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ICON] 믿을 수밖에 없는 그녀: 예쁘고 똑똑한 욕심꾸러기, 배우 박은빈
[2022 ICON] 믿을 수밖에 없는 그녀: 예쁘고 똑똑한 욕심꾸러기, 배우 박은빈
  • 구선경(드라마 작가)
  • 승인 2022.12.06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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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빈 SNS

이름을 모르지만, 인상적으로 기억되는 배우들이 있다. 그럴 땐 두 가지 경우다. 주로 주인공의 친구, 주인공의 부모, 주인공의 직장 상사나 동료 등으로 늘 얼굴이 익은 경우가 하나이고, 또 하나는 배우의 이름보다 그 배역이 더 강렬하게 남은 경우다. 박은빈이 그랬다.

처음으로 그녀가 눈에 들어온 건 〈청춘시대〉에서였다. 음주 가무 음담패설에 능한데 모태솔로인, 설정부터 흥미로운 송지원이라는 인물을 연기한 그녀는 그때나 지금이나 귀에 때려 박히는 빠르고도 낭랑한 발음으로 거침없고 경쾌 발랄한 캐릭터를 찰떡으로 소화해냈다. 예쁘고 사랑스러운데 엉뚱한 저 친구는 누굴까, 이미 어디서 많이 본 건 알겠는데 바로 입에서 이름이 튀어나오지는 않아 등장인물 소개를 검색했고 아 박은빈, 이름을 보니 또 낯설지는 않았다. 하지만 더 기억에 남는 건 ‘쏭’이라는, 벨에포크에 살고 있을 여대생이었다.

몇 년 후 〈스토브리그〉에서 다시 만났을 때 그녀는 주변에 있는 K-직장인으로, 하지만 불의를 참지 않는 야구단 팀장으로 “선은 니가 넘었어!”를 외치고 있었고, 그로부터 불과 얼마 후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에서는 우아한 음대생으로의 변신과 함께 전공자 수준의 바이올린 실력으로 우리를 놀라게 했다. 그러고 보니 그 이전엔 지하철에서 “어제는 살인, 다음 주에는 강간을 한다”고 읊어 주변을 식겁하게 만든 판사인 적도 있었고, 또 탐정의 조수로 일하는 알바생인 때도 있었다. 그때마다 그녀는 야구단 팀장 이세영이었다가 음대생 채송아였다가, 판사 이정주, 탐정 조수 정여울 등이 되어 전작을 떠올리지 않게 하는 확실한 변신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드디어 원탑 주연을 맡은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 ‘자폐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변호사 우영우’로 돌아왔고 그녀가 그동안 쌓아온 내공이 빛을 발하면서 최고의 인생캐릭터를 갱신했다. 이 작품은 TV 채널과 함께 OTT에서 동시 방영되면서 전 세계인 모두가 그녀의 실력과 매력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고 이제 박은빈은 태국, 싱가포르, 도쿄 등에서 생애 첫 아시아 팬미팅 투어를 하는 스타가 되었다.

몇 년 전까지 누군가에겐 자신의 이름이 선명하지 않았다면 배우에겐 서운할까? 이른바 스타가 아닌 게 그녀는 혹시 속상했을까? 그녀의 마음을 짐작하기 전에 시청자 입장부터 말해보자면, 그 박은빈이 이 박은빈이구나 하고 알게 되는 순간은 시청자로서는 정말 짜릿한 순간이었다. 배우가 아니라 그 캐릭터가 보인 거니까. 진부한 표현이지만, 정말 극에 녹아든 배우를 보게 된 순간이니까.

그래서 이건 배우에게 최고의 찬사다. ‘당신은 천상 배우다’라는 말, 그 이상의 찬사가 어디 있겠는가.

게다가 이제 그녀는 스타가 되어버렸다. 스타가 되기보다 배우가 되려고 애써서 결국 스타와 배우가 다 되어버린, 아름답고 행복한 상황이다. 명성이 과하게 부풀려져 불안할 일 없이, 노력에 비해 평가받지 못해 억울한 일 없이, 노력과 능력만큼 온전히 사랑받는, 완벽하고도 아름다운 그림이다. 진심으로 기쁘고 흐뭇한 결말이다.

진정한 배우라는 찬사는 더하면 넘칠 듯하고 그 외의 칭찬은 이미 많은 이들이 마르고 닳도록 했을 테니 그가 이렇게 믿음직한 배우가 된 이유를 얘기해보려는데 어쩐지 망설여진다. 왜냐하면 여기서부터는 도대체 재미없는 이야기가 될 것만 같아서다.

떠올린 단어들은 이것이다. 성실함. 꾸준함. 인내심. 그리고 노력.

너무나 재미없는 단어들이다. 길거리를 가다가 극적으로 캐스팅이 됐다든지, 어떤 트라우마가 연기의 원동력이었다든지, 그냥 자고 일어나보니 유명해져 있었다든지…. 이런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는 그녀에겐 없다. 그녀는 캐릭터 노트를 몇 권째 착실히 써오고 있고, “그렇지만 어쩌겠습니까. 해내야죠”라는 말이 어록으로 돌아다니는 배우다. 경력 26년 차 주연배우로서 현장 분위기를 주도해야 한다는 책임감에 소홀하지 않고, 자칫 느슨해지려는 순간 다잡고 나서는 역할까지 한다고 한다. 바른생활 소녀, 모범생, 이런 다소 밋밋한 단어들이 떠오르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래서 무섭다. 왜냐하면 성실, 꾸준, 인내, 노력, 이런 재미없는 것들은 참 지속하기 어렵고 그걸 해내는 사람들은 대개 독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누가 알아주지 않을 때부터, (물론 이전에도 그녀를 알아본 눈 밝은 팬들에겐 누구보다 멋진 스타였겠지만) 지금처럼 전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치기 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변함없이 노력하고 꾸준히 공부하고 매일매일 현장에서 성실하게 해 온 사람이라니. 어쩐지 엄친딸 같아서 주눅이 들려고 하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배우로서의 박은빈에겐 무한대의 기대가 생긴다. 어느 날 갑자기가 아니라 차곡차곡 또박또박 준비된 스타다. 대체 앞으론 뭘 또 얼마나 보여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유퀴즈 온 더 블록〉 ⓒtvN

〈유 퀴즈 온 더 블록〉에 나온 그녀의 인터뷰는 솔직하게 표현해보자면, ‘고급졌다’. 처음에 우영우 역할을 왜 고사했느냐는 질문에 “많은 가족분들이 엮인 내용이다 보니 누군가에게도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던 욕심이 저를 망설이게 했던 것 같아요”라고 답했다. ‘욕심’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결국은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수밖에 없을 수도 있다는 현실적 한계를 알고 있음을 의미한다. 똑똑한 배우가 아닐 수 없다. “올바른 영향력을 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필요했다”라거나 “나에게 맞는 길을 찾고 싶어서 내 안의 소리를 들으려 노력했다”는 등의 발언은 오랜 숙고와 자기 성찰, 그리고 풍부한 어휘력까지 가지고 있어야 가능한 멘트다. 바로 이 대목이 든든한 기대감을 갖게 하는 이유다. 게다가 그녀는 본인이 재미없는 스타일이 아니라고 마음만 먹으면 재밌을 수 있다고 강변한다! 욕심이 정말 많은 친구다. 이제 겨우 자기 인생의 서른한 번째 해를 살고 있는 이 예쁘고 단단한 배우가 앞으로 얼마나 더 다양한 것들을 꺼내놓을지 즐겁게 기다려봐야겠다.

 


구선경 드라마작가. 현재 작가협회 교육원과 대학에서 드라마와 스토리텔링을 강의하고 있다. 〈옥탑방 고양이〉 〈오 마이레이디〉 등 집필.

 

 

* 《쿨투라》 2022년 12월호(통권 102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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