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회 쿨투라 신인상 연극평론 부문 당선작] 대중극으로서의 한 가능성: 연극 〈그대를 사랑합니다〉에 대하여
[제2회 쿨투라 신인상 연극평론 부문 당선작] 대중극으로서의 한 가능성: 연극 〈그대를 사랑합니다〉에 대하여
  • 정갑준
  • 승인 2009.04.04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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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이라는 말에는 대체로 변화가 완만하고 지루한 일들이 그 안에서 반복된다는 의미가 숨어 있다. 하지만 '일상'으로 포괄할 수 있는 우리의 생활에서도 그 시작과 끝은 어김없이 존재한다. 변화가 없을 것이라 생각되는 일상 속에서 일렁이는 크고 작은 파문들이 즐거움이나 슬픔 같은 감각적 경험들을 가져오는 것이다. 이러한 일상 속의 크고 작은 변화들을 잘 잡아내는 연출가가 바로 위성신이다. 그는 〈사랑에 관한 다섯 개의 소묘〉와 〈늙은 부부 이야기〉를 통해 일상 속의 즐거움과 슬픔을 관객들에게 잘 전달한 바 있다. 그런 그가 가슴 따뜻한 순정만화를 그리는 강풀과 만나 만들어 낸 연극이 바로 〈그대를 사랑합니다〉이다.

원작 순정만화 「그대를 사랑합니다」가 너무나 유명하여 각색을 한 오은희가 조금 소외된 느낌은 있지만, 그녀의 극본 역시 원작의 감동을 잘 소화한 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강태기를 비롯한 노련한 연기자들이 원작의 감동을 보완해 주는 연극이 바로 〈그대를 사랑합니다〉라 할 것이다.

 

1. 정신적 외상trauma을 지닌 인물들

〈그대를 사랑합니다〉는 모두 네 명의 노인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김만석, 송이뿐, 장군봉, 조순이가 그들이다. 이들은 모두 70이 넘은 노경老境에 있고, 인생의 황혼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7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겪어 온 일들은 말로 표현하기에는 너무나도 벅찰 정도로 많이 쌓여 있다. 그 중에서 그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정신적 외상trauma이 제각각 있다. 그 상처는 그들의 생애를 가로질러 통증을 수반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그들 삶의 역설적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김만석은 매일 새벽 오토바이로 우유 배달을 한다. 우유 배달은 아내가 위암으로 죽은 후에 시작한 일이다. 아내의 죽음은 그에게 잊혀 질 수 없는 정신적 충격이고 아픔이었다. 그는 아내와 결혼해서 그녀가 죽을 때까지, 그녀에게 따뜻하게 말 한 마디 건네 본 적이 없는 참담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 아내의 소중함을 모르고 살았고, 아내는 그저 자기 옆에 당연히 있는 존재로만 생각했다. 하지만 아내가 입원하자 이미 후회해도 너무 늦은 시간임을 알게되었고, 생애를 통해 처음으로 아내를 돌보던 그는 아내를 위해 무언가를 해주고 싶었다. 그때 아내는 그에게 우유를 먹고 싶다고 이야기했고, 그는 아내에게 우유를 사다 준 것이다.

하지만 우유는 일종의 유제품이라 위암에는 결코 좋은 음식이 아니었다. 그가 행하는 아내를 향한 마지막 따뜻함을 의사가 가로막고 나선 것이다. 결국 그는 아내에게 아무것도 해준 게 없다는 아픔만을 간직하게 되었고, 그것이 그를 우유 배달부로 만든 것이다. 아내에게 주지 못한 우유를 매일 필요한 사람들에게 배달함으로써, 죽은 아내에 대한 미안함을 대신하려 했던 것이다. 단 하루도 어김없이 같은 시간에 우유를 배달하는 그의 행위는 아내에 대한 죄책감을 씻는 일종의 속죄 의식ritual과 등가를 이루는 것이었다.

이러한 그의 죄책감은 송이뿐에게 사랑을 고백을 하는 장면에서도 나타난다. 아내에 대한 감당할 수 없는 죄책감은, 그녀를 '당신'이라고 부를 수 없게 만든다. '당신'이라는 말은 영원히 아내의 것일 뿐, 아내에게 죄를 지은 그는 새로운 사랑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아내에 대한 호칭을 그녀에게 부여할 수 없었다. 그래서 김만석은 "그대를 사랑합니다."라고 말을 건넨다. 순간 송이뿐은 그의 오랜 기억 속의 상처를 치유해 줄 수 있는 인물로 등장한다. 사랑을 잃은 아픔과 잘 해주지 못했던 후회를 그녀를 통해 극복할 가능성을 그가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무엇 하나 잘 해준 적이 없는, 잘 해준다는 의미를 몰랐던 그에게, 장군봉이 훌륭한 인생의 조력자로 나타난다. 그는 김만석이 생각할 때 매우 이상적인, 그래서 자신의 죄의식을 적나라하게 환기하는 그런 남편의 상像이었다. 그야말로 아내에게 헌신하고 잘 해주는 최적의 남편이었다. 김만석은 그 조력자의 조언에 따라 사랑하는 사람에게 최선을 다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원하는 대로 해주겠다는 결심은 결국 그녀를 수라리재로 데리고 가는 결과를 낳게 된다.

송이뿐의 과거는 상처의 연속이었으며 불행의 날들이었다. 그녀는 강원도 영월의 수라리재에서 어머니와 단둘이 살았다. 그녀의 어머니는 자식들의 이름은 아버지가 지어 주는 것이라며 그녀의 이름을 지어 주지 않고 그냥 "송 씨'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름 없는 이름인 '송 씨'처럼, 그녀는 의미 없는 삶을 그냥 살아왔을 뿐이다. 그렇게 우리는 그녀가 이름을 가지지 못했다는 것을 통해 그녀의 생의 상처를 유추할 수 있다. 또 하나는 자신과 함께 살던 어머니를 혼자 두고 동네 오빠와 서울로 야반도주를 해서 생긴 상처이다. 그 사람과 서울에 와 시작한 새로운 삶은 절망과 폭력의 굴레였다. 결국 그 남자는 자신을 버리고 떠났고, 그녀가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딸 때문이었다.

그런데 딸의 삶은 수라리재에서 살았던 그녀의 삶과 매우 비슷하다. 그녀 역시 자식의 이름은 아버지가 지어 주는 것으로 알고 있어서 딸의 이름은 없다. 그리고 이름을 지어 줄 아버지도 없다. 그녀의 딸은 열 살이 되기도 전에 장질부사에 걸려 세상을 뜨고 만 것이다. 딸을 제대로 키우지 못했다는 죄책감은 그녀에게 다시는 행복하게 살아서는 안 되는 것이라는 생각을 남긴다. 그만큼 딸의 죽음은 그녀에게 죽음으로 인한 이별의 아픔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가를 깨닫게 한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의 어머니를 홀로 남겨두고 떠난 것이 어머니에게 엄청난 큰 고통이었음을, 딸의 죽음과 함께 깨닫게 된다.

그러한 그녀 앞에 나타난 김만석은 이름 없이 살아온 그녀의 오랜 상처와 동네 오빠와의 그 지옥 같았던 삶을 심리적으로 보상해 주었다. 난생 처음으로 행복한 느낌을 가지게 해주었고, 잃어버렸던 움음을 찾게 해주었으며, '송이뿐'이라는 이름이 선명하게 박힌 주민등록증을 만들어 줌으로써 삶의 의미를 같이 재구성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그녀에게 '김만석'은 아버지이자 남편이 되었다. 하지만 그런 그도 해결할 수 없는 상처들이 있었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어머니에 대한 죄책감, 그리고 죽음을 통한 김만석과의 이별에 대한 불안감이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그와이 이별을 살아서 하는 것으로 택하고, 다시 수라리재로 어머니를 찾아 떠나게 된다.

장군봉과 조순이는 의가 좋은 부부다. 50년이 넘는 세월을 함께 살면서, 다른 부부들처럼 아이들 낳아 키우고 출가시키고 지금은 둘만 살고 있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부부다. 장군봉은 택시 기사였으며, 조순이는 평범한 주부였다. 그들은 남편이 돌아오면 아내는 남편의 흰머리를 뽑으며 수다를 늘어놓는 전형적 부부의 삶을 살아왔다. 이러한 생활에 일대 변화를 가져온 것이 아내의 치매이다. 치매에 걸린 아내를 돌보기 위해 남편은 집 가까이 있는 주차 관리 사무실에 갇히게 되고, 아내는 집안에 갇히게 된다. 치매에 워낙 집중하다 보니 남편은 아내가 위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한다. 설상가상으로 남편은 색약의 눈을 가지고 있어서 아내의 혈변을 알아보지 못한다. 50년을 넘게 함께 한 부부 생활의 마지막을 준비해야 할 시간이 다가온 것이다.

이처럼 네 명의 노인은 저마다의 상처를 가지고 있고 지금도 그 아픔을 지닌 채 살아간다. 그리고 네 명의 생활은 서로 긴밀하게 맞물려 잇다. 김만석은 우유 배달을 위해 이른 새벽에 그 낡아빠진 오토바이를 몰고 마을을 누빈다. 이것은 장군봉과 송이뿐의 하루 시작을 알리는 신호음이기도 하다. 오토바이의 시끄러운 소리는 하루의 시작일 뿐만 아니라, 이들의 인연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이 소리와 함께 이들의 하루 일상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것이다.

언뜻 보면 네 명의 노인들은 관객들에게 꽤 익숙하게 보인다. 그들은 지금 우리 현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들 역시 관객들처럼 지루한 일상을 살고 있으며, 변화를 기대하고 그 변화에 슬퍼하고 기뻐하는 장삼이사張三李四들이다. 이러한 인물들은 관객들에게 정서적으로 짙은 공감을 감염시킨다. 김만석의 '낡은 오토바이'는 그러한 정서적 공감을 더욱 확대시키는 소품으로 기능한다. '낡은 오토바이'는 바로 노경에 처해서 활력있는 일상을 살아가는 김만석의 삶과 유추적 등가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낡은 오토바이는 한 마디로 김만석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다. 언제 멈출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그때까지는 제 기능을 할 '낡은 오토바이', 그것은 좀 느리고 약해졌지만 그래도 같은 하늘 아래서 비슷한 일상을 살아가는 같은 노인들을 은유하는 매개물이다. 그들에게 이제 만남, 사랑, 헤어짐의 일상적 사건들이 일어나고, 관객들은 그 변화를 편안한 시선으로 지켜보게 된다.

 

2. 마지막을 준비하는 사람들

이 연극은, 노인들의 생활과 감정이 근본적으로 젊은이들의 그것과 큰 차이가 없음을 보여준다. 그들도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고, 그 일상에 일어나는 변화들로 인해 기뻐하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한다. 물론 어떤 변화들은 젊은 사람들에게 일상을 또 다른 일상으로 전환시키는 힘으로 작용하기도 하지만, 노인들에게는 다른 일상으로의 전환의 시간이 없을 수도 있다는  점에서 상처를 근본화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따라서 노인들은 변화에 대처하는 방식이 젊은 사람들과 같을 수 없다. 이러한 속성을 말해 주는 듯, 연극의 포스터와 팸플릿 그리고 원작 만화에는 이러한 구절들이 나온다.

"우리는 당장 죽어도 이상할 게 없는 나이였다."
"우리 나이에......, 지금 헤어지면 다시 볼 수 있을까?"

김만석에게 찾아온 근본적 변화인 송이뿐은 그에게 너무나도 소중한 사람이지만, 그에게는 여전히 죽은 아내에 대한 잔상殘像이 짙게 남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만석은 미래에 대해 적극적이고 긍정적이며 열정적인 사람이다. 그래서 김만석이 자신의 감정을 송이뿐에게 고백하는 말 "그대를 사랑합니다."를 통해 우리는 그가 미래에 대한 강한 희망 역시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당신'은 죽은 아내의 몫이고, 송이뿌에게는 '그대'라는 호칭을 부여할 수밖에 없는 것이 김만석이다.

그뿐만 아니라, 김만석이 장군봉을 부러워하는 이유도 바로 아내 때문이다. 자신은 아내가 죽을 때까지 말 한 번 따뜻하게 해주지 못했지만, 장군봉은 치매에 걸린 아내를 지극 정성으로 보살피고 있지 않은가. 이를 통해 김만석은 과거를 회상하며 자신은 왜 그러지 못했나 하고 후회한다. 그리고 김만석이 우연하게 만난 조순이를 잠시나마 보살피는 것 역시 그의 아내에 대한 기억을 다시 한 번 환기하는 역할을 한다. 우유를 먹고 싶어 하는 그녀를 벤치에 앉혀 놓고 가려다가 들리는 "같이 가"라는 소리가 김만석을 죽은 아내에 대한 회상에 잠기게 하는 것이다.

송이뿐에게 무엇이든 해주고 싶은 것, 그녀가 원하는 대로 해주고 싶은 것도 바로 아내에 대한 죄책감에서 비롯된다. 김만석이 고향에 가겠다는 송이뿐을 가로막고 서서 다시 한 번 "그대를 사랑합니다."라고 절규하는 장면도, 이제 아내에게 못해 주었던 것들을 해주려고 하는데 그 대상이 없어지려 하는 데서 오는 불안감을 반영한다. 하지만 아내를 보내고 난 후의 후회, 송이뿐을 사랑하기 시작하면서 한 결심, 사랑하는 그대가 원하는 대로 해주겠다는 결심 등으로 김만석은 직접 그 '그대'를 오토바이에 태우고 떠난다.

그렇게 송이뿐에게 김만석은, 김만석에게 송이뿐보다 더 큰 존재이고 더 큰 의미이다. 김만석에게 송이뿐은 '당신'이 아닌 '그대'지만, 송이뿐에게 김만석은 '그대'가 아닌 '당신'이다. 그는 그녀에게 생전 처음으로 행복을 느끼게 해준 '당신'인 것이다. 수라리재의 어머니를 제외하고 자신을 보살펴 준 유일한 사람이며, 글을 모르는 자신에게 연애편지를 처음 보낸 사람이고, 없는 생일을 만들어 주고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주고 머리핀을 선물로 사주고 자신에게 이름을 갖게 해주고 "그대를 사랑합니다."라고 외쳐 준 사람이다. 그가 있으므로 그녀는 밝게 웃고, 글을 배우고, 자신이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송이뿐이 그를 떠나려 한다. 그렇게 세상을 어렵고 힘들게만 살아온 그녀가 웃음과 행복을 가져다준 김만석을 떠나려 하는 것이다. 떠나지 말라며 절규하는 김만석 앞에서 그녀는 말한다.

"이 행복을 죽을 때까지 간직하고 싶어요."

그녀는 헤어진다면 죽음 때문일 거라고 생각한다. 장군봉 부부의 죽음이 그것을 깨우쳐주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자신의 달에 대한 생각……. 죽음으로 헤어지는 그 고통과 슬픔을 이제는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살아서 헤어진다면, 김만석과의 추억으로 언제나 웃을 수 있고 행복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10년이 되지 않는 세월이지만, 자식을 키우고 딸을 저 세상으로 보냄으로써 수라리재를 야반도주하고 난 후에 어머니가 느꼈을 그 고통도 알게 되었다. 송이뿐은 이제 돌아가야만 했던 것이다.

아내가 혈변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장군봉은 아내를 데리고 병원에 간다. 아내는 위암을 앓고 있었고, 이미 위암 말기까지 진행이 되어 있었다.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 할 때입니다."라는 의사의 말은 장군봉을 한없는 후회에 빠져들게 한다. 대문이 잠겨 있는 방안에서 겪었을 그 고통들을 생각하며, 자신은 김만석, 송이뿐과 함께 즐거워했던 일들을 후회한다. 장군봉은 50년을 넘게 같이 살아온 아내를 어떻게 보내야 하는가 하는 두려운 숙제를 부여받는다.

그때 그는 아내와 함께 길을 가기로 결정한다. 그는 김만석에게 보낸 처음이자 마지막 편지에서 "긴 세월 우리는 늘 함께 갈 거야."라고 자신의 심경을 밝힌다. 아내를 위해 그리고 지금까지 긴 세월을 함께 갈 거야."라고 자신의 심경을 밝힌다. 아내를 위해 그리고 지금까지 긴 세월을 함께 해온 것처럼 앞으로의 길을 함께 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장군봉이 정말 두려워한 것은 세상에 자기 혼자만 남겨진다는 것이다. 한 번도 혼자인 적이 없었던 그는 혼자인 삶을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아내가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나고 한 후 혼자 남겨질 것에 대한 공포는, 그를 그동안 보살펴 주고 사랑해주고 기다려 준 아내가 없는 세상을 의미 없게 바라보게 한다. 당연히 아내를 위한 길이었겠지만, 장군봉으로서는 자신을 위한 최선의 길을 선택한다. 이어지는 노부부의 동반 자살은 김만석이 떠나려 하는 송이뿐 앞을 가로막고 외치는 절규와 함께 극의 절정을 형성한다.

문틈을 청테이프로 붙이는 장군봉, 아무것도 모르고 장난치는 조순이, 그리고 수면제를 "사랑해"라는 말과 함께 서로 먹여 주는 장면은 이들의 50년 세월을 말해 주기에는 부족하지만, 그들의 애틋한 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기에는 충분한 것이다. 가스가 새어나오고 질식되어 가는 부부의 모습 위로 흐르는 장군봉 편지의 내레이션은 슬픔과 감동을 동시에 선사한다.

장군봉은 자신들의 죽음이 알려진다면 자식들이 슬퍼한 것을 알고 있었다. 또한 자신들의 자살이 세상에 알려진다면, 세상 사람들이 자식들을 손가락질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자기 인생의 유일한 친구인 김만석에게 자식과 세상이 이 일을 알지 못하도록 부탁하는 편지를 쓴다. 김만석은 이 일을 부탁할 수 있는 유일한 친구이기도 했지만, 자신이 죽음을 택한 것을 결국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김만석은 장군봉의 편지대로, 문에 붙어 있는 청테이프를 제거하고 세상과 자식들에게 이 일을 함구한다.

이들의 죽음은 김만석과 송이뿐에게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그들은 죽음으로써 이별을 택하지 않게 된다. 서로의 마음을 곱게 간직한 채, 항상 서로를 그리워하고 사랑하며 살아가기를 바란다. 송이뿐은 어머니가 계신 고향으로 떠나고, 김만석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다. 이제 그들은 조용히 끝을 기다릴 것이다.

 

3. 대중극으로서의 가능성

연극사학자이자 평론가인 서연호 교수는 자신의 토임 강연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한국 연극이 침체기를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그 가운데 하나는 한국 연극에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실험극도 없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대중극도 없다는 것이다.

이때 "진정한 의미에서의 대중극"이란 그 내용이 건전하고 재미있으며 누구라도 그 연극을 볼 수 있어서 가족들이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작품을 말한다. 이런 작품들은 레퍼토리화되어 있어서 어느 곳 어느 극장에 가면 볼 수 있다는 전제가 있게 된다. 잘 알려진 뮤지컬 〈난타〉, 〈사랑은 비를 타고〉와 이만희 원작의 〈용띠 위에 개띠〉의 경우는 전용 극장을 가지고 1년 내내 공연이 이루어진 작품들이다. 이처럼 한 극장에서 몇 작품들을 돌려 가면서 공연을 하거나, 몇 개의 극장으로 여러 작품을 1년 내내 공연하는 경우를 '레퍼토리 극장'이라 말한다. 이 작품들을 보면, 재미와 내용 자체가 건전하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젊은 관객층으 ㄹ대상으로 한다고 보아야 한다. 〈사랑은 비를 타고〉의 경우, 형제애를 그리고 잇기는 하지만, 음악이나 춤 들이 젊은 관객을 대상으로 한다는 것을 쉽게 느낄 수 있다. 그렇게 보면 진정한 대중극이라는 칭호를 붙이기에는 부족한 감이 없지 않다.

연극 〈그대를 사랑합니다〉는 네 명의 노인들의 삶과 사랑, 그리고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작품이다.노인들의 이야기를 통해 젊은 세대에게도 많은 생각 거리를 던져 준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넓은 관객층을 대상으로 한다. 젊은 사람들과 다른 삶을 살고 있지만, 그들도 일상을 살아가며 그 속에서 생기는 변화들에 슬퍼하고 기뻐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이 연극은 선명하게 보여준다. 다만 그들은 앞으로 살아가야 할 미래보다도 살아온 과거가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압도적으로 크기 때문에, 그 변화에 대처하는 방식이 젊은 사람들과는 다를 뿐이다. 그 점에서 〈그대를 사랑합니다〉는 그러한 변화를 두 가지 사거능로 관객들에게 보여준다.

하나는 '사랑'이고 다른 하나는 '죽음'이다. 이 연극의 등장인물들이 노인들이기 때문에 두 가지 사건이 생소하게 보일지는 모르겠지만, '사랑'과 '죽음'은 모든 예술 장르의 전통적 소재이다. 〈그대를 사랑합니다〉는 이러한 '사랑'과 '죽음'에 대처하는 노인들의 모습을 통해, 젊은 세대로 하여금 자신들의 모습을 되새기게 만든다. 그만큼 소재 면에서도 이 연극은 대중극이 가지고 있어야 할 요소를 두루 갖추고 있다.

노인들의 사랑 이야기지만, 그 '사랑'은 젊은 사람들 못지안헥 가슴을 뛰게 한다. 김만석이 송이뿐을 바라볼 때, 울리는 그의 심장 박동 소리는 스피커를 통해 관객에게 전달되지만, 그 효과는 더없이 충분하다. 욕만 잘하는 괴팍한 노인의 마음이 따뜻하고 순수할 수 있다는 공감에서 웃음도 자연스럽게 자아낸다. 주민등록증을 만들어 주고, 생일 케이크와 함께 축하 노래를 불러 주고, 오토바이를 타고 소풍을 가는 그들의 모습은 한 쌍의 연인으로 보아 충분하다. 이 커플이 연인의 사랑을 보여준다면, 장군봉과 조순이의 사랑은 부부의 사랑을 잘 보여준다. 치매에 걸린 아내를 극진히 보살피며 살아가는 남편, 치매에 걸리기는 했지만 남편에 대한 애틋한 사랑을 간직한 아내의 모습은 매우 정격적이다. 이혼이 많아지고 심지어 황혼 이혼도 늘어가고 있는 현실에서 이들의 사랑은 부부의 한 모범적 상을 보여준다.

조순이가 치매를 앓을 뿐 아니라 위암을 앓고 있으며 그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고 장군봉은 그녀의 마지막을 준비한다. 그리고 혼자 세상에 남게되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그는 결코 자기 혼자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하며, 아내와 같이 떠나가기로 결심한다. 그들의 장례식에서 사람들은 한 날 한 시에 부부가 세상을 저버린 것은 흔치 않은 일이며, 살만큼 살다가 가셨으니 '호상'이라고 말을 한다. 김만석은 그 말에 대해 혼자 욕을 한다.

"호상, 호상 하지 말란 말이야....... 이 미친 것들아....... 사람이 죽었는데......, 그게 어떻게 잘 죽은 거란 말이냐? 세상에 잘 죽는 게 어딨냐 말야! 노인네가 오래 살다가 죽으면 호상이야! 살 만큼 살았으니까 죽는 게 당연하다 이거야! 늙었으니까 그만 죽어야 한다 이거야! 노인네는 어떻게 죽어도 잘 죽은 거란 말이야......."

자식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당할까 봐 자살한 것을 숨기고 '호상'이라는 말로 슬픈 죽음을 위로 받게 된 이 장면은, 가슴 찡한 감동을 준다. 그리고 죽음을 스스로 택해야만 했던 사랑의 마음을 통해 관객들에게 많은 반성 계기를 부여하는 것이다.

연극 〈그대를 사랑합니다〉는, 이처럼 '사랑'과 '죽음'이라는 전통적 소재를 통해, 재미와 감동 그리고 교훈을 잘 전달한다. 장군봉 부부의 동반 자살이 충격적이기는 하지만, 그마저도 진솔한 교훈으로 이어지고 있다. 비록 노인들의 이야기이지만, 그 이야기들을 통해 세대와 세대를 잇고 있으며, 젊은 세대들에게도 자신을 성찰할 수 있는 계기를 전달하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그대를 사랑합니다〉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대중극의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가치를 둘 수 있는 작품이다.

이 연극은 4개월이 넘는 기간 공연을 하여쏙, 공연마다 높은 좌석 점유율을 보였다. 강풀의 인기 순정만화가 연극화되었다는 점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고, 강태기 등의 실력파 연기자들의 캐스팅과 극사실주의를 표방하고 있는 연출가 위성신의 연출도 커다란 이유가 될 것이다. 노인들의 이야기를 통해 젊은 관객은 자신들과의 차이를 경험하면서도 근본적으로 같은 감정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공감대를 형성한다. 말할 것도 없이 나이 지긋한 관객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공감대를 형성한다. 또한 평이한 내용과 현실적 인물들이 관객들에게 그만큼 더한 친숙함으로 다가가는 것이 이 연극의 주된 성공 이유이다.

하지만 이 작푸멩 아쉬운 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먼저 등장인무렝 이렇다할 악인이 없다. 있다면 장군봉의 주차장에 외제차를 주차했다가 차가 약간 긁혀 장군봉에게 화를 내는 젊은이 정도이다. 따라서 선명한 갈등 구조가 부재한다. 잠시 장군봉과 김만석이 송이뿐을 두고 삼각관계에 빠지는 갈등이 보이기는 하지만, 곧 오해로 인한 해프닝임이 밝혀진다. 갈등 구조가 없다는 것은 그만큼 극적 긴장감이 떨어진다는 말이다.

원작이 있는 작품일 경우, 원작과의 비교는 어쩌면 불가피한 것이 되고 만다. 현재 연극뿐만이 아니고 영화나 TV에서도 원작을 바탕으로 한 작품은 셀 수 없이 많다. 일부 평자들은 이러한 추세에서, 이제는 원작이 있다 하더라도 원작은 원작대로 평가해야 하고, 작품은 원작과는 별개로 평가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장르가 바뀜으로 해서 그 강조점과 표현 방식이 변화하고, 가끔은 시간 제약으로 원작의 내용에 기댈 수밖에 없다면 원작과의 비교는 불가피한 것이다. 이 연극도 마찬가지이다.

조순이가 잠시 밖으로 나오고 김만석의 오토바이를 타고 동네를 돌 때, 그녀의 눈에 보이는 '하늘에서 내리는 꽃비'는 관객들에게 잘 보이지 않는다. 조명으로 그 꽃비를 표현하기는 하지만, 조순이의 "꽃비 온다."의 대사가 아니라면 그것을 알기는 힘들다. 그 '꽃비'는 그녀의 티 없이 말고 순수한 마음을 나타내는 것이고 이 외출이 그녀에게 얼마나 기쁜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인데, 바로 그 점이 관객들에게 전달되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조순이가 그리는 그림은 상당한 의미를 가지고 잇지만, 연극에서는 그 의미를 다 표현하기 어렵다. 이처럼 만화적 표현의 무대화에 대한 문제점을 이 작품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결국 송이뿐이 고향으로 가고 싶다고 하고, 김만석이 그 앞에 서서 "그대를 사랑합니다."라고 절규하는 장면을 남기고, 둘은 오토바이를 타고 떠난다. 원작의 내용을 아는 관객들은 김만석이 송이뿐을 고향에 데려다 주는 장면으로 생각하겠지만, 나머지 관객들은 떠나는 것인지 아니면 김만석의 절규 같은 고백이 송이뿐을 감동시켜 같이 세상을 살아가자는 것인지 알기 어렵다. 그만큼 연극에서의 의미는 중층적이다. 물론 김만석이 송이뿐을 사랑하는 마음이 싹트는 것을 그의 심장 소리 박동으로 표현한 것은 만화보다 훨씬 나은 표현 방식이다.

이제 〈그대를 사랑합니다〉는, TV 드라마와 영화로도 제작된다고 한다. 다양한 매체로의 변화는 그 성공 여부도 기대가 되지만, 한 가지 콘텐츠로 다양한 장르 형성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일단 만화와 연극으로 흥행 성공을 구둔 이 작품은, 관객층을 가리지 않는 재미와 교훈을 담고 있는 일종의 대중적 연극으로 성공을 거두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정갑준 1972년 경기도 광주 출생. 고려대 영문학과와 한양대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석사 졸업. 한양대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박사 과정 수료.

 

 

* 《쿨투라》 2009년 봄호(통권 13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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