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친 미술가들] 도시 인간 농부 되기: 하와이로 건너간 사람들을 생각하며
[미친 미술가들] 도시 인간 농부 되기: 하와이로 건너간 사람들을 생각하며
  • 정연두(미술작가)
  • 승인 2022.11.01 00:2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온실 ⓒ정연두
온실 ⓒ정연두
온실 ⓒ최철림
온실 ⓒ최철림

지난 십수 년간 내 작업실에서 여러 식물을 키우고 있지만, 한 번도 풍부한 잎사귀를 틔워본 적이 없다. 작업실 창이 남향이라 햇볕도 잘 들고, 물도 제때 주는데 창턱에 올려놓은 알로카시아는 이파리 하나가 좀 크나 싶으면 어느새 금방 시들고, 또 죽었나 싶으면 옆에서 새잎이 고개를 내민다. 그야말로 근근이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다. 봄이면 양재 꽃시장을 들러 고수나 로즈메리 같은 허브 화분을 사 와 열심히 키워보면 어느새 본래 크기보다 많이 왜소해져 있다. 그야말로 나는 식물의 똥손인 것이다.

과거 유럽에서 설탕이 귀하던 시절 후추와 설탕을 구하기 위해 콜럼버스는 인도로 떠났다. 이후 유럽인들이 신대륙에서 밀림을 태우고 땅을 경작해 대규모 농장plantation farm을 세우고 이곳에 설탕의 원료인 사탕수수를 심었다. 키가 3미터를 훌쩍 넘는 이 식물을 키워 수확하기까지 정말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는데, 이를 위해 아프리카에서 2,0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을 노예로 끌고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동시켰다. 서인도 제도, 아이티, 자메이카, 브라질 등지는 인도처럼 기온이 연중 27도 이상의 열대성 기후 덕에 사탕수수가 잘 자라는 곳이다. 설탕은 사탕수수 식물의 줄기를 잘라내고 이를 24시간 이내 착즙 하여 끓이고 정제하여 만든다. 달콤하고 새하얀 설탕이 만들어지기까지는 뜨거운 태양 아래 일했던 사람들의 피와 땀의 노동이 있다.

서인도 제도 사탕수수밭 이야기는 아주 먼 곳의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우리나라에서도 과거 1902년 인천의 제물포에서 겔릭호를 타고 하와이로 가서 사탕수수를 재배한 사람들이 있었다. 하와이에서의 그들의 일의 강도나 열악한 조건은 과거 아프리카 노예들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그만큼 사탕수수를 키우는 일은 엄청난 노동력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 5년 동안 조선에서 약 7,000여 명의 사람들이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으로 이주하였다.

온실 ⓒ정연두
온실 ⓒ정연두

설탕이 금보다 귀하던 시절, 그래서 왕과 귀족들이 자신의 부귀를 자랑하기 위해 설탕을 장식한 케이크와 설탕으로 만든 조각을 파티에 보이던 시절에 그들은 왜 사탕수수를 직접 유럽에 가져다가 심지는 않았는지 의문이 들었다. 농사를 모르는 도시 인간 다운 뻔뻔한 질문이다. 한층 더 나아가 ‘만일 우리나라에서 내가 사탕수수를 키워보면 어떨까?’ 하는 충동이 들었다. 내가 특별히 단것이 좋아 사탕수수를 키우고 싶은 것도 아니고, 식물을 좋아해서 그런 생각이 든 것도 아니다. 그냥 한번 느껴보고 싶었다. 과거 사탕수수라는 낯선 식물을 잘라내며 피부에 날카로운 사탕수수 이파리의 상처를 입었던 선조들의 느낌이 어떠했는지, 그리고 사탕수수를 베어낼 때 과연 설탕 향이 날는지.

생각이 굳어지고 나니 우리나라에서 제일 따뜻한 곳으로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제주도의 ‘예술곶 산양’이라는 예술가 창작 스튜디오 프로그램에 신청서를 내고 지난 2월에 작업실을 옮겨갔다.

2021, 작업 초기 사탕수수 재배 실험 (서울 작업실에서, 작가 촬영)
2021, 작업 초기 사탕수수 재배 실험 (서울 작업실에서, 작가 촬영)

막상 우리나라 최남단 따뜻한 곳 제주도 시골에서 생활을 시작해 보니 따뜻한 곳과는 거리가 멀었다. 되려 도시에서 사는 것보다 훨씬 더 춥고 바람이 많이 부는 곳이었다. 아마도 습도가 높아서 더 춥게 느낀 것일 테다. 사탕수수가 자라기엔 터무니없는 날씨였다. 열대 기후를 만들어줄 온실이 필요했다. 산양리 동네 온실을 동냥하기 위해 여러 군데 돌아다녔더니 농부분들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웃으신다. 온실이라고 다 따뜻하기 위해 짓는 것이 아니란다. 겨울철 출하되는 귤은 당도를 높이기 위해 비를 피해야 하므로 위만 막고 온실의 옆을 그물로 터놓는다고 한다. 그리고 같은 환경에서 두 가지 식물이 공존할 수 없기 때문에 구석 자리에 사탕수수를 키울 수는 없다고 한다. 식물도 환경에 맞아야 크는 것이다. 도시 인간 다운 우매함을 깨닫는 순간이다.

사탕수수를 위한 온실을 짓기로 하였다. 온실은 가장 저렴한 재료로 짓기 위해 렉산이라는 플라스틱 재질polycarbonate과 흔한 2x4 각목만으로 짓기로 했다. 예술곶 산양 뒤 마당에 온실 지을 곳의 땅을 고르고 직사각형을 그어보았다. 경사진 땅을 평평하게 고르기 위해 혼자 삽질하며 제주도의 땅과 흙에 대해 알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제주도는 한 삽만 파도 땅에서 커다란 돌이 나왔다. 머릿속에서 얄팍이 덮여있는 흙 아래 용암이 만들어 놓은 무수히 많은 현무암 돌들과 바위를 상상했다. 퍼 올린 돌들을 옆 한곳에 쌓다 보니 문득 제주도 밭 주변이 돌담으로 이루어진 이유를 알게 되었다. 몇 평의 땅을 고르는데 며칠을 낑낑대는데, 과거 제주도 농민들이 밭을 일구기 위해 얼마나 노동하였을까? 상상이 안 간다.

사진신부, 2022설탕공예, 사탕수수 종이 위에 잉크, 나무장과 유리 / 220x273x246cm(포도뮤지엄 전시 전경)
사진신부, 2022설탕공예, 사탕수수 종이 위에 잉크, 나무장과 유리 / 220x273x246cm(포도뮤지엄 전시 전경)

제주도를 오기 전 열대 농장 체험에서 시식용 사탕수수 한 토막을 받아와 서울 작업실에서 물에 넣고 키워본 적이 있다. 막대에서 뿌리가 나오는 신기한 풍경을 관찰하였던 적이 있어 사탕수수는 씨앗을 심는 것이 아니고 줄기 한 마디를 심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한 달 가까이 온실을 지으며 완도의 한 농가에서 오키나와산 사탕수수 종자가 있다는 정보를 얻고 400주의 종자를 받기로 했다. 이를 위해 가장 저렴한 화분 400개를 준비해서 어린 사탕수수를 맞이할 준비를 하였다. 화분 400개를 채울 흙을 계산해보니, 한 포트당 40리터, 그리고 시장에서 파는 원예 상토는 50리터당 1만 원이 훌쩍 넘고, 이를 400개 구한다면…. 답이 나오지 않았다. 세상에 널린 것이 흙이고 산에 들에 많은데, 왜 이리 비싼 거지? 옆집에 봄에 씨앗을 뿌리려고 지난해부터 퇴비를 주고 몇 개월 두었다가 얼마 전 잘 갈아 놓은 밭을 보면서 갑자기 그들이 부자로 보였다. 흙은 비싸고 귀한 거구나. 제주도에서는 더군다나.

제주에는 표선과 대정쪽 흙이 비옥하다더라는 지역 농부분의 충고를 듣고 흙 동냥을 하러 많은 곳을 돌아다녔다. 한 달이 다 되어갈 무렵 한 리조트 대표님이 불쌍한 도시 작가를 위해 흔쾌히 한 트럭 분의 흙을 제공해 주셨다. 온실의 완성과 함께 도착한 사탕수수는 주변의 예술을 사랑하는 많은 분들, 그리고 지역 고등학교 학생들과 함께 화분에 옮겨 심어 온실에 넣어두었다. 손바닥만 한 크기의 싹들이다. 온실에 작은 난로를 몇 개 사다 놓고 아침저녁으로 물을 주었다. 갑자기 아이를 키우던 때의 마음가짐이 생각났다. 첫날밤 30분 단위로 온실의 온도를 체크하다가 그만 밤을 새우고 말았다. 안은 17도, 밖은 5도.

제주도 시골 생활을 하며 도시와 다른 점은, 아침에 해가 뜬다는 것과 저녁에 붉은 석양과 함께 해가 진다는 것이다. 온실이 남향으로 지어졌으니 좌측의 해가 한낮 동안 머리 위를 지나 우측으로 사라진다.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 같지만 도시 인간의 인식 변화의 순간임을 짐작하리라 믿는다. 유난히 맑은 아침 하늘과 햇살을 보며 스마트폰을 자주 꺼낸다. 또 유난히 붉은 석양을 보면서도 어제 담은 그 풍경을 다시 스마트폰에 담는다. 하루하루가 매일 지나간다는 것과 밤이 지나고 아침이 오면 다시 기온이 올라간다는 것이 신기하게 느껴진다. 아침에 환기창을 열고 한 시간에 걸쳐 꼼꼼히 물을 주고, 밤새 자란 잡초들을 뽑고 나면 점심이 된다. 오후에 드로잉을 좀 하다가 늦은 오후가 되면 다시 물 한 그루씩 400번 물을 주고 창을 닫고 난로를 켜고 밤 맞이를 한다.

매일매일 반복되는 삶이 고된데 지겹지는 않다. 거의 매일 지역 주민분들이 와서 아침나절 여러 이야기들을 해주시기 때문이다. 옥수수 키우는 이야기, 단수수와 사탕수수의 차이, 벼가 자라는 방식, 비료를 주는 시기와 적당한 양, 그리고 태평양의 미크로네시아와 폴리네시아의 문화적 차이에 대한 이야기.

‘사진 신부’는 하와이로 이주한 노동자들과 결혼하기 위해 조선에서 사진 한 장을 들고 하와이로 건너간 어린 여성들을 일컫는 말이다. 대부분 18살 내외였던 이들은 일제 치하의 암울한 시대적 배경과 당시 가부장적 사회에서 보다 나은 미래를 꿈꾸던 어린 여성이 먼 이국 땅으로 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떠났다. 이는 가족과의 결별뿐만 아니라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길을 가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낙원에서 신여성의 삶과 신문물을 꿈꾸던 어린 신부는 하와이에서 검게 탄 나이 많은 노동자를 만나고, 그들과 결혼해서 뙤약볕 아래 아이를 등에 업고 일을 하였다. 나는 제주도의 한 고등학교 2학년 학생들과 여러 차례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그들의 모습을 영상에 담고 인터뷰를 하였다.

나는 예술은 상상을 하는 일이라 믿고 있다. 가끔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도 말이다. 120년 전 태평양 한가운데 있는 섬으로 넘어간 사람들을 이해하는데, 반드시 우리나라 최남단 농촌으로 가서 꼭 살아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매일 손톱 밑의 흙을 정리하면서, 사탕수수가 내 키를 넘어서는 순간, 잡초가 무성히 자라도 더 이상 눈에 거슬리지 않을 즈음 나는 긴 역사와 환경의 흐름 속에 이동하는 존재의 마음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정연두 서울대학교 조소과와 영국 골드스미스 컬리지 석사를 졸업하고 현재 서울에서 활동 중이다. 작가는 오래전부터 퍼포먼스가 직·간접적으로 등장하는 사진, 영상 등 미디어 작업에 주력하고 있다. 주로 현대인의 일상에서 작업의 소재를 발견하고, 그로부터 파생되는 수많은 가능성을 탐구하는 그의 작업은 사진과 공연적 연출 혹은 영화적 형태로도 보여진다. 대표작으로는 〈다큐멘터리 노스텔지아〉(2007) 〈씨네메지션〉(2010) 〈높은 굽을 신은 소녀〉(2018) 〈소음사중주〉 (2019) 등이 있으며, 최근 참여 전시로는 2021년 국립현대미술관, 2019년 서울시립미술관, 2019년 도쿄현대미술관, 2018년 프랑스 맥발미술관, 2018년 독일 ZKM미술관 등이 있고, 국립현대미술관, 삼성미술관 리움, 도쿄현대미술관, 뉴욕현대미술관, 시애틀미술관, 맥발미술관 등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 《쿨투라》 2022년 11월호(통권 101호) *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