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수미와 '함께 보는 미술'] 비판적 사유의 미술: 윤동천의 경우
[강수미와 '함께 보는 미술'] 비판적 사유의 미술: 윤동천의 경우
  • 강수미(미학. 미술비평. 동덕여자대학교 교수)
  • 승인 2023.01.03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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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천, 〈리얼리티 – 핫&쿨: 블랙핑크/우크라시아/BTS/기후위기〉, 2022

생각하는, 이해하는 그림

블랙과 핑크로 된 긴 직사각형, 파랑과 노랑의 짧은 사각형, 흰색과 파랑과 빨강으로 3단 구성된 사각형, ‘BTS’ 글자가 써진 군복 무늬 천, 바다 위 빙산 풍경. 눈앞에 이렇게 다섯 개 화면이 가로 775.6cm 크기로, 한 치의 틈 없이, 줄줄이 붙어있는 미술작품이 있다. 자, 여러분이라면 이 작품을 어떻게 감상할 것인가? 다양한 색 면이 연속한 만큼 미니멀리즘 스타일이 보인다. 군복 패턴은 얼핏 미국 추상표현주의 화가 클리포드 스틸Clyfford Still의 그림 같기도 하다. 거대한 빙하의 대자연은 19세기 독일 낭만주의 화가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의 ‘숭고회화’ 계열로 볼 수 있을까. 그런데 이 작품의 제목은 〈리얼리티 – 핫&쿨: 블랙핑크/우크라시아/BTS/기후위기〉이다. 작품명에 이미 시사적인 내용이 들어있고, 명시적으로 규정하는 사항과 본래의 이름을 비트는 조어造語가 읽힌다. 때문에 이 작품을 미술사의 특정 유파나 시각적 양식style에 대입해서 보는 감상법은 맥락상 아귀가 안 맞는다. 말하자면 눈으로 보이는 이미지에 감각적으로 반응하거나 즉자적인 느낌을 즐기기에는 해당 작품에 어떤 의미가 뚜렷이 내포돼 있고 감상자에게 독해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윤동천, 〈울리지 않는 신문고〉, powder coated frame, spandex, drumstick, 2022.

이해와 설득력이 감상의 포인트인 미술이 있다. 사람들이 통상 작품을 감상할 때 감각적으로 느끼고, 눈과 마음으로 즐기면 된다고 여겨왔던 것과는 달리 말이다. 예컨대 시각적으로 아름다운 작품, 미적aesthetic으로 경험하기에 조형적 가치가 있는 작품, 미술사의 전통에 비춰볼 때 계보가 있으면서도 새로운 양식 실험이 돋보이는 작품 등등. 이처럼 시각성, 조형성, 유파, 양식은 미술을 정치나 과학 같은 사회 내 타 분야와 구별 짓는 근거, 특히 ‘순수미술’의 위치를 정당화하는 유미주의 미학의 원리였다. 그런 관습에 따르자면, 미술작품을 책 읽듯이 한다거나 두뇌게임 하듯 감상하는 일은 어색하고 불편해 보인다. 그런데 현대미술의 실상은 한 세기도 훨씬 전부터 이미 망막의 쾌락을 넘어섰다. ‘눈속임trompe l’oeil’ 또는 ‘그림 같은picturesque’ 재현의 향유에서 벗어나 지적 판단과 텍스트성을 내포한 미술이 곧 아방가르드 한 것이다. 또 사회 내부 여러 이질적 주체/주제를 개입시켜 논쟁적인 담론을 촉발시키는 비판적 시각예술과 대중의 예술 참여 쪽이 더욱 현대적인 것이다. 이런 판에서 미술가는 자신의 눈과 손을 쓰는 만큼이나 다양한 유형의 논리를 구성하고 판단을 가시화하는 데 능해야 한다. 그 일은 특히 예술의 언어와 일상의 장치 및 오브제를 이미지 표면으로 적절히 직조해내고, 매체를 기민하고 복합적으로 구사하는 용병술을 필요로 한다.

윤동천, 〈쌍-댓구〉, 갤러리 시몬 전시 전경, 2022. 사진: 강수미.

윤동천과 예술과 삶

한국 미술계에서는 윤동천 작가가 대표적이다. 서두에 예시한 〈리얼리티 – 핫&쿨: 블랙핑크/우크라시아/BTS/기후위기〉는 작가의 2022년 최근작이고, 갤러리 시몬에서 가진 개인전 《쌍-댓구》(2022. 10. 20. - 12. 21.)에서 첫선을 보였다. 앞서 썼듯이 이 작품은 관객이 시각만이 아니라 생각을 해가며 독해할 의미를 지니고 있다. 작품이 제작된 때와 전시 시기 또한 그 해석의 열쇠가 된다. 요컨대 시의성 있는 미술, 현실성을 기반으로 한 미술이다. 2022년 초 정말로 일어날까 싶었지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전쟁이 발발했다. K-Pop 걸 그룹 블랙핑크는 글로벌 팬덤을 구축함으로써 그룹명만큼 명실상부하게 여성적인 것(핑크)과 강한 것(블랙)이라는 편견의 혼합을 이뤄냈다. 초 절정의 인기와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보이 그룹 BTS는 원치 않았더라도 한 해 내내 ‘군복무 면제’ 이슈에 붙들려있었고 그 이슈가 정치적으로 전용되는 일을 겪었다. 그리고 기후위기는 말할 필요도 없이 오늘을 사는 우리의 당면한 현실이자 미래 세대에게는 공포의 유산일 것이다. 이러한 나의 해석이 정확히 윤동천 작가가 〈리얼리티…〉 작품에 새기고자 하고 사람들이 읽기를 희망한 메시지는 아닐지 모른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미술에서 유일무이한 의미만을 추구하지도, 보는 이에게 작가의 정답을 강요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윤동천은 순수미술의 이념에서 벗어나, 삶으로부터 예술이 나오고 예술을 통해 삶의 부정성이 지양될 수 있다는 입장에서 작업한다. 그러니 작품 해석의 근간과 범위가 무한정 열려있거나 무방비하게 풀어져있다고 할 수는 없다.

윤동천, 〈그림의 힘〉, 브론즈, 1998.

윤동천은 1980년대 중반부터 2023년 현재까지 근 40여 년 간 회화, 드로잉, 판화, 사진, 영상, 설치, 조각 작업을 해오고 있다. 어찌 보면 자신의 포트폴리오에 다양한 장르 작업을 구비하는 요즘의 다원예술가 같다. 혹은 자유로운 영혼이 이끄는 대로 예술 표현을 섭렵해온 풍운아거나. 하지만 윤동천은 다원예술의 현란함 대신 “나는 그림의 ‘힘’을 믿는다.”(〈그림의 힘〉, 1998)를 브론즈 작품으로 새기는 모더니스트다(하지만 이때 모더니스트는 예술지상주의자가 아니라, 예술이 “‘생각의 뿌리’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킨다고 믿는 전위주의자다). 그는 낭만적 예술관에 심취하기에는 이성의 끈을 놓을 수 없는 사고력 덕분에 미술가 이력 내내 비판적인 주장을 담은 미술을 수행해왔다. 그래서 여러 조형 형식과 장르로 구현되어왔다 하더라도, 윤동천의 미술은 본인만의 주제의식(“예술을 통해 지금, 여기, 우리의 삶을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으면 하는 바람”, 〈아름다움의 산실〉, 2017)과 개념(“생각하는 그림”, 2014)에 입각한 표현법을 취사선택한 결과로 보아야 한다. 작가는 그렇게 함으로써 오늘의 우리가 어느 정도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 다원적인 언어와 복합적인 표상의 미술을 훨씬 이르게 구현할 수 있었다. 요컨대 윤동천은 한국 현대미술 내부에 드물게 존재하는 비판적 사유의 미술을 견인한 당사자이며 그 미술 내력의 현재형이다.

윤동천, 〈경읽기〉, mixed media on canvas, 2022.

용기容器-용기勇氣

윤동천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직을 30여 년 수행했다. 그 무거운 역할을 퇴임하며 연 개인전 《산만의 궤적》(서울대학교미술관, 2022. 6. 2. - 6. 19.)과 이어 갤러리 시몬 개인전 《쌍-댓구》에서 윤동천의 미학이 종합적으로 나타났다. 인식할 내용이 잠재한 미술, 비판적 사유의 미술이 그것이다. 지적인 힘과 그림의 힘을 합성함으로써 그러한 미술에 이른 만큼 윤동천은 글도 명쾌하다. 아래 인용문은 《쌍-댓구》도록에 실린 글 일부인데, 슬슬 읽히지만 날카롭다.

“요강에 사탕을 담아 먹기를 권하면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다. 그 요강이 아무리 사기로 잘 만들어졌어도 말이다. 하지만 서양 사람들에게 요강에 사탕을 담아 권하면 스스럼없이 잘도 먹는다. 그들에게 요강은 단지 잘 만들어진 용기이기 때문이다.”(윤동천, 「《쌍-댓구》 전시에 부쳐」 중)

여기서 핵심은 요강의 정체와 용도를 이미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 간의 차이다. 그리고 그 앎과 무지 사이에는 강력한 편견이 작동한다는 사실이다. 요강을 하찮은 물건으로 보는 시선, 거기에 먹을 것을 담아낸다면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는 생각은 인식의 편견만도 감각의 편견만도 아니다. 인식과 감각이 섞이며 만들어낸 편견이다. 이를테면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의 저자 메리 앤 스타니스제프스키Mary Anne Staniszewski가 “선입견의 지평horizon of prejudice”이라 말한 맥락에서 우리가 [서양] 미술의 역사를 교육받으며 부지불식간에 형성한 미학적/감각 지각적 편견이다. 윤동천은 요강을 아름다운 그릇으로 보는 “서양 사람들”을 편들고 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그 사람들 또한 ‘순수미술’이라는 예술이념 용기容器를 만들어 ‘이것은 미술이고, 저것은 미천한 사물’이라는 선입견의 지평을 동아시아에까지 퍼트렸다. 이렇게 보면 윤동천이 지적하고 있는 면모는 어느 한쪽이 아니라 상대성의 차원, 서로 댓구를 이루는 요소들 각각의 한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앎은 어떤 경우 윤동천의 〈경읽기〉(2022)처럼 눈에 보이는 단순한 미학(작품 제목처럼 소의 귀를 화면 가득 그린 그림)의 유희조차 놓친다. 또 무지는 그의 설치작품 〈울리지 않는 신문고〉(2022)가 암시하듯 권리가 있어도 자기표현의 마지노선까지 방기한다. 그러니 둘의 합이 중요하다. 혹은 두 극極의 긴장이 필요하다. 비판적 사유가 직접적 말과 글 대신 조형예술의 침묵과 형상언어로 합을 이뤄, 혹은 긴장을 만들며 세상에 드러날 때 그것은 지각경험의 구조 전체를 흔든다. 사전은 ‘용기勇氣’를 “씩씩하고 굳센 기운. 또는 사물을 겁내지 않는 기개”로 정의하고 있다. 윤동천은 아마 미술을 비판하는 용기를 미술이라는 용기와 쌍으로 엮음으로써 구조의 균열에 계속 설 것이다.

 


강수미 미학. 미술평론. 동덕여자대학교 예술대학 회화과 부교수. 『다공예술』, 『아이스테시스: 발터 벤야민과 사유하는 미학』 등 다수의 저서와 논문 발표. 주요 연구 분야는 동시대 문화예술 분석, 현대미술 비평, 예술과 인공지능(Art+AI) 이론, 공공예술 프로젝트 기획 및 비평. 현재 한국연구재단 전문위원, 국립현대미술관 운영심의위원, 《한국미학예술학회》 편집위원, 《쿨투라》 편집위원.

 

* 《쿨투라》 2023년 1월호(통권 103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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