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 그리움을 향한 무모한 발걸음: 조용호 장편소설 『사자가 푸른 눈을 뜨는 밤』
[북리뷰] 그리움을 향한 무모한 발걸음: 조용호 장편소설 『사자가 푸른 눈을 뜨는 밤』
  • 설재원(본지 에디터)
  • 승인 2022.11.08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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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세계의 문학》에 단편소설을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한 조용호 작가가 오랜만에 새로운 장편소설 『사자가 푸른 눈을 뜨는 밤』으로 돌아왔다. 산문집 『여기가 끝이라면』 이후 4년 만에 펴낸 신간이며, 장편 소설로는 『기타여 네가 말해다오』 이후 무려 12년 만에 발표하는 신작이다.

모든 것은 서서히 바스라진다. 한때는 절절하고 애틋했던 기억조차 모두 사라진다. 스러져 가다가, 한번 사로잡혔던 사람이나 기억은 깊은 망각 속에서도 가끔 유령처럼 솟구쳐 일렁일 때가 있다. 그 사람에 대한 기억이 독자적인 생명체가 되어 저 홀로 희미한 빛줄기 속을 부유한다. 강렬했던 기억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아픈 기억은 세월이 흘러도 쉬이 잊히지 않는다. 세월이 흐를수록 더 선명해지다가 미라로 박제되는 기억도 있다.
- 본문, 7쪽

책상머리에서 격정에 받쳐 휘갈겼던 문구들은 지금도 기억한다. 이곳에 올 때마다 하원이 함께 있는 듯한 느낌에 휩싸이곤 했다. 올 때마다 맨정신으로는 잠들지 못하고 술기운에 쓰러져 잤으니 혼몽한 정신 상태가 그런 느낌을 자아냈을지도 모르지만, 이곳에서는 늘 혼자가 아니었다. 희연까지 왔으니 이번에는 셋이 함께 있는 셈이다.
- 본문, 43쪽

1980년대 야학연합회 사건을 배경으로 진행되는 『사자가 푸른 눈을 뜨는 밤』은 사랑했던 이의 생사조차 알지 못한 채 평생 그리움으로 살아온 한 남자의 이야기다. 야학연합회 사건 당시 실종됐던 하원을 잊지 못한채 살아가는 나는 그리움으로 살아가는 인물이다. 이야기는 하원을 똑 닮은 여인을 만나며 역동적으로 전개된다. 나는 그녀와 함께 진상 규명이 어렵다고 결론이 난 하원의 실종을 추적한다. 『사자가 푸른 눈을 뜨는 밤』은 조용호 문학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그리움과 상실과 같은 질료들이 더욱 자리를 넓혀 현대사의 그리움과 상실을 품고 있다.

시간이 흐르면 아픔도 희미해질 줄 알았습니다. 세월이 흘러도 가라앉기는커녕 그리움이라는 고통은 더 깊어지더군요. 이곳 카주다리 사자의 눈을 나도 지니고 싶습니다. 깊은 밤 푸른 눈을 뜨고 저승의 그리운 이들을 이승에서도 볼 수 있는, 그들을 만나러 갈 수 있는, 오르페우스가 다녀왔다는 그 길을 찾고 싶습니다. 오늘 밤 사자의 눈이 유난히 맑고 푸릅니다.
- 본문, 159-160쪽

페르시아의 수도였던 이스파한에 가면 아름다운 카주다리 남단과 북단 아래 돌로 만든 사자상이 서 있다. 이 사자상이 밤이면 신묘한 마술을 부린다. 남쪽 사자상 앞에서 강 건너 북쪽 사자상 두 눈을 보면 녹청색 빛이 레이저광선처럼 뻗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사자상 주변에 반사될 만한 아무런 조명도 없고 자체 발광할 어떠한 조건도 파악할 수 없어서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이스파한의 밤, 그곳 사자들은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지키며 푸른 신호를 주고 받는 것처럼 보였다.
- 「작가의 말」, 187쪽

소설의 제목 ‘사자의 푸른 눈’은 이스파한의 3대 미스터리 중 하나이다. 남쪽 사자상 앞에서 북쪽 사자상의 눈을 보면 푸른 빛의 레이저 광선이 보이듯, 한 여인을 품고 살아온 남자의 눈은 어둠에서 빛을 발하고 있음을 전하고 있다. 함께 야학 교사를 했던 연인 하원과 내가 수배 중에 보낸 열흘 간의 시간은 ‘순금 같은 기억의 성소’에 머물러 있다. 이곳이 ‘조개 무덤’이 되기까지 무려 40년이 지나도록 하원은 여전히 실종 상태이다. 그녀는 죽지 않았지만 존재하지도 않고, 오직 기억 속에 박제된 모습으로 나와 하나가 됐다.

작가는 “시대의 야만을 배경으로 죽음이라는 인간보편의 숙명, 그 어두운 너머를 보면서 간절한 그리움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또한 “지난 시대의 아픔을 빌려 이야기를 풀어나갔지만, 단순히 공권력의 폭력에 대한 고발로 읽히지를 바라지 않”으며, “따지고 보면 모든 죽음은 의문사이고, 그리움은 살아 있는 존재들의 숙명”이기 때문에 “그리움으로 고통받는 이들이 조금이라도 위로를 받았으면 좋겠다”는 뜻을 밝혔다.

조용호 작가가 꺼내 놓는 사람과 사랑과 회환을, 왜 어디서 무엇 때문에 우리는 살고 죽는지 풀 길 없는 영원한 의문을 독자 스스로 찾아 나서보는 시간이 되길 바라며 일독을 권한다.

 


 

* 《쿨투라》 2022년 11월호(통권 101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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