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용 리뷰] 경계를 지우는 춤: 김재덕과 김설진의 ‘브레이크 스루’
[무용 리뷰] 경계를 지우는 춤: 김재덕과 김설진의 ‘브레이크 스루’
  • 임수진(무용평론가)
  • 승인 2023.01.03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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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덕 〈마당:Pull in〉 ⓒLG아트센터_Studio AL

지난해 10월, LG아트센터는 2000년부터 시작된 강남구 역삼동에서의 22년 역사의 막을 내리고 강서구 마곡에서 세계적인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LG 아트센터 서울’로 다시 태어났다. 이를 기념하여 10월 13일 부터 12월 18일까지 조성진과 런던심포니오케스트라, 아크람 칸, 요안 브루주아, 알 디 메올라, 파보 예르비와 도이치캄머필하모닉, 이날치, 이자람, 이은결, 박정현 등 국내외 우수 아티스트들의 15편의 공연을 선보이는 개관페스티벌을 성공적으로 개최했다. 국내 현대무용가 중 가장 ‘트랜디’ 하면서도 안무적 완성도와 예술성을 기반으로 탄탄한 중견의 길로 나아가고 있는 김재덕과 김설진은 ‘브레이크 스루breakthrough’ 라는 무대로 페스티벌에 참여, 각각 작품 〈마당:Pull in〉과 〈달의 얼굴〉을 선보였다.

김재덕〈마당:Pull in〉 ⓒLG아트센터_Studio AL

김재덕과 엠비크루의 〈마당:Pull in〉

빈 무대 위 무용수 한명이 등장한다. 편안한 티셔츠와 바지, 운동화 차림의 그가 천천히 비보잉을 시작한다. 음악 없이 고요한 공연장이 그의 숨소리와 발 구르는 소리로 서서히 채워진다. 조명이 만든 긴 직선의 빛을 장벽 삼아 묵묵히 춤추다 퇴장한다. 이어 등장한 무용수 역시 적막한 무대를 그의 호흡과 몸짓으로 채운다. 〈마당:Pull in〉은 엠비크루M.B Crew의 일곱 비보이들이 차례로 솔로 춤을 선보이며 전개된다.

안무자 김재덕은 짧은 시간 동안 각자 지닌 기술들을 파편적으로 선보이는 비보잉 쇼다운을 하나의 연속적인 퍼포먼스로 구성했다. 화려한 음악과 조명을 거둬내고, 각자의 기술들을 단발적으로 뽐내는 ‘쇼’적인 구성을 없애자 비보이 테크닉들의 예술적 몸짓들이 서서히 드러났다. 특히 춤의 박자와 리듬을 구성하는 음악이 제거되자 춤의 외형 보다 춤을 추는 자의 호흡, 스텝, 그리고 그를 움직이는 내면에 집중하게 되었다.

〈마당:Pull in〉은 2020년 초연한 〈마당〉에 전신을 둔다. 엠비크루와 함께 스트리트댄스와 현대무용의 협업을 시도한 이 작품은 이후 인쇄소 대동문화사에서의 장소특정형 퍼포먼스interactive performance 〈마당:인터렉션〉(2011)으로, 그리고 2022년 10월 대극장 무대에서의 작품으로 발전하였다. 공연이 거리에서 극장 안으로 들어오는 경우, 극장이라는 제한된 공간을 무대 세팅이나 음악, 조명 등을 통해 극복하려는 시도를 많이 하게 되는데 김재덕은 오히려 무대장치들을 모두 거둬내고 무용수만 남겨뒀다. 불특정다수를 대상으로 한 열린 공간인 ‘마당’, 그리고 거리의 춤은 제한된 관객들과의 소통으로 좁혀지며, 고요함 속에서 새로운 미학을 발현했다.

1,300석 규모의 LG시그니처홀을 오직 무용수의 호흡으로 채우고자 한 이 대담한 시도가 객석의 모든 관객들에게 동일한 울림을 선사했는지는 장담할 수 없다. 필자의 경우 중앙에서 조금 뒤쪽에 앉았음에도 광활한 공연장 안의 적막 속에서 무대 위의 퍼포머에게 집중하기 수월한 편은 아니었고, 비교적 낮은 객석 단차에 의해 시야 마저도 충분히 확보되지 않았다. 텅 빈 무대를 오직 퍼포머의 움직임과 호흡으로 채우는 이 연출은 소극장 혹은 중극장 규모의 공간에서 관객에게 더욱 충만한 경험을 선사할 수 있었을 거라는 아쉬움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연은 하이라이트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관객들을 성공적으로 끌어 나간듯 하다. 뒤쪽 공간이 열리며 확장된 무대에 선 일곱 댄서들이 관객을 향해 내달린 후 각자의 시그니처 포즈를 취하자 터져 나온 관객들의 환호가 이를 증명한다. 주로 TV 프로그램에서 즉흥성을 기반으로 한 프리스타일 배틀 형식으로 대중을 만나던 스트리트 댄스가 안무와 연출이 개입한 극장 무대 위의 퍼포먼스로서 재해석 되며 흥미와 즐거움을 넘어서는 감동으로 관객들을 사로잡았다.

김설진 〈달의 얼굴〉 ⓒLG아트센터_Studio AL

김설진의 〈달의 얼굴〉

〈달의 얼굴〉은 모두 다른 개성의 일곱 무용수들의 춤에 관한 이야기이다. 한 무대 위에 선 무용수들은 춤이 자신의 삶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게 되기까지의 서사를 풀어낸다. 각기 다른 몸의 외형과 움직임을 기반으로 각자의 이야기를 그려낸다.

프로그램북에는 각 무용수들에게 춤이 갖는 의미가 적혀 있다. 김봉수는 “몸으로 말하는 생각과 마음”, 서일영은 “이번 생은만 추는 걸로”, 배소미는 “아는 맛인데도 자꾸 먹게되는”, 김정선은 “일기장”, 황재윤은 “열린 결말”, 장효재는 “같이 태어나고 같이 죽기”, 채현석은 “내 생각의 실체화”. 일곱 무용수들은 춤에 관한 각자의 이야기를 곳곳에 풀어 놓았다. 이들은 때로는 실타래처럼 엉키기도, 하나의 덩어리가 되기도, 다시 춤추는 개개인으로 존재한다. 공연을 이끄는 목소리의 존재가 이들의 파편적인 이야기를 하나로 묶어낸다.

그간의 김설진의 안무는 그가 무용수로 몸담았던 벨기에 무용단 피핑 톰Peeping Tom의 색을 많이 닮았다. 하나의 서사를 기반으로 안무, 음악, 무대 등이 총체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종합예술적인 공연이 피핑 톰의 김설진의 무대였다. 반면 〈달의 얼굴〉에서 김설진은 무용수들에게 ‘나와 춤’이라는 공통된 주제를 던져준 후 한 발짝 뒤로 나와있다. 각자의 이야기를 자유롭게 풀어가는 과정이 곧 공연이 되었다. 프랑스 안무가 제롬벨Jerome Bel이 무용수의 이름을 딴 작품 〈베로니크 두아노Veronique Doisneau〉(2004), 〈이자벨 토레스Isabel Torres〉(2005), 〈세드리크 앙드리외Cedric andrieux〉(2009)를 통해 각각 베로니크와 이자벨, 세드리크의 진솔한 이야기를 무대 위에 올려놓았듯이, 김설진은 안무의 역할을 최소화 하고 김봉수, 서일영, 배소미, 김정선, 황재윤, 장효재, 채현석의 삶과 춤에 대한 이야기를 날 것 그대로 풀어놓았다.

김설진 〈달의 얼굴〉 ⓒLG아트센터_Studio AL

하나의 무대 연출 아래 정제되지 않은 움직임들을 통한 ‘춤’과 ‘삶’에 대한 이와 같은 탐색은 관객들에게 저마다 다른 경험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수행적이다. 춤을 추는 자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돌아 봤을 것이고, 춤에 낯선 자들은 신비롭고 흥미로운 댄서들의 몸과 생각, 스토리에 빠져들었을 테다. 공연의 마지막, 이제 이야기의 주인공을 관객들로 전환하는 듯, 무대의 경계를 넘어 객석까지 뻗어 나가는 조명 빛이 인상깊었다.

독특한 개성으로 춤의 경계를 허물고 현대무용의 범위를 넓히고 있는 김재덕과 김설진은 LG아트센터의 대극장 무대를 오로지 몸과 춤으로 채우고자 한 담대한 시도를 세련된 연출로 풀어내며 공연의 완성도를 높였다. 특히 다른 공연장들에 비해 무용을 전공하지 않은 일반 관객들이 상대적으로 많이 찾는 LG아트센터의 관객들에게 충만한 예술적 경험을 선사할 수 있는, 예술의 경계를 허물고 새로운 미학을 탐색하는 동시대적 안무 역량을 증명한 무대였다.


임수진 퍼포먼스연구 및 문화연구의 방법론을 토대로 무용을 비롯한 다양한 공연예술에 대해 연구, 글을 쓰며 성신여자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에서 강의하고 있다. 한양대에서 무용을 전공하고 뉴욕대(NYU)에서 퍼포먼스연구(performance studies) 석사, 성균관대에서 예술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무용월간지 《몸》 편집장을 역임했다.

 

* 《쿨투라》 2023년 1월호(통권 103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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