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월평] 최고의 황금비율을 찾아서: 〈슈룹〉, 〈금수저〉
[드라마 월평] 최고의 황금비율을 찾아서: 〈슈룹〉, 〈금수저〉
  • 김민정(드라마 평론가, 중앙대 교수)
  • 승인 2022.12.14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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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제공: tvN

한동안 드라마 편성 자문을 한 적이 있다. ‘이 드라마를 편성하시겠습니까’라는 첫 질문 앞에서 매번 손끝이 떨렸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그러니까 아직 방송도 되지 않은 이 ‘작고 연약한’ 드라마가 냉혹한 약육강식의 콘텐츠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지를 판단하는 일. 그건 정말 힘겨운 감정 노동이었다. 누군가의 생사여탈권을 손에 쥐고 있는 것처럼 부담스러웠다.

서사 전개가 전형적이면 지루하고, 그렇다고 시청자의 예상 범위를 훌쩍 뛰어넘어 버리면 그것 또한 시청자의 몰입을 방해한다. 새로움과 익숙함 그 어딘가에서 최고의 황금비율을 찾아야 한다. 최근 서로 다른 매력으로 시청자의 마음을 사로잡은 두 편의 드라마가 있다. 한 편은 새로운 듯 친숙하고, 다른 한 편은 익숙한 듯 새롭다. 과연 그들이 찾아낸 황금비율은 무엇일까.

사진 제공: tvN

드라마 〈슈룹〉

드라마 〈슈룹〉. 제목부터 너무나 독특한 이 드라마의 매력은 무엇일까. ‘슈룹’은 우산의 옛말이다. 그리고 그 예스러운 제목에 걸맞게 장르는 역사물이다. 하지만 역사적 상상력을 화려하게 덧댄 퓨전 사극, 즉 우리가 무엇을 상상하듯 무조건 그 이상의 스토리가 나올 거란 얘기다.

우선, 우리가 흔히 사극에서 보던 우아하고 기품 있는 ‘중전마마’는 없다. 대신 “이 새끼 어딨어?”라고 외치며 노는 것에만 열중하는 아들을 직접 찾아다니는 걸쭉한 입담을 가진 ‘억척스러운 엄마’가 있다. 드라마를 보다 보면 한복 차림으로 뛰어다니는 배우 김혜수의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치맛바람이 세다’는 표현이 딱 어울리는, 아들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마다하지 않는 교육열 높은, 그런 우리네 엄마랄까.

드라마 〈슈룹〉은 사고뭉치 왕자들을 위해 치열한 왕실 교육 전쟁에 뛰어든 중전의 파란만장 궁중 분투기를 그린다. 첫 화부터 중전을 포함한 왕실 ‘엄마’들의 치열한 경쟁이 시작된다. 왕세자의 교육을 담당하는 시강원에서 세자와 함께 교육을 받을 배동을 선발한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세자의 건강이 악화하면서 배동이 될 왕자가 세자가 될 수 있다는 소문까지 더해져 점점 그 열기가 뜨거워진다. 아들을 배동으로 만들기 위한 왕실 엄마들의 뜨거운 사교육 열정은 2022년 대한민국 사교육 열풍과 무척이나 닮았다. 오호, 조선 시대 왕실이 이렇게 흥미진진할 줄이야!

사진 제공: tvN

보고 또 보고

딱 5화까지였다. ‘대치동 엄마’ 못지않은 왕실 버전의 다양한 사교육 비법이 흥미진진하게 펼쳐지고 그 우스꽝스러운 광경을 보며 재미있다고 생각한 건 말이다. 본격적인 배동 쟁탈전이 펼쳐지는 6화부터는 점점 얼굴이 굳어져 갔다. 잠시 잊고 있었다. 한때 대한민국을 휩쓴 유행어가 ‘헬조선’이었단 것을. 드라마 〈슈룹〉 안에 ‘SKY 캐슬’만 있는 게 아니었다. 그 안에는 우리가 사는 세상이 통째로 들어가 있었다. 아, K-세계관.

왕자라고 해서 다 같은 왕의 아들이 아니다. 평범한 사람 눈에는 다 같은 존귀한 왕자지만 그 안에서도 자신을 낳아준 엄마의 신분과 처지에 따라 등급이 또 구분된다. 엄마의 계급이 곧 아들의 계급이다. 일차적으로 양반집 규수로 일정한 절차를 통해 후궁이 된 ‘간택후궁’과 하룻밤 왕의 편애로 인해 후궁이 된 ‘승은후궁’으로 나뉜다. 그 안에서 집안의 경제력과 정치력에 따라 또다시 신분 등급이 매겨진다. 한국 고유의 계급론, 이름하여 ‘수저론’이다. 〈슈룹〉은 여기서 한 발 더 나가 금끼리 또 나누는 ‘파격 행보’를 선보인다. 금도 14k가 있고 19k가 있다. 금수저도 다 같은 금수저가 아니기에 등급에 따라 받을 수 있는 사교육의 수준이 달라진다.

극 중 왕의 어머니 ‘대비’는 후궁 출신으로 서자인 아들을 왕위에 앉힌 입지적인 엄마이자 중전을 폐위시키고 대비의 자리에 오른 성공한 후궁이다. 위계서열이 확고한 K-세계관에서 신분 상승을 이루어낸 독보적인 인물이랄까. 모든 후궁들의 롤모델 겸 모든 을이 꿈꾸는 성공 신화. 드라마 주인공인 우리의 중전 ‘김혜수’도 집안 좋은 다른 후보를 제치고 중전이 된 ‘성공한 을’이다. 결국, 드라마 안에는 두 부류의 사람만 존재하는 셈이다. 갑이 된 을과 갑이 되고 싶은 을. 아, 이놈의 기시감. 갑자기 드라마가 다큐가 되는 이 당혹스러움을 어찌할꼬.

사진 제공: MBC

드라마 〈금수저〉

조선 시대가 신분 사회라면 지금 여기의 우리는 계급사회에 살고 있다. 드라마 〈금수저〉는 2022년 우리의 욕망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솔직한’ 드라마다. 우선 설정부터가 굉장히 직설적이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아이가 우연히 얻은 금수저를 통해 부잣집에서 태어난 친구와 운명을 바꿔 후천적 금수저가 된 이야기다. 길가에서 우연히 만난 할머니에게서 금으로 만든 숟가락, 그러니까 말 그대로 금수저를 얻게 된 다음 벌어지는 일을 그려낸다.

우리가 그냥 재미로 ‘금수저’라고 말했던 그 금수저가 드라마에서 실제 금수저로 등장한다. 이보다 정직한 설정이 세상에 또 있을까 싶을 정도다. 극 중 그 금수저로 한 집에서 밥을 세 번 먹으면 그 집 부모가 자신의 부모로 바뀌게 된다. 주인공 이승찬은 학교에서 퇴학 위기에 처하자 부모를 바꿔주는 금수저를 이용해서 대한민국 대표 재벌 도신그룹의 후계자 황태용과 인생을 바꾼다.

처음에는 흙수저 이승찬이 부모를 버리고 금수저가 되는 걸 보고 드라마에 나타난 현실 인식이 굉장히 평면적이다 못해 일차원적이라고 생각했다. 부자면 행복하고, 가난하면 불행하다. 그래서 부모를 버리더라도 부유한 집안의 아들이 되면 좋다. 이렇게 진행되는 뻔한 이야기일 테니까. 혹은 반대로 부자는 돈만 아는 속물이고 가난한 사람들은 가진 건 없지만 정다운 사람들이다, 이렇게 이분법적으로 그려질 거라고 예상했다. 그동안 한국 드라마에서 많이 반복되었던, 그래서 상투적이고 진부하다고 느껴질 수 있는 계급과 계층의 이야기를 그대로 답습하겠지 싶었다. 이러한 나의 모든 생각은 ‘금수저’라는 지나치게 정직한 제목 탓이었다. 음.

사진 제공: MB
사진 제공: MBC

자발적 흙수저의 삶

흙수저가 금수저가 된다, 금수저가 흙수저가 된다, 이런 설정들은 자칫 유치하게 이야기가 전개될 소지가 다분하다. 그런데 드라마 〈금수저〉는 그 함정을 영리하게 피해 간다. 극 중 이승찬과 황태용의 삶은 금수저를 통해 여러 번 바뀌면서 그들의 일상이 복잡하게 교차하고 그 과정에서 복잡미묘한 인간의 욕망과 심리가 드러난다.

특히 금수저에서 흙수저가 된 황태용의 감정선이 흥미롭게 전개된다. 가난한 흙수저에서 벼락 금수저가 된 이승찬의 시점에서 드라마를 볼 때는 통쾌한 사이다 맛이라고 생각했던 지점들이 황태용의 입장에서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상상해보라. ‘원조 금수저’ 황태용, 그는 갑작스럽게 금수저의 삶을 도난 당한 후 흙수저 이승천의 삶을 살게 된 것이다.

사진 제공: MBC
사진 제공: MBC

황태용의 삶은 모든 것이 바뀐다. 제일 먼저 궁전 같던 집에서 반지하 집으로 사는 곳이 달라진다. 그리고 하나둘씩 가난과 차별과 무시의 삼단 쓰리콤보가 쓰나미처럼 몰려온다. 처음에 황태용은 그 모든 상황이 당황스럽고 무섭다고 느낀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상하리만큼 잘 적응해간다. 심지어 삶의 만족도가 점점 높아지기까지 한다. 늘 재벌 회장 아버지에게 평가받으며 긴장하며 살던 ‘경직된’ 금수저의 삶보다 다정한 가족이 있는 ‘편안한’ 흙수저의 삶이 더 좋은 것이다. 가족이 둘러앉아 먹는 평범한 김치찌개도 좋고, 아플 때 손을 잡아주는 엄마의 따뜻한 손도 좋고.

한국 드라마를 보다 보면 흙수저에서 금수저가 된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하지만 금수저에서 흙수저가 된 사람들, 특히나 금수저일 때보다 흙수저에서의 삶을 더 좋아하는 사람은 찾기 어렵다. 그리고 그 어려운 일을 황태용은 해낸다. ‘원조 금수저’ 황태용이 금수저와 흙수저 사이를 오가며 어떠한 행복학을 설파할 것인가. 이것이 바로 드라마 〈금수저〉의 진짜 매력 발산 포인트가 아닐까 싶은데…. 음, 자발적 흙수저. 한국 드라마에서는 보기 드문 희귀한 캐릭터를 어찌할꼬. 아자아자 파이팅. 멀리서 응원의 마음을 전하는 수밖에.

 


김민정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연두빛 캠퍼스물과 회색빛 오피스물 사이를 분주히 오가고 있다. 언젠가는 내 인생이 장르가 판타지로맨스코미디홈드라마가 될 거라고 굳게 믿고 있다. 2022년 중앙대학교 교육상과 제4회 르몽드 문화평론가상을 수상하였다. 현재 《쿨투라》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크리티크 M》 편집위원과 KBS World Radio 〈김형중의 음악세상〉 고정 게스트로 활동하며 자발적 드라마 홍보대사로 열일하고 있다. 저서로 드라마 캐릭터 비평집 『드라마에 내 얼굴이 있다』 외 여러 권의 책이 있다.

 

* 《쿨투라》 2022년 12월호(통권 102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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