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꿈 이야기
[꿈] 꿈 이야기
  • 김시무(영화평론가)
  • 승인 2022.12.30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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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사와 아키라 〈꿈〉 스틸컷
구로사와 아키라 〈꿈〉 스틸컷

꿈을 소재로 한 영화들은 무척 많다. 하지만 그중에서 대표적인 꿈 이야기를 꼽자면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이 1990년에 만든 〈꿈夢〉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는 모두 여덟 편의 에피소드로 되어있는데, 1화 ‘여우비’는 소년의 꿈 이야기로 시작한다. 맑게 갠 날 갑자기 소낙비가 내리고 소년은 어디론가 달려가는데, 아름다운 꽃들이 만발한 숲속이다. 일단의 가면을 쓴 사람들이 기이한 포즈로 행진을 한다. 이를 숨어서 지켜보던 소년은 자기가 본 장면을 엄마한테 얘기해주지만, 엄마는 단도短刀 한 자루를 내주면서 사죄하라고 숲으로 돌려보낸다. 여우가 시집가는 장면을 훔쳐본 죄라는 것.

2화 ‘복숭아 과수원’에서도 역시 그 소년이 등장한다. 누나가 친구 네 명과 다과를 들며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소년의 눈에는 모두 여섯 명으로 보인다. 그들 중에 모르는 소녀 하나가 끼어든 것인데, 소년의 눈에만 보인다. 소년은 그 소녀가 달아나자 뒤를 쫓는데, 드넓은 복숭아밭이 나온다. 복사꽃이 온 사방으로 흩날리는 가운데, 일단의 사람들이 나타나서 소년 가족의 행보를 꾸짖는다. 그들은 나무들의 정령이었고, 복숭아나무들을 함부로 벤 책임을 묻고 있었던 것이다. 소년이 눈물로 사죄謝罪하자, 정령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린다. 일장춘몽一場春夢이다.

3화는 ‘강한 눈보라’인데, 강풍이 몰아치는 가운데, 4명의 등반객이 캠프를 찾아 사투를 벌인다. 그들은 아무리 애를 써도 한 발자국도 더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눈에 파묻혀 동사하기 직전 누군가 그들에게 다가오는데, 산발散髮의 여인이었다. 그녀는 리더에게 은빛 찬란한 이불을 덮어주면서 “눈은 따뜻하고, 얼음은 뜨겁다.”고 속삭인다. 그러니 아무 염려 말고 푹 잠을 자라는 주문이었다. 비몽사몽하던 남자는 그 여인의 유혹을 간신히 물리치고 정신을 차린다. 그리고 잠에 빠져든 동료들을 깨워서 마침내 캠프에 도착하는 데 성공한다.

구로사와 아키라 〈꿈〉 스틸컷
구로사와 아키라 〈꿈〉 스틸컷

4화 ‘터널’은 전쟁에서 패배한 군인들의 이야기다. 포로였다 풀려난 소대장이 귀향길에 나선다. 그가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여 나오는데, 한 병사가 그를 쫓아 와 하소연한다. 자기도 고향에 가서 부모님을 만나고 싶다고. 하지만 소대장이 봤을 때 그는 자신이 이미 죽은 줄 모르고 구천을 떠도는 귀신이었다. 소대장은 그를 달래서 저세상으로 돌려보내는데, 이번에는 소대원 전원이 그에게 다가와 작전을 무사히 마쳤다고 보고를 하는 게 아닌가? 이에 그는 소대원이 전멸하고 자신만 포로로 잡혔다는 사실을 새삼 상기시키고, 그들에게 저세상으로 가라고 명령한다. 홀로 남아 비통해하는 그에게 이번에는 몸에 폭탄을 장착한 맹견 한 마리가 그에게 위협적으로 달려든다.

5화 ‘까마귀’는 평소 반 고흐를 추앙하던 한 화가가 반 고흐의 작품을 감상하다가 그림 속으로 빨려 들어가 결국 꿈에 그리던 반 고흐와 만나 대화를 나눈다는 얘기다. 화가는 〈아를의 랑글루아 다리〉를 건너가 〈일몰: 아를 근처 밀밭〉을 통과하여 태양을 그리고 있던 반 고흐와 극적으로 조우한다. 반 고흐는 그 화가에게 기관차와도 같은 추동력으로 작품활동에 임하라는 충고를 해준다. 어느덧 반 고흐는 다시 사라지고, 그의 그림 속에서 헤매던 화가는 〈까마귀가 나는 밀밭〉에 이르러 숱한 까마귀들에 에워싸여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화가의 태몽胎夢이랄까?

구로사와 아키라 〈꿈〉 스틸컷
구로사와 아키라 〈꿈〉 스틸컷

6화 ‘붉은 후지산’은 후지산의 화산분출로 인하여 원자력 발전소가 파괴되고, 그 여파로 플루토늄-239와 세슘-137이 유출되어, 일본 전역이 초토화된다는 내용인데, 그야말로 악몽惡夢이 아닐 수 없다.

7화 ‘울부짖는 귀신’은 방사능 오염 이후의 상황을 그리고 있다. 운무雲霧가 짙게 깔린 허허벌판을 걷고 있던 한 나그네 앞에 낯선 남자가 나타나는데, 그는 물과 공기의 오염으로 뿔 달린 귀신으로 전락한 농부였다. 그는 나그네에게 한때 이곳은 아름다운 꽃들이 만발한 낙원이었지만, 지금은 방사능으로 기형적으로 커진 민들레들로 무성한 지옥의 땅이 되었다고 절규한다. 이러한 설정은 2011년 동일본 대지진 여파로 후쿠시마 원전이 폭발하고, 그때 누출된 방사능 오염으로 일부 식물들이 기형적인 모습으로 발견된 사례를 선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눈여겨 볼만 한다. 예지몽豫知夢이다.

8화는 ‘물레방아 마을’인데, 문명의 이기利器의 도움 없이 그야말로 자연 친화적으로 살아가는 시골 사람들의 이야기다. 한 여행객이 우연히 찾아든 이 마을에는 온통 물레방아들로 가득한데, 그가 만난 할아버지는 103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물레방아를 수리하고 있다. 할아버지는 여행객에게 맑은 공기와 맑은 물이 이 마을 사람들의 장수비결이라고 설명해준다. 마침 99세의 할머니가 천수天壽를 누리고 사망하자, 마을 사람들은 마치 축제라도 하듯이 장례식을 치러준다.

구로사와 아키라 〈꿈〉 스틸컷
구로사와 아키라 〈꿈〉 스틸컷

인천공항에 도착하니 여객기가 아닌 거대한 수송기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비행기는 특이하게도 몸체가 아닌 좌우 양 날개 아래로 승객을 태우게 되어 있었다. 비행기가 이륙하면서 나는 경악하고 말았다. 바닥이 훤히 뚫려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의, 아니 하단실종이랄까? 그래서 승객들은 마치 360도 회전놀이기구에 매달린 모양새가 되었다. 비행기는 아주 저공으로 홍해를 가르듯이 날아올랐다. 승객들은 온몸으로 물보라와 바람을 맞아야 했다. 여기저기 환호 섞인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런데 갑자기 저 앞에서 또 한 대의 수송기가 우리 쪽을 향해 날아오는 게 보였다. 동체가 시시각각 커져갔다. 이윽고 두 비행기는 서로를 애무하듯이 스쳐 지나쳤다. 몸을 새우처럼 웅크리고 있던 승객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윽고 비행기가 도심으로 진입했다. 마천루 사이를 부딪칠 듯 곡예비행을 하던 우리 비행기는 활주로에 안착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미루었던 해외여행을 계묘년에는 꼭 가고 싶다.

 


김시무 영화평론가. 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와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학과를 거쳐 동국대학교 대학원 영화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장호영화연구회’ 회장이다. 2015∼2016년 한국영화학회 회장, 2015∼201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심사위원을 지냈다. 1997년 제2회 PAF비평상(영화평론부문)을 수상했다. 저서로 『스타 페르소나』 『홍상수의 인간희극』 『Korean Film Directors: Lee Jang-ho』 『영화예술의 옹호』 등이 있고, 역서로 『문화연구를 위한 현대 사상가 50』 『영화이론의 개념들』 『영화의 해부』 등이 있다.

 


* 《쿨투라》 2023년 1월호(통권 103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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