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월평] 애증과 모순으로 뒤얽힌 모녀의 이야기: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
[영화 월평] 애증과 모순으로 뒤얽힌 모녀의 이야기: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
  • 이은주(서울신문 기자)
  • 승인 2022.12.14 15:3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사진 제공: 찬란

세상에서 가장 복잡다단한 것이 바로 모녀 관계다. 그 속에는 단순히 ‘애증의 관계’라는 말로는 표현되지 않는 더 크고 심오한 무언가가 숨겨져 있다. 엄마와 딸은 같은 속옷을 입을 정도로 내밀하지만, 가까운 만큼 서로에게 심한 상처를 안겨주기도 한다.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는 모든 인간 관계의 가장 기본에 해당하는 모녀 사이를 날카롭고 도발적인 시선으로 그린 영화다.

가족을 위해 자신의 삶을 포기하고 모든 것을 헌신하는 엄마와 그런 엄마에게 순종하고 효도하는 딸. 영화 속에 등장하는 엄마 수경(양말복 분)과 딸 이정(임지호 분)은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모녀 관계로 그려지지 않는다. 홀로 좌훈방을 운영하며 힘겹게 살아온 수경은 딸 이정을 과격하게 대하고 심지어는 폭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이정은 그런 엄마에 대해 증오심과 피해의식을 동시에 갖고 있다.

팽팽한 평행선을 달리던 두 사람은 마트 주차장에서 촉발된 사고로 감정이 폭발하게 된다. 두 사람이 차 안에서 격렬하게 다투던 중, 운전석에 앉아있던 수경이 화를 내면서 차에서 내린 이정을 덮치는 사고가 발생한 것. 엄마 수경은 급발진에 의한 우발적인 사고라고 주장하지만, 이정은 고의에 의한 것이라고 확신한다. 평소에도 ‘죽여버리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 엄마가 자신을 죽이려고 했다는 것이다.

영화는 이 사건을 계기로 두 모녀의 학습된 관계가 서로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세밀하게 관찰한다. 작은 아동 학습지 출판사에서 근무중인 이정은 부당한 부서 이동에도 제대로 항의를 하지 못하는 직원이다. 이정은 이렇게 자란 것은 자신을 만만하게 생각하는 엄마 탓이라고 생각한다. 엄마가 때리면 별다른 저항 없이 맞고, 욕하면 듣는 이정은 늘 자신감이 부족하고 남의 눈치를 보면서 자랐다. 때문에 늘 주눅이 들어있는 자신에 대해 직장 상사들이 함부로 대해도 제대로 저항할 수 없는 사람이 된 것이다.

이정은 같은 사무실에 근무하는 소희로부터 “사람들이 마음대로 하게 두지 말라”라는 조언을 듣고 조금씩 스스로 일어나는 연습을 한다. 급발진 사고가 차의 결함이 아니라 엄마의 잘못임을 입증하기 위해 재판장에 증인으로 서게된 것도 그런 행동의 일환이다. 엄마에게 배달이 온 코트를 뜯어서 입고 나가는 등 소심한 반항도 이어진다.

한편 극중 수경은 가부장 사회에서 학습된 ‘모성 신화’와는 상당히 거리가 먼 여성으로 등장한다. 수경은 나이가 차도 독립하지 않는 이정을 한심하게 여기고 중학생 딸을 둔 종열(양홍주 분)과 재혼을 준비하는 등 희생보다는 자신의 행복에 더 몰두한다. 수경은 딸 이정의 학교 졸업식에도 가지 않았지만 종열의 딸 졸입식에는 참석한다. 하지만 종열이 수경에게 한 여자가 아니라 자신의 딸을 돌보는 엄마로서의 역할을 요구하자 또다시 벽을 느낀다.

영화는 두 사람의 감정의 골이 점점 깊어지는 과정을 귀에 쏙쏙 박히는 촌철살인 대사와 몰입도 높은 전개로 풀어낸다. 만 서른살 신인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사색적이고 세월의 연륜이 느껴지는 대사들도 눈에 띈다. 어렸을 때부터 목욕탕, 사우나 등 중년 여성이 있는 장소에 많이 갔다는 감독은 자연스럽게 그들의 대화를 습득했다.

“관계가 내 인생의 화두”라고 밝힌 김세인 감독은 “가장 모순을 품고 있는 관계가 모녀 사이이며 사회가 받아들이지 못하는 여성들을 카메라에 담고 관객들이 그 외연을 보고 그들이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 생각해주기 바란다”고 밝혔다.

감독의 말처럼 영화 중 후반부에는 사이즈가 다른 두 여자가 왜 같은 속옷을 입을 정도로 친밀하지만, 왜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는지 그 배경에 대해 자세하게 밝혀진다. 두 사람은 세상에서 받을 수 없는 사랑과 관심을 받기를 원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가장 젊고 행복했어야 하는 나이에 딸 이정을 가지고 워킹맘으로 살아온 수경은 “딸이라면 당연히 엄마의 마음을 이해해 줘야한다”고 주장한다. 수경은 “지금껏 키워줬으면 잔소리를 듣고 짜증 좀 받아줄 수 있는 것 아니냐. 우리 때는 다들 그러고 살았다”고 항변한다.

하지만, 허물없이 대한다고 상처까지 함부로 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특히 어린 시절에 형성된 부모와의 관계는 한 사람의 인생 전반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 그런 이유 때문에 이정은 엄마에게 끊임없이 사과를 요구하지만, 제대로 답을 듣지 못한다. 이정이 “엄마한테 쌓인 것을 나에게 다 쏟아내면 나는 어떡하냐”고 울부짖자 수경은 퉁명스럽게 “너도 딸 낳아”라고 답한다.

이 두 사람의 대화는 한 가정이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의 비극으로 읽힌다. 가부장 사회속에서 여성들은 자신에게 지워지는 과중한 부담과 부당한 대우에 대해 항의할 수 없었고 고통을 그대로 감내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남성보다는 권력 관계에서 더 약한 여성에게 스트레스를 푸는 경우가 많았다. 고부간의 갈등도 넒은 범주에서 이에 해당한다.

때문에 가장 가까운 모녀 사이에서는 딸이 엄마의 감정의 쓰레기통으로 전락하는 경우가 빈번하게 발생한다. 일종의 사회적 스트레스에 의한 행동인데,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행해지는 무언의 폭력에 대해 점점 무뎌지고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기도 한다.

그렇다고 이 영화는 수경을 가해자로만 그리지는 않는다. 수경 역시 가부장 사회 속에서 모성을 강요받고 싱글맘으로서 외로운 삶을 살았고, 자신도 모르게 사과조차 할 수 없는 괴물이 되었다.

이정 역시 무조건적 피해자로 묘사되지 않는다. 이정은 타인에게 이해와 사랑을 갈구하는 의존적인 태도를 버리고 스스로 자아를 찾는 방법을 배운다. 마지막에 이정이 속옷 가게에서 자신에게 맞는 사이즈의 속옷을 사는 과정은 더이상 엄마의 탓을 하기보다는 독립적인 존재로 나아감을 의미한다.

“개별적인 역사를 지닌 두 사람이 각자 독립하는 이야기를 그리고 싶었다”는 감독은 사회적으로 일어나는 일들이 개인의 책임이나 문제가 아니라 시스템의 부재와 연관이 있다고 강조했다.

그의 말처럼 영화 말미에 두 사람이 어둠 속에서 서로의 속내를 드러내는 대화를 들으면 이 두 모녀의 관계가 우리 시대와 사회의 아픔과도 맞닿아 있음을 느끼게 된다.

건강한 사회는 건강한 관계를 만들고, 좋은 관계는 좋은 사람을 만든다. 단순하지만 가장 어려운 명제가 이 영화에 담겨있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5관왕을 차지하며 호평받았고 서울독립영화제 배우부문 독립스타상, 무주산골영화제, 서울국제여성영화제(발견부문) 대상을 받았다. 베를린국제영화제, 우디네극동영화제 등 해외 유수 영화제에도 초청되기도 했다.

 


이은주 서울신문 기자 겸 유튜브 크리에이터. 연세대학교 불문과·동대학원 영상학 석사. 한국 방송대상 심사위원 역임. 유튜브 채널 〈은기자의 왜 떴을까TV〉 진행. 저서 『왜 떴을까: ‘K-크리에이티브’ 끌리는 것들의 비밀』.

 

 

* 《쿨투라》 2022년 12월호(통권 102호) *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