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으로 읽는 조용필] 프롤로그
[문학으로 읽는 조용필] 프롤로그
  • 유성호(본지 주간, 한양대 국문과 교수)
  • 승인 2018.09.01 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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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PC 프로덕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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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편단심의 꿈

사실, 간절한 꿈이었다. 그의 노래 가운데 <꿈>이라는 것이 있지만, 그의 노래를 따라 저 오랜 기억들을 거슬러오르는 ‘꿈’을 꾼 지 제법 오래되었다. 대학 선생이 되고부터 자주 “내 꿈은 조용필 평전을 쓰는 것이다.”라고 말했고, 의욕 넘치는 선생의 ‘꿈’에 대해 90년대 학번 학생들은 놀람을, 00학번 학생들은 의아함을, 10학번 학생들은 대체로 무관심을 보였다. 그의 노래 <일편단심 민들레야>처럼, 정말 일편단심으로 그의 노래를 여기까지 따라왔다. 그러니 기억 속으로, 활자 속으로, 그의 노래를 담아가는 것이 전혀 불가능하거나 부적절하지는 않을 것이다.

평전
그런데 그의 평전이 벌써 나와 버렸다. 조용필 데뷔 50주년을 맞아 구자형 씨가 『음악과 자유가 선택한 조용필』이라는 평전 형식의 책을 출간한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대중음악의 역사와 장르에 내공이 깊은 저자의 식견과 해석을 통해 조용필 음악의 기원과 실질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다. 특별히 락, 블루스, 트롯, 팝, 국악, 댄스 같은 거의 전 장르의 음악을 소화한 거장이었다는 점을 선명하게 해석하여, 조용필을 이해하고 기록해가는 데 큰 지남(指南)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대중가요 전문작가로서의 경험적 특장을 최대치로 끌어올린 이 저서를 통해 우리는 조용필의 삶과 음악적 본령을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의 등장이 오랫동안 꿈꾸어왔던 조용필에 대한 나의 글쓰기 충동을 지우지는 못했다. 그건 애초부터 내가 음악적인 접근을 하려 했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오래 전부터 ‘시인 조용필’이라는 의외로운 제목으로 그의 노래와 인생을 풀어보려는 생각을 했다. 벌써 30년 저편의 일이다. 이 구상은, 조용필의 노래를 음악적으로 분석하지 않고(못하고), 그 노랫말과 음악 장르의 결속 과정, 그것을 소화해내는 조용필의 음색과 표정 그리고 그 노래들이 불렸던 시대의 수용적 측면을 아울러 살핌으로써(기억함으로써), 그의 노래가 더없이 살갑고 첨예하며 문제적인 당대의 ‘시(詩)’였음을 이야기해보려는 것이다. 이때 ‘시인’이라는 것은 물론 비유적 용법이지만, 또한 ‘시’의 고답적이고 폐쇄적인 범주를 넘어서려는 의도를 함축하기도 한다. 노래로 불려온 시, 끝없이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고 또 기억의 욕망을 불러 일으켜온 그의 노래가 문학의 정점으로 이해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이다. 그의 데뷔 50주년을 맞아 글을 시작하는 뜻도 작지는 않을 것이다.

1980년 전후

조용필을 생각할 때마다 1980년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그 이전 그는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히트시키면서 이미 국민적인 인기가수의 반열에 올랐다. 누구보다 현란한 기량을 가진 기타 연주자였던 조용필은, 허스키한 목소리로 깊이 있는 음감을 창출하는 가수로도 알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1970년대 후반에 종로나 광화문의 레코드숍에서 그의 <돌아오지 않는 강>이나 <정>, <너무 짧아요>, <생각이 나네>가 흘러나오면 가사를 정확하게 외워 따라 불렀던 시절이 삽화처럼 선명하다. “이제는 모두 사라진 후회 없는 추억들 철없이 좋아하던 가시내의 첫 사랑”이 언젠가 내게도 올 것만 같던 시절, 조용필은 대마초 경력이 문제가 되어 전격적으로 방송 금지를 당했다. 그 후 그는 10·26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기나긴 동면 상태로 들어갔고, 그의 20대 후반은 그렇게 음악에 대한 욕망과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 제도적 금기 사이에서 흘러갔을 것이다.

그러다가 해금 직후 낸 첫 정규 앨범 <창밖의 여자>는 그야말로 공전의 히트를 치면서 1980년 한 해를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의 해로 만들었고, 급기야는 1980년대 전체를 조용필의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얼마 전 개봉한 영화 <택시운전사>에서는 첫 장면에 주인공 송강호가 <단발머리>를 부르면서 독립문 고가차도를 운전하는 장면이 나온다. 물론 감독은 그때가 5·18 광주민주화운동 직전이라는 점을 알려주기 위해 택시운전사로 하여금 그 노래를 흥얼거리게끔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장면은 정확하게 그때가 ‘1980년’임을 알려주면서, 동시에 이 노래가 그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사랑한 애창곡이었는가를 보여준다. 그 점에서 조용필과 그의 노래는 적어도 대중가요를 통해 1980년대 전후를 보여주는 투명하기 그지없는 ‘창(窓)’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가수다

조용필은 1950년 3월 21일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 나는 화성이 조용필의 고향이요 차범근의 고향이라고 기억했다. 요즘은 한국 근대문학 초창기를 열었던 홍사용 시인을 기리는 문학관이 들어서 있고, 가끔씩 가서 “나는 왕이로소이다”를 읊조리기도 하지만, 여전히 내게 화성은 조용필이 단연 “왕이로소이다”인 곳이다. 그의 생가는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어쨌든 이것이 조용필의 삶의 첫 장(章)일 것이다. 그리고 가장 최근의 조용필 영상은 데뷔 50주년 순회 콘서트를 통해서 새겨졌다. 하지만 지난 4월 남북 예술 합동 공연을 마친 우리 공연단의 구성원 가운데 그가 있었다는 것도 기억에 값한다. 적지 않은 나이에 그는 커다란 일을 마다하지 않았고, 평양에 두 번째 가서 자신이 왜 큰 인물인가를 세상에 선명하게 보여주었다. 누군가 붙였는지 모르지만 언제부터인가 ‘가왕’이라고 불리는 남쪽 최고의 가수가 북쪽의 시민들에게 <꿈>을 들려주고 <친구여>를 건넬 때, 그 파장은 다른 여느 예술인들보다 훨씬 컸을 것이다. 일찍이 ‘나는 가수다’라는 프로그램이 있었지만, 그는 그야말로 “나는 가수다”라고 가장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우리 나라의 으뜸 사례가 아닌가.

위안의 미학

조용필의 흡인력은 어디에 그 비밀이 있을까. 말할 것도 없이 그만의 가창력, 무대 매너, 정확한 가사 전달력, 다양한 장르 수용 능력, 노래마다 달라지는 해석력 등을 꼽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조용필의 노래를 생각할 때마다 한 가지 이채로운 것은, 1970~80년대에 대중들의 인기를 얻은 가수들의 노래에서 간혹 발견되는 이른바 ‘메시지’가 그의 노래에는 없다는 점이다. 그는 신중현, 김민기, 송창식, 한대수, 정태춘, 하덕규 등이 간혹 들려주었던 시대적 질고에 대한 정치적 메시지를 전혀 노래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한 오백 년>이나 <강원도 아리랑>처럼 고전적으로 가거나, <고추잠자리>처럼 은유적으로 가거나, <친구여>처럼 원형적으로 가거나, <킬리만자로의 표범>처럼 인생론적으로 가거나, <꿈>처럼 동시대의 현실을 노래하지만 가장 감각적인 공감 형식으로 갔을 뿐이다. 물론 <여행을 떠나요>처럼 신나는 노래나 <미워 미워 미워>나 <그 겨울의 찻집> 같은 사랑 노래가 조용필 인기 비밀의 근원적 저류(底流)를 형성하고 있다는 점은 말할 것도 없으리라. 나는 이 모든 것을 ‘위안의 미학’이라고 명명하고 싶다. 그의 노래를 통해 우리는 희열이나 분노 대신 슬픔을 통한 위안을 끝없이 얻지 않았는가.

또 하나, 바로 전시대의 인기가수였던 남진이나 나훈아와 비교해볼 때, 조용필은 외관에서 그들보다 훨씬 왜소하거나 화려하지 않다는 점을 이야기할 수 있다. 당시는 전두환이라는 비정통적 빅브라더가 초국가적 지배를 하고 있을 때인지라, 사람들은 오히려 그 역상(counter image)으로서 자신들처럼 작고 평범하고 친근한 가수들을 좋아했다. 1980년대 내내 전영록, 이용, 구창모, 이명훈, 박남정, 변진섭, 신승훈 등으로 인기가수의 계보가 이어진 측면도 이를 뒷받침한다. 그 점에서 조용필은 모두에게 ‘오빠’일 수 있었다. 그렇게 친근한 ‘오빠’가 들려준 ‘위안의 미학’이 50년을 흘러 여기까지 와 있다.

그가 음악 활동을 시작한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는 당연히 내 기억으로 재현할 방법이 없다. 다만 나로서는 수많은 문헌들을 통해 그가 어떻게 음악계에 진출하였고 자신을 펼쳐갔는지를 알 수 있을 뿐인데, 그 이야기는 그의 노래를 이야기해가면서 그때그때 구체적 전거를 들어 곁들이기로 하자. 어쨌든 이 기획은 조용필을 재현하고 해석해가는 데 대부분 사사로운 기억에 의존하려고 한다. 객관적 자료는 철저한 정확성을 기하되, 조금씩 있을 수밖에 없는 기억의 낙차를 감안하면서 이야기를 이어가려 한다. 그때 비로소 ‘시인 조용필’을 말하고자 했던 30년 저쪽의 뜻이 조금은 드러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기대해본다. 오늘밤에는, 코인 노래방에 가서 <못찾겠다 꾀꼬리>와 <바람이 전하는 말>을 목청껏 부르리라.

유성호  1964년 경기 여주에서 태어나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문학박사)했다. 《서울신문》 신춘문예(문학평론 부문)로 등단한 후 한국문단의 주요한 비평가로 활동해왔다. 저서로 『한국 현대시의 형상과 논리』 『상징의 숲을 가로질러』 『침묵의 파문』 『한국 시의 과잉과 결핍』 『현대시 교육론』 『문학 이야기』 『근대시의 모더니티와 종교적 상상력』 『움직이는 기억의 풍경들』 『정격과 역진의 정형 미학』 등이 있다. 대산창작기금, 김달진문학상, 유심작품상, 편운문학상, 현대불교문학상, 팔봉비평문학상 등을 수상했으며, 《쿨투라》 《시작》 《대산문화》 《문학의오늘》 등의 편집위원을 역임했다. 대중서사학회 회장, 동아시아문화연구소 소장을 지냈으며, 현재 본지 주간으로 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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