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시인을 시인으로 남게 하는 일: 고 김수영 시인의 아내 김현경 여사를 만나다
[INTERVIEW] 시인을 시인으로 남게 하는 일: 고 김수영 시인의 아내 김현경 여사를 만나다
  • 김준철(미주문인협회 회장, 본지 미주특파원)
  • 승인 2022.11.03 10: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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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쓰는 일은 참 고된 일이다.

이는 곧 시인으로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필자도 시인으로 살아내려 애쓰는 사람의 한 명으로 시인이라는 이름이 얼마나 현실에서 가볍고 또 얼마나 시인 자신에게는 무거운지 잘 알고 있다. 시인 됨이란 어쩌면 현실에서 주어지는 다른 많은 이름들에서 초월해야 하는 것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자식으로, 배우자로, 보호자로 주어지는 이름들에 무책임해지며 또 그럴 수밖에 없게 되며 그것에 예민한 만큼 더욱 무뎌져야 하는 아이러니의 반복이 시인의 삶일 것이다.

하지만 더 상상할 수 없이 힘든 자리가 있다. 그것은 시인의 아내일 것이다. 시인의 아내는 시인이 가진 비현실적이며 한없이 나약한 정신세계를 인정해주어야 하며 또 그러므로 주어지는 현실의 바람을 고스란히 막아주어야 하는 것이다.

거기에 만약 그렇게 열심을 했으나 그 주체인 시인이 안타깝게도 먼저 떠나고 시만이 덩그러니 남는다면 그 공허함은 어떠하겠는가?

필자 역시 어린 시절부터 외가에서 자랐고 일찍 시인 남편을 잃고 혼자되신 외할머니와 오랜 시간을 지냈기에 그 삶의 고단함을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한다. 또한 그러기에 오늘 만날 김현경 여사에게 느끼는 마음이 남다를 수밖에 없다.

시인을 시인으로 만들고 시인으로 지키는 일은 어쩌면 그 어느 누구의 시보다 숭고하고 깊은 사랑의 반복적 노동이리라 감히 이야기한다.


1960년 막내여동생 졸업식날

김준철 이렇게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비행기타고 한국과 미국을 오고 가시기에 무리는 없으신지요? 무슨 일로 달라스에 오시게 되었나요?

김현경 항공사의 실버케어 덕분에 화장실 가까운 곳에 자리를 배정 받아 아무런 불편 없이 올 수 있었습니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연말이나 연초가 되면 특히 가족이 그립습니다. 안타깝게도 2년 동안 코로나 때문에 미국을 방문할 수가 없었지요. 마침내 자가 격리가 풀려서 그리운 손녀들과 며느리를 만나러 왔습니다. 이곳에는 손녀가 공부를 하고 있어서 자주 방문하고 있습니다.

김준철 김수영 시인이라고 하면 설명이 필요 없는 시인들의 시인이기도 하다는 생각입니다. 여전히 대학 논문의 상당수가 김수영의 시들로 채워지고 있으니까요. 시대를 넘어 지금도 꾸준히 사랑을 받는 대표 시인. 그래서 저는 오늘 가능하면 여사님께 집중하려고 하는데 잘 될는지 모르겠습니다.
우선 제가 알기로 늘 작품을 쓰시면 제일 먼저 검사를 받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사실 저 역시 아내에게 검사를 받고 있는데 제 아내는 표현을 잘 안 해줘서 보여주고도 내내 눈치를 보게 되는데요. 사모님은 어떤 스타일이셨는지 궁금합니다. 김 시인께서도 사모님의 반응에 예민하셨나요?

김현경 김 시인께서는 작품을 내놓으실 때마다 지나가는 말씀처럼 “내가 혼자 시를 쓰냐?”라고 하셨습니다. 김 시인께서는 특별히 저의 의견이나 조언이 필요하지는 않으셨지만 그래도 저의 격려와 무한한 지지를 원하셨던 것 같습니다.

두 손녀와 함께
두 손녀와 함께

김준철 그만큼 시를 만들어 내는 작업이 외롭고 힘드셨던 것 같네요. 많은 이들이 너무나 궁금해 했을 작품을 언제나 가장 먼저 보신다는 특권을 가지고 계셨는데 매번 신작을 읽으실 때 시인만큼이나 첫 독자로서의 자세가 있으셨을 것 같은데요?

김현경 김 시인께서는 한 달에 한 개 정도의 작품을 완성하셨는데 그때마다 그 전작과는 전혀 다른 작품을 내놓으려고 많이 애쓰셨습니다. 그래서 그때마다 ‘난산’ 이라고 외치셨는데 그 말씀 그대로 김 시인의 작품을 처음, 제 손에 드는 순간은 분만실에 들어가는 기분처럼 늘 긴장과 놀라움과 경이로움의 연속이었습니다.

김준철 김수영 시인께서 돌아가시고도 내내 그의 시를 읽고 또 읽으시면 정리하시고 또 반복하셨을 것 같은데…. 가장 마음에 와 닿으시는 시가 있으시다면 뭘까요? 그리고 그 이유는?

김현경 제가 가장 사랑하는 작품은 「도취의 피안」 입니다. 김 시인께서는 이 작품이 사회주의에 대한 자신의 노스탤지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시대 지식인들은 사회주의가 이상적이고 인도적인 정치형이라고 믿고 갈망하였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시간 우리가 살았던 그 젊은 시절 김 시인이 인류에게 영원한 자유와 사랑을 맹렬하게 외치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강연회에서
강연회에서

김준철 세간에 사람들은 사실 떠들기를 좋아하고 자신이 아는 것이 전부라 믿고 살아갑니다. 어쩌면 누구나 그렇게 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세상의 주목을 받고 사랑을 받는 만큼 그 반대적인 소리로 소란하고 속 시끄러운 일도도 많으셨을 텐데요. 어떻게 긴 세월 마음을 다독이셨는지요?

김현경 어떤 날은 김 시인이 사무치게 그리울 때가 있습니다. 그런 날이면 ‘김수영 그리워하는 날’로 잡아 김 시인의 글을 읽어 내려가는 것이 제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해결책이었습니다. 물론 살다보면 쉽지 않은 날이 많았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를 지켜 준 것은 김 시인의 시들입니다. 저는 죽는 그 순간까지도 김 시인을 읽고, 그리고 꿈꿀 것입니다.

김준철 저는 늘 김 시인의 재능을 부러워했는데 말씀을 들으면서 이런 사모님을 만난 것이 더욱 부럽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럼 김수영 시인과 가장 기억에 남는 추억이 있으시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

김현경 큰 아들이 국민학교를 들어갔을 때쯤 저희는 마포에 살고 있었고 도봉동에 살고 계시는 시어머님을 일주일에 한 번씩 찾아뵙곤 했습니다. 그럴 때면, 밤이 늦어 돌아오곤 했는데 달이 아주 밝은 밤, 큰 아들은 옆에 걸리고 둘째 놈은 김 시인이 등에 업고 고즈넉이 걸었던 때가 가끔 그립습니다.

서재의 한 켠
서재의 한 켠

김준철 맞아요. 그리움이라는 것은 결국 어떤 특별한 순간이라기보다는 그런 소소한 일상을 떠오르게 하는 것 같네요. 시인이 아내에게 전한 가장 감명 깊었던 말은 무엇일까요?

김현경 특별하게 생각나는 말씀은 없지만 작품 구성을 하지 않으실 때는 김 시인보다 더 다정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김준철 아마 세상의 많은 직업들 중에 시인이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만큼 까다로운 사람도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김수영 시인과 함께 하시며 가장 힘들었던 일은?

김현경 시인이라는 직업이 그리 만만한 직업은 아니지만 특히 김 시인이 작품 구상에 들어가실 때면 집안은 항상 폭풍전야와 같은 긴장감이 들곤 했습니다.

김준철 예술이라는 작업을 깊이 생각하면서 늘 드는 생각이 참 이기적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 몰입력이 또 귀한 작품으로 탄생하는 것 같습니다. 또 반대로 그러기에 참 나약한 존재라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그걸 인정하지 않는 이들에게는 아무 기대도, 배려도 영향력도 끼칠 수 없으니까요. 일찍 헤어지시게 되었는데 김수영 시인과 못하셔서 아쉬운 기억이 있으실까요?

김현경 올림픽 이후 해외여행 자유화가 되어서 제가 처음으로 유럽여행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김 시인과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이 무척 안타까웠습니다. 더 넓은 세상을 함께 했다면 또 다른 작품을 만났을 것 같다는 아쉬움도 드네요.

김준철 여사님도 오래 전, 정지용 선생께 시경을 공부하시고 수필집도 내셨는데 김수영 시인을 뺀 여사님의 문학적 열정은 어떤 것일까요?

김현경 어릴 적부터 저는 산문작가가 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김 시인과 함께한 후로 제가 경제적인 가장 역할을 해야 했기에 제 꿈을 펼칠 만한 기회가 없었습니다.

김준철 이미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시듯 의상실도 운영하셨고 미술 컬렉터, 디렉터로도 활동하셨는데 정말 하고 싶으셨던 일은 무엇이었을까요?

김현경 저는 저의 미술관을 운영하고 싶었습니다. 미술 분야는 제가 어려서부터 항상 관심을 가져오고 꿈꿔왔던 일이었으니까요.

김준철 요즘은 어떻게 지내고 계시나요? 앞으로의 계획이 있을까요?

김현경 저는 가끔 강연에 초대를 받아 나가기도 하고 김수영 시인의 작품들과 관련된 인터뷰 등에 응하면서 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조만간 연세대 캠퍼스 안에 건립되는 김수영 문학관을 위해 제가 가지고 있던 김 시인의 작품들과 물품들을 기증했으며 그 안에 저와 김 시인의 생활을 알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민음사 제공

예술을 사랑하고 예술가가 되고 싶었던 여자는 지독히 깊은 시인을 만나 사랑을 하고 그가 떠난 후에도 내내 그의 시를 읽으며 그가 시인으로 남도록 애쓰고 있었다. 쉽지 않은 시간을 그렇게 버텨온 김현경 여사님은 필자의 눈에 너무나 부드럽고 단단한 꽃처럼 보였다.

시인은 더 이상 시를 쓰고 있지 않지만 그의 시는 아내에 의해 여전히 읽히고 전해지고 있다.

인터뷰의 말미, 김수영 시인이 이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여전히 외치고 있으며 김현경 여사가 가장 사랑하는 시로 마친다.


도취陶醉의 피안彼岸

김수영

 

내가 사는 지붕 위를 흘러가는 날짐승들이
울고 가는 울음소리에도
나는 취하지 않으련다

사람이야 말할 수 없이 애처로운 것이지만
내가 부끄러운 것은 사람보다도
저 날짐승이라 할까
내가 있는 방 우에 와서 앉거나
또는 그의 그림자가 혹시나 떨어질까 보아 두려워하는 것도
나는 아무것에도 취하여 살기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하루에 한번씩 찾아오는
수치와 고민의 순간을 너에게 보이거나
들키거나 하기가 싫어서가 아니라
나의 얇은 지붕 우에서 솔개미 같은
사나운 놈이 약한 날짐승들이 오기를 노리면서 기다리고
더운 날과 추운 날을 가리지 않고
늙은 버섯처럼 숨어 있기 때문에도 아니다

날짐승의 가는 발가락 사이에라도 잠겨 있을 운명—
그것이 사람의 발자욱 소리보다도
나에게 시간을 가르쳐 주는 것이 나는 싫다

나야 늙어 가는 몸 우에 하잘것없이 앉아 있으면 그만이고
너는 날아가면 그만이지만
잠시라도 나는 취하는 것이 싫다는 말이다
나의 초라한 검은 지붕에
너의 날갯소리를 남기지 말고
내가 던지는 조그마한 그림자가 무서워
벌벌 떨고 있는
나의 귀에다 너의 엷은 울음소리를 남기지 말아라
차라리 앉아 있는 기계와 같이
취하지 않고 늙어가는
나와 나의 겨울을 한층 더 무거운 것으로 만들기 위하여
나의 눈이랑 한층 더 맑게 하여 다오
짐승이여 짐승이여 날짐승이여
도취의 피안에서 날아온 무수한 날짐승들이여

 


김준철 《시대문학》 시부문 신인상과 《쿨투라》 미술평론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꽃의 깃털은 눈이 부시다』 『바람은 새의 기억을 읽는다』가 있음. 현 미주문인협회 회장 겸 출판편집국장. 《쿨투라》 미주지사장 겸 특파원. junckim@gmail.com

 

* 《쿨투라》 2022년 11월호(통권 101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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