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월평] 나를 구원하러 온 나의 적대자: 아민 말루프, 장소미 옮김, 『초대받지 않은 형제들』(소미미디어)
[문학 월평] 나를 구원하러 온 나의 적대자: 아민 말루프, 장소미 옮김, 『초대받지 않은 형제들』(소미미디어)
  • 허희(문학평론가)
  • 승인 2022.12.14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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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 토지문화재단

명망 있는 여러 문학상 가운데 박경리문학상이 있다. 토지문화재단과 원주시가 주관하는 문학상이다. 『토지』로 널리 알려진 소설가 박경리의 정신과 업적을 기리고자 2011년 제정되었다. 수상자는 한국 작가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이스라엘의 아모스 오즈, 케냐의 응구기 와 시옹오 등 세계문학의 거장들이 박경리문학상을 받았다. 제11회를 맞은 올해 수상자에는 레바논 출신의 프랑스 작가 아민 말루프가 선정되었다. 한국 독자에게는 생소하지만, 프랑스에서는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공쿠르상을 받고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으로도 선출된 유명 작가이다. 심사위원들은 “대립되는 여러 가치의 충돌로 인해 개인의 정체성이 위협받고 있는 이 시대에 아민 말루프의 작품들은 상호이해와 화합의 정신으로, 인류 공동의 보편적 가치를 추구해야 할 세계문학의 바람직한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고 밝혔다.

실제로 그는 극단의 이분법을 해체하는 관점을 투영한 작품들을 발표해왔다. 국내에도 번역된 『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은 제목처럼, 유럽 중심의 시각에서 주로 서술되던 십자군 전쟁을 아랍인의 입장에서 재해석한 소설이다. 그렇다고 유럽만 비판하고 아랍을 옹호하는 태도를 취하지는 않는다. 박경리문학상 심사위원들의 언급대로 아민 말루프는 “상호이해와 화합의 정신으로, 인류 공동의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는 균형감을 발휘하는 작가이다. 이는 그의 저널리스트 경험과 관련된다. 대학에서 정치경제학과 사회학을 공부한 아민 말루프는 1970년대 레바논 베이루트 일간지 《안-나하르》에서 기자로 활동했다. 그 후 레바논 내전에 휘말려 1976년 프랑스로 귀화한 뒤 아프리카 시사주간지 《죈 아프리크》에서 근무한 적도 있다. 그는 늘 세계사적이고 정세적인 차원의 문제를 문학적으로 예각화해왔다.

아민 말루프의 신간 소설 『초대받지 않은 형제들』도 이러한 흐름 안에서 접근해야 하는 장편이다. 2020년 출간해 한국에는 2022년 소개된 이 작품은 현생 인류보다 월등한 과학기술을 보유한 이들을 다루고 있다. 그런 점에서 그간 써왔던 작품들과 결이 다른 SF소설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는 장르적 색채가 강한 이 작품을 통해서도 자신이 견지해온 문학관을 드러낸다. 내용은 이렇다. 대서양에 있는 안타키아 섬에 알렉상드르라는 남자가 살고 있다. 독신인 그는 고독한 삶을 영위하지만 그것이 곧 세상과의 단절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섬에는 또 다른 사람이 살고 있다. 한때 엄청난 주목을 받은 작품을 쓴 뒤 은둔을 택한 소설가 에브 생질이다. 서로 존재를 알고 있으나 특별히 교류하지는 않고 지내던 어느 날, 알렉상드르와 에브 생질은 기묘한 일을 겪게 된다.

섬의 전기와 전파가 끊어진 것이다. TV와 라디오를 비롯한 전자기기 등이 갑자기 먹통이 된 블랙아웃 상황에 알렉상드르는 공포에 사로잡힌다. 핵전쟁이 발발 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 길로 그는 유일한 이웃인 에브 생질을 찾아가 대화를 나누며 불안을 달랜다. 그렇게 친해진 두 사람은 이번 사건을 일으킨 배후와 맞닥뜨린다. 스스로를 ‘엠페도클레스의 친구들’이라고 칭하는 무리였다. 분화구에 몸을 던져 생을 마감했다고 알려진 비운의 철학자 이름을 딴 그들의 정체는 베일에 가려져 있다. 한 가지 확실한 점은 엠페도클레스의 친구들이 현생 인류보다 훨씬 높은 차원의 문명을 일궜다는 사실이다. 전 세계의 전기와 전파 등을 차단할 수 있는 시스템은 물론, 말기암 등 각종 질병을 고치고 심지어 신체 노화마저 거꾸로 되돌릴 수 있는 장비를 갖추고 있다.

동일한 조상을 두고 있지만 더 이상 현생 인류라고 할 수 없는 ‘초대받지 않은 형제들’은 대체 왜 모습을 드러낸 것일까. 부정적 예상과 달리, 이들에게 현생 인류를 지배하겠다는 목적 따위는 없다. 다만 지구 자체를 지키고자 했을 뿐이다. 핵전쟁 위기가 고조되어 파국으로 치달으려는 순간, 그들이 개입하여 미국을 위시한 각 나라의 핵미사일 네트워크 등을 폐쇄하는 결단을 내린 것이다. 엠페도클레스의 친구들은 분명 선의를 지닌 선지자들이다. 그러나 좋은 의도가 반드시 좋은 결과를 낳지는 않는다. 초대받지 않은 형제들에 대한 현생 인류의 반응은 극과 극으로 나뉜다. 하나는 추종파다. 추종파는 엠페도클레스의 친구들을 마치 신처럼 떠받들고 구원을 갈망한다. 다른 하나는 저항파다. 저항파는 엠페도클레스의 친구들이 현생 인류를 예속시킬 거라고 전망하여 테러까지 저지른다.

MAALOUF ©JF PAGA Grasset

그러니까 아민 말루프는 이 작품을 통하여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는 듯하다. 우리에게 호의를 품은 우리보다 우월한 생명체들에게, 과연 우리는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가. 그 답은 복종과 적대의 틈에서 유동적으로 찾아낼 수밖에 없으리라. 한 달간 자신이 보고 들을 바를 일기로 기록한 알렉상드르는 이렇게 에필로그를 덧붙인다. “지난 30일간의 사건들은 광활한 세상을 변모시키고 역사의 미터기를 제로로 되돌려놓은 것뿐만 아니라, 이 섬도 뒤흔들어 놓았다. 이제까지는 고독의 요새였던 이 섬이 이제는 에브나 나에게 전혀 다른 곳이 되었다. (……) 나는 우리의 초대받지 않은 형제들을 그토록 수시로 저주했건만 축복 또한 해야 할 것 같다.” 문장과 문장의 공백에는 스포일러라서 밝히기 어려운 이야기가 숨겨져 있다. 엠페도클레스의 친구들에게서 압박감, 그리고 뜻밖의 선물을 함께 받아 알렉상드르는 저주와 축복의 양가적 감정에 휩싸인다.

비단 그만이 아니다. 우리도 양자 중 어느 한쪽 편에 선뜻 서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미래는 천사와 악마의 얼굴을 다 가지고 있기에 그렇다. 이것은 자명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천사인 줄 알아 따랐으나 얼마든지 나중에 악마로 변모할 수 있다. 그 반대의 경우도 성립한다. 그러므로 둘 사이에서의 머뭇거림이야말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진실한 마음가짐일 것이다. 아민 말루프는 이를 있는 그대로 소설에 그려낸다. 몇몇 독자들은 그래서 아쉬움을 느낄 테지만, 명확한 해결을 제시하지 않아 오히려 독자의 생각이 자리할 공간이 많다. 일급 리얼리즘 작가의 역량은 SF소설을 써도 바래지 않는다. 그는 다만 오늘의 현실을 문학적으로 심문하는 방법을 새로운 스타일로 변용했을 따름이다.

 


허희 대학과 대학원에서 문학을 공부했다. 2012년 문학평론가로 활동을 시작해 글 쓰고 이와 관련한 말을 하며 살고 있다. 2019년 비평집 『시차의 영도』를 냈다.

 

 

 * 《쿨투라》 2022년 12월호(통권 102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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