다. 그녀는 겨우 두 달 만에 〈가장 위대한 열 점〉 연작을 완성했다. 템페라 물감을 이용한 탓에 셀 수 없이 많은 달걀을 사들이고, 바닥에 물감을 줄줄 흘리고 다니는 그녀를 보면서, 주변 사람들은 아마도 중세의 마녀나 정신이상자의 모습을 떠올렸을 것이다. 게다가 아프 클린트의 그림은 그녀 자신도 이해하기 힘들었다.

도합 80제곱미터에 달하는 열 점의 거대한 캔버스에는 익숙한 형상이라고는 단 하나도 들어 있지 않았다. 오렌지색, 분홍색, 연보라색, 하늘색 같은 다양한 컬러로 구성된 기이한 형상들은 캔버스 위에서 부유하면서, 흐르고 변화하고 운동했다. 후대의 비평가들은 이 연작이 유년 시절부터, 성년, 노년을 거쳐 영적 세계에 이르는 인생의 단계를 표현한다고 설명했다. 아마도 아프 클린트는 이러한 해석을 부인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하찮은” 존재인 자신에게 고차원적인 세계를 이해할 능력이 없다는 겸손을 드러냈다. 그녀는 도움을 필요로 했고, 무려 열 권에 달하는 포트폴리오를 만들어 스위스 도르나흐로 향했다. 그곳에는 인지학자 루돌프 슈타이너의 괴테아눔Goetheanum이 자리 잡고 있었다.

〈힐마 아프 클린트 - 미래를 위한 회화〉 전시 장면, 2018년,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힐마 아프 클린트 - 미래를 위한 회화〉 전시 장면, 2018년,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힐마 아프 클린트는 슈타이너에게 작품 해석을 의뢰하는 한편, 그것을 괴테아눔에서 소장, 전시해 줄 것을 요청했다. 〈신전을 위한 그림들〉은 제목 그대로 영지주의자의 신전에서 전시되어야 했다. 하지만 슈타이너는 아프 클린트의 작품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세상은 물질주의에서 벗어나기는커녕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었다. 아프 클린트의 그림은 도르나흐 뿐 아니라, 그 어디에서도 환영 받지 못했다. 그녀는 그림을 봉인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녀의 작품과 작업 노트는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다음 세대의 감상자를 만나기 위해 20년 간 비공개로 남겨졌다. 여기에 작품 관리를 맡은 조카의 태만까지 더해져, 물질세계에서 벗어나 고차원의 인식에 이르고자 했던 아프 클린트의 예술은 1966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세상에 공개 될 수 있었다.

〈힐마 아프 클린트 - 미래를 위한 회화〉 전시 장면, 2018년,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힐마 아프 클린트 - 미래를 위한 회화〉 전시 장면, 2018년,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추상 미술의 새로운 역사

힐마 아프 클린트는 천이백여 점의 회화와 이만 육천 페이지에 이르는 작업 노트를 남겼다. 실로 미친듯한 작업량이었다. 그녀는 영적인 존재의 제안을 따라 그림을 그리면서, 자신의 능력으로는 이 방대한 작업을 수행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자신의 예술 세계와 작업 과정을 제대로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예술가가 세상에 몇이나 있겠는가? 말레비치와 칸딘스키 같은 이들과 아프 클린트 사이에는 그저 오만과 겸손이라는 차이만이 존재했을 뿐이다.

다행히 그녀의 겸손은 남성 중심의 사회 질서 속에서 시간을 이겨내는 힘으로 작용했다. 살페트리에르 병원에서 여성 히스테리 환자와 환영을 보는 영매의 신체가 관찰되던 시대에, 아프 클린트의 작업은 정상성의 범주로 재단되는 것을 피했다. 추상 미술의 전개 과정에서도 같은 행운이 따랐다. 추상 미술은 순수한 형태와 매체의 자율성에 관심을 두었고, 비의적이고 광기 어린 그림들을 자신의 역사에서 배제시켰다. 그러나 아프 클린트와 그녀의 그림은 스스로 봉인되었기에 이러한 수난을 겪지 않았다. 그녀의 겸손과 기다림 덕분에 힐마 아프 클린트의 예술은 비의적인 것으로 격하되거나 정신기능 장애와 연결되지 않았고, 여성 예술가가 존중 받기 시작한 시대, 그리고 비이성적인 예술에 더 큰 관심을 보이는 우리 시대에 세상에 공개될 수 있었다. 2018년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그녀의 개인전이 열렸을 때, 약 60만 명에 이르는 관람객이 전시장에 몰려들었다. 그리고 이로부터 추상 미술의 역사는 다시 쓰일 수 있게 되었다.

 

 


신승철 강릉원주대 교수. 베를린 훔볼트대학교에서 미술사를 공부 했으며, 현재 현대미술사학회 회장을 맡고 있다. 『르코르뷔지에: 건축을 시로 만든 예술가』(아르테, 2020), 『바이오 아트: 생명의 예술』(미진사, 2016) 등의 저서가 있다.

 

 

* 《쿨투라》 2022년 11월호(통권 101호) *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