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회 쿨투라 신인상 영화평론 부문 당선작] 개들의 예감: 〈황해〉, 〈무산일기〉, 〈풍산개〉에 관하여
[제5회 쿨투라 신인상 영화평론 부문 당선작] 개들의 예감: 〈황해〉, 〈무산일기〉, 〈풍산개〉에 관하여
  • 엄준석
  • 승인 2012.02.25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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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와 카메라의 여정

세 마리의 개가 있다. 이 세 마리의 개는 각기 다른 역사와 운동 아래에서 성장했지만, 한반도 주위를 배회하거나 한반도 내에서 죽음을 맞이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고 있다. 한반도 주변을 어슬렁거리고 죽음을 맞기도 하는, 그렇게 인상 깊은 그들을 다행히도 이 땅의 '영화'가 카메라를 짊어지고 뒤따르고 있다. 이들의 문제가 곧 우리의 문제 또는 우리에 의한 문제임을 알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영화의 여정은 매우 흥미로운 영화적 사건이며 우리 사회 무의식의 지층을 보여줄 기회일 것이다. 영화는 세계의 위기에 개입하는 형식critical이며, 기저의 사물과 세계 그리고 삶이 처해 있는 위기에 빛을 부여함으로써 세계와 삶을 구출할 가능성이기도 하다. 개와 카메라의 여정에 주목하는 행위는 그 불완전한 가능성을 붙잡고 희생하는, 윤리적인 행위이다.

세 마리의 개들, 〈황해〉(2010), 〈무산일기〉(2010), 〈풍산개〉(2011)는 국민국가가 직면해 있는 다양한 위기를 배회하는, 일종의 '유기견'의 생태학적 보고로 읽을 수 있다. 역사적 유기견은 고고학적 지층 내에서 화석화된 형태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현재와 격렬하게 감응하고 있는 증좌로서 우리 곁을 배회하고 있다. 따라서 이 세 마리의 개들을 날카롭게 뒤따를 필요가 있다. 나아가 각각의 개-영화가 취하는 스타일이나 어법들의 차이에도 이 영화를 동시적으로 사고할 필요도 있다. 그것은 각각의 영화 속 개들을 끌어안기 위한 방책이며, 세 마리 개의 여정을 독립적으로 보지 않고 늘 함께 고려함으로써 한반도라는 '입체'를 살피기 위함이다.

세 마리의 개가 각각의 영토에 도진 '질병'을 피해 남한으로 넘어왔다는 동시성에도 주목해야 한다. 여정의 구체적 경로와 질곡을 보여주는 〈황해〉, 끝나지 않는 여정에 대한 일기 〈무산일기〉, 그리고 여정에 대한 역행을 보여주는 〈풍산개〉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원인에서 이 여정은 비롯되었지만, 각각의 개들은 서로 다른 운명을 맞는다. 헌데, 그 상이한 결과에도 하나하나의 결과가 한반도의 위기 또는 구출의 (불)가능성을 독자적으로 읊어내기에 그 여정과의 동행을 서두를 필요가 있다. 더욱이 각각의 개가 지닌 특수한 감각이 카메라와 함께 여기저기에 어떤 징후적인 발자국을 새겨놓았기에 동행을 늦출 수도 없다.

질병 즉 개병의 진원과 경로를 명시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먼저 〈황해〉에 주목한다. 시작과 동시에 개병을 언급하고 전시하는 영화. 불길한 전조 위에 서 있는 구남(하정우)의 독백은 〈황해〉의 시작만이 아닌 한반도에 개의 도래를 알리는 신호라 할 수 있다. 그것은 한반도에 예측 불가능한 타자의 도래를 알리는 신호이기도 하다. 구남은 "제 아가리로 물어 죽일 수 있는 것들은 몽땅 물어 죽"이는 병을 예감한다. 그러한 그의 곁에서 카메라에는 '미친 듯이' 마작 패를 젓는 손과 상대를 이기려 드는 도박의 광기를 담는다. 독점과 갈취에 도취한, 그 광기의 운동은 부지불식간에 세계의 여기저기로 번져나갈 것 같은 불길함이 있다.

독점과 갈취에 병든 국민국가 또는 고향에는 〈무산일기〉의 승철(박정범)과 〈풍산개〉의 풍산(윤계상)이 있었다. 승철은 피 묻은 옥수수 몇 줌을 얻기 위해 사람을 죽이고 말았다. 승철의 입과 손은 이성적으로 조종되지 않았다. 그렇게 병들어버린 승철은 남한으로 도망쳤다. 소년과 함께 북한을 떠나기 직전, 풍산은 어느 사내로부터 보따리 심부름 의뢰를 받았다. 사내는 "소중한 어머니 유품"이라며 보따리를 풍산에게 건넸지만, 불길한 기운이 진동했다. 결국, 그 보따리는 유품이 아니라 밀수품이었다. 보따리를 받기 전 풍산은 그 사내와 불길한 시선을 주고받은 적 있다. 그 시선에서 풍산은 병에 찌든 동포를 보았다. 풍산에게서도 고향은 더는 머물 수 없는 곳이 되어있었다.

세 마리의 개 모두 심각한 질병을 경험했다. 그러나 세 마리의 개는 인간보다 예민한 감각의 소유자였다. 그들은 자신과 동포에게서 세계의 위기를 감각하고 도망쳐왔다. 이러한 세 마리의 개가 인간의 심성을 혼합적으로 내장하고 있어서 그 위기로 달려들지 않고 도망친 '겁쟁이'의 모습을 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위기가 독점과 갈취라는 세계와 자본의 폭력이었다면 겁쟁이라고 쉽게 비난할 수 없다. 아니, 겁쟁이의 드라마틱한 여정은 국민국가라는 폭압적인 시공간에서 위기와 폭력을 읽어낸 운동으로 이해할 수 있다. 나아가 겁쟁이와 동행한 영화는 현실을 뿌리radical에서부터 포착하는 급진적radical 운동의 하나일 것이다.

겁쟁이의 나약한 신체 미 운동에서 폭력의 양태를 일고 폭력적 세계로부터 탈주할 가능성을 얻어낼 수 있는 것이라면, 이 여정에 주목해야 한다. 겁쟁이의 곁에서 함께 운동하며 세계의 뿌리로 파헤쳐나가는 영화-카메라도 마찬가지다. 뤼미에르의 (다큐)카메라는 단순히 여행하고 상품을 만든 것만이 아니다. 세계의 가장 문제적 영토, 즉 뿌리에 무의식적으로 가닿아 있었다. 폭력의 진앙인 전쟁터에 카메라가 늘 뒤따른 것처럼 말이다. 무의식적으로 개의 여정을 뒤따르는 일련의 한국 영화들은 그런 점에서 허투루 볼 수 없다. 인간은 집을 지키는 개뿐마나 아니라 탐지견, 맹인견으로부터 항상 중요한 예고를 받아왔다. 그 개가 또 한 번 크게 짖는다.


어느 투견의 죽음

'인간'은 늘 알지 못하는 대상에 관한 관심과 호기심을 거듭해왔다. 특히 동물의 생태와 생리, 이를테면 개체를 유지하는 방식이나 집단이 조절되는 습속과 같은 것들을 파헤쳐 왔다. 인간은 짐승을 자신의 관점에서 이해했고, 그것들을 훔쳐보거나 은밀히 뒤를 쫒아 바라보곤 했다. 반대로 짐승의 쉽게 이해되지 않는 행위 양식에 대해서는 '공포'로 규정짓기도 했다. 세 영화에서도 인간 중심적 사고방식은 여실히 드러난다. 〈황해〉의 조선족 '구남'은 종족적으로 한국인과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인간이 아니어서 해부 당하게 된다. 카메라는 공포에서 흥분의 상태로 이동하며 마치 자위라도 하는 양 자신의 오르가슴을 지연시킨다. 본질적으로 조선족을 인간으로 보지 않는 카메라이기에 대상을 탐닉하는 구경꾼의 시선-신체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또한, 카메라는 조선족의 거주자-연길을 질병이 창궐한 공간으로 이미지화한다. 인간으로 존재하는 남한의 관객은 구경꾼의 카메라와 동일시한다. 폭력이 바로 앞에서 펼쳐지고 있음에도 카메라는 안전하다. 그러한 카메라를 동일시한 관객 또한 폭력 앞에서 안전한 구경석을 보장받는다. 카메라가 공중에 떠서 연길의 전경을 '관조'하고 구남의 아파트와 밀항자의 아지트까지 따라다니는 순간부터 말이다. 카메라는 짐승을 감시망에서 놓치지 않으면서 그 궤적을 쫒는다. 항상 카메라는 구남의 걸음보다 한 걸음 떨어져 있다. 황해를 건널 때도 늘 한 걸은 떨어져 따라가는 카메라는, 가쁜 호흡과 떨림의 흥분된 상태를 유지하며 운동을 중단하지 않는다. 카메라의 그 초월적인 추적과 고양된 심리는 구남이 어떤 흥밋거리가 되어 있는지를 알려주는 표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초월적인 카메라의 능력에 의해 구남은 안전하게 포획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카메라에 의해 완벽하게 파악된 구남은 인간의 안전 영토로 결코 침범해 들어올 수 없는 존재임을 알린다. 카메라가 김승현 교수(곽도원)를 살해하려는 구남을 안전하게 뒤따르는 것도 자신의 능력을 믿어서이다. 나아가 경찰의 실패한 추격에서 보여주듯 포위망에 둘러싸인 구남을 놓아주기도 한다. 구남을 안전하게 포획한 카메라는 짐승적 존재를 경고하고 공포를 환기하지만은 않는다. 카메라는 안전망에 포획된 짐승의 필사적 몸부림을 구경하고자 한다. 이러한 카메라와 함께하고 있는 〈황해〉 또한 감각적인 속도와 탐미적인 이미지를 더하여montage 더욱 세련된 구경거리로 자신을 완성한다.

카메라는 짐승의 몸부림이 체현된 '손'과 '입'에 집중한다. 그래서 영화는 손을 흥미롭게 바라보는 카메라로부터 시작된다. '미친 듯이' 마작패를 섞는 손, 즉 "개병"에 걸려 "몽땅" 죽이려 드는 손은 시간이 지나면서 '어묵 꼬챙이', '뼈다귀'로 생명을 위협하는 무기에 이르게 된다. 짐승이라 하기엔 아직 인간적인 김태원(조성하)이 면가(김윤석)의 악수를 피하는 이유도 면가의 손이 무기와 다름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나아가 영화는 "엄지"를 잘라오라는 면가의 명령을 제대로 설명하지 않는다. 그 명령에 따라서 발생한 사건과 그 사건에서 비롯된 잔혹한 이미지를 재현하고 있음에도 말이다. 그것은 이 영화가 "어미"를 잘라오라는 명령을 그저 짐승이 경쟁하는 짐승의 무기를 파괴한 것과 다름없는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1).

카메라는 쉴 새 없이 먹어대는 입에도 집중한다. 살인 청부를 받고도 그리고 밀항 브로커들의 조롱 섞인 눈초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먹는 구남의 입에 집중한다. 또한, 카메라는 구남처럼 쉴 새 없이 먹는 면가와 그 일당의 입에도 주목한다. '애국가'와 짐승과도 같은 면가 일당이 먹는 소리를 담기도 한다. 의도적으로 '연출된' 이 장면은 국민국가 내부에 깃든 비국민적 자질들을 비웃는 한편, '먹는 입'2)의 비문명적 행위가 '국민국가'가 활성화해온 무명적 자질 또한 비웃어버리는 모습이기도 하다. 카메라에 의해 포착된 입은 인간의 입이 아니다. 구남에게 "밥은 먹었니"라고 묻는 면가의 말도 인간의 언어로 간주하지 않는다. 그 입은 욕구에 충실한 짐승의 입이자 비국민의 입과 다름없다.

짐승의 폭주는 지루한 일상에 흥미를 가져다주지만, 그것은 그리 오래 허락되지는 않는다. 짐승이 항만/항구라는 국민국가의 중요한 경계에 이르렀을 즈음에는 그를 더는 자유롭게 놔둘 수 없기 때문이다. 영화는 그들로부터 뽑아낼 수 있는 즐거움은 다 뽑아낸 후 죽게 내버려둔다. 이들에 대한 영화의 착취 및 무책임은 죽음 이후에도 지속하여 안타깝게 여겨진다. 영화는 바다에 던져져 죽음에 이른 구남의 삶을 냉정하게 외면한다. 영화는 구남의 부인 리화자(탁성은)를 급작스럽게 불러내면서 '반전'이라는 서스펜스와 스펙터클에 구남의 죽음, 그리고 애도를 불가능하게 만들어 버린다. 억지스러운 반전 때문에 구남과 리화자의 죽음/삶은 '퀴즈'로 전락해 버린다. 다른 한편으로, 영화의 성급한 사형 선고와 반전은 영화-인간이 자신 또한 짐승의 속성(손과 입)을 인정하지 않고 서둘로 회피해버리는 흔적으로 보인다. 인간은 짐승과의 동질성을 거부해 오곤 했다. 국민-인간으로 자신을 규정짓는 이 땅의 존재는 그 거부의 일환으로서 〈황해〉를 즐길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즐거움 이후 서둘로 조선족을 제 삶의 영토에서 삭제해버리는 모습은 이러한 비국민적 존재를 두려워하는 한국 사회의 나약함일 것이다.


유기견의 삶

카메라는 자신의 전지적인 능력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 능력이 선사하는 흥분과 만족감을 쉬이 떨쳐낼 수 없기 때문이다. 〈무산일기〉는 실제 인물의 죽음을 알리면서까지 묵념 · 애도의 태도를 보인다. 하지만 대상의 처절한 삶/생명마저 고약한 즐거움으로 변질시키는 카메라의 능력 탓에  영화의 의지는 방해받는다. 〈무산일기〉의 카메라 또한 승철의 뇌를 해부한다. 일테면 그가 영숙(강은진)을 바라볼 때, 그 시선에 동일화하면서 말이다. 카메라는 승철에게 들러붙어 그 삶/생명이 주는 텍스트적 흥미로움에 집중한다. 〈황해〉의 카메라가 가쁜 호흡과 떨림으로 서술하듯, 〈무산일기〉의 카메라도 유사한 방식으로 서술한다. 하지만 〈무산일기〉의 카메라는 서둘러 제 눈앞의 이미지를 넘겨버리지 않는다. 대상을 망각하는 짧은 시간이 아닌, 더 오랫동안 대상을 응시-인식할 수 있는 시간으로 접근하는 셈이다. 관객이 이 영화를 보는 동안 낯선 대상이 점점 익숙해지게 되는 이유다.

〈무산일기〉의 카메라도 〈황해〉가 하층 근로자를 포착하듯 제 동물성을 누그러뜨리며 마치 '애완견'처럼 주인의 수탈과 착취를 견디는 짐승을 포착한다. 두 영화는 질서를 흩트리지 않는 자들에게는 죽음을 선고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에게 그 어떤 주체적 면모도 발휘할 수 없게 만드는, 상징적 의미의 죽음을 선고한다. 그리고는 그러한 상징적 죽음을 '일반화'한다. 복종하는 자가 아닌 일탈하는 자에게 집중하면서, 그의 죽음을 무시하고 지나간다. 이와는 달리 〈무산일기〉는 그 죽음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심층을 벗겨 내는 것으로 인식한다. 롱테이크, 즉 긴 시간으로 상징적 죽음을 '특수화'하는 동시에 묵념 · 애도의 시간으로 환치시킨다. 고된 출장에도 단돈 20만 원 밖에 받을 수 없는 승철이 주인의 설거지를 할 때, 주인의 괄시에도 포스터를 꿋꿋이 붙일 때, 최저임금에도 미치지 않는 돈을 제안받고 심야근무를 승낙할 때에 그러하다.

때문에 승철이 사람을 죽인 제 과거-치부를 고백하고 더 열심히 교회를 다니는 장면, 그리고 친구의 돈을 훔쳐 이발하고 양복을 입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슬프게 다가온다. 승철 자신에게 부과된 상징적 죽음을 벗겨내려는 처절한 몸짓을 보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 모습은 애완견에서 '반려견'으로 조금이나마 승격해보려는 처절함으로도 보인다.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승철은 분신과 다름없는 백구의 죽음을 목격한다. 그리곤 그의 죽음이 자신의 죽음과 진배없는 것임을 깨닫는다. 승철의 분신 백구는 애견 가게 주인이 말하듯 단돈 만 원에도 매매되지 않는 "짐", "믹스견"이다. 그러한 백구의 죽음은 주민등록번호 '125'로 정의되는 또한 쓸모없고 이질적 존재인 승철의 죽음과 같다. 결국, 승철은 자기 자신의 죽음을 본 것이라서, 백구의 명복을 빌어주는 것마저 잊어버리고 만다. 그렇게 승철은 공황에 빠진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있는 롱테이크는 그렇게 공황-고통에 빠진 승철에게 공감하고자 하는 이 영화의 의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롱테이크가 선사하는 지긋한 시간은 이 영화가 꾀했던 묵념과 애도의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쉬이 넘겨버러지 않고 대상에 대한 지긋한 응시-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이 영화의 태도. 그것은 여타의 영화처럼 격정적인 결말로 끝맺는 것이 아니어서 소박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존재와 시대의 위기, 그리고 그 위기를 잉태한 조건을 읽고자 하는 이 영화의 의지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마지막 롱테이크는 숙영이 있는 노래방으로 가는 것인지, 거리를 방황하는 것인지, 그 행보를 알 수 없는 승철의 모습을 담는다. 더군다나 불명확한 승철을 짓누르며 빛나는 네온사인과 자동차도 함께 담는다. 이에 영화 속에 담긴 대상과 세계의 관계를 지긋한 시간으로 마주하며, 익숙했던 풍경을 낯설게 느낄 수 있게 된다. 이 영화는 승철이 제 고향 무산에서 벌인 살인을 고백할 때에도 롱테이크와 쇼트로 고통스러운 행위를 감내하는 승철에 공감하려 한다. 그래서 이 영화는 힘겨운 고백에 축 늘어진 승철의 어깨, 그리고 그 너머로 보이는 교인들 또는 영숙 모두를 담는다. 이러한 이 영화의 태도는 대상과 세계의 관계를 성찰하는 영화의 운명적 과제를 받아들인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무산일기〉의 마지막은 〈황해〉처럼 억지스러운 반전과 퀴즈로 마무리하지 않는다. 〈무산일기〉의 카메라는 대상을 조롱하거나 약탈하지도, 그렇다고 인간-권력자의 관대함을 뽐내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승철의 (상징적)죽음은 구남의 죽음과 유사해 보일지라도 쉽게 잊혀버리거나 개인의 존엄성이 희생으로 전락하지 않는다. 같은 추적자의 포지션이었지만 쉽게 비판 · 판명하지 않았던 카메라에 의해 그러한 차이점이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카메라, 즉 영화는 언제나 특정한 의미와 내용으로 고정되지 않는다. 정쟁(장)을 뒤따르면서 사유와 스펙터클, 즉 긍정성과 부정성 사이를 부단히 오가는 것이 영화다. 피 튀기는 싸움, 피 말리는 배신을 담고 있다는 측면에서 〈황해〉와 〈무산일기〉는 평온한 일상이 아닌 전쟁(장)을 담은 영화임이 틀림없다. 〈무산일기〉 또한 완벽한 규정 불가능한 영화이기에 긍정적으로만 이해할 수 없다. 이에 〈무산일기〉의 카메라를 대상과 세계를 성찰케 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한편 전쟁(장)에의 개입 불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무산일기〉의 추적자, 카메라는 〈황해〉처럼 대상을 객관적인 체하며 바라보지 않는다. 〈황해〉가 가진 작위성을 가급적 배제하고 접근한다. 그래서 극영화가 아닌 다큐멘터리의 뉘앙스를 풍긴다. 그것은 이 영화가 음악이라는 주관적 서술을 배제했기 때문이며, 롱테이크 즉 더 긴 시간 동안 프레임 속 사실성을 긁어모으는 묘사를 택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다큐멘터리에 대한 정의, 다큐멘터리는 사실에 대한 기록이며 우리에게 기록 그대로의 세상을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특정한 주관성에 정박해 있는 그를 통해 폐쇄적인 관점을 가질 수도 있다. 오해의 연속이 발생한다는 것인데, 매우 사실적인 영화 속에 스며들어 있는 패배주의 및 허무주의는, 즉 〈무산일기〉는 승철과 그러한 존재를, 그리고 세계를 부정성에 가두어버릴 위험성을 안고 있다.

〈무산일기〉는 〈황해〉가 그랬던 것처럼, 타자를 부정적 의미망에 가두어 놓는다. 따라서 〈무산일기〉의 마지막 카메라는 온전히 신뢰할 수 없는 '양면적인' 속성을 지닌 카메라라고 할 수 있다. 그 카메라는 승철을 온정적으로 응시-인식하려는 근거로도 읽히지만, 그렇게 바라보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고백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의 소극성을 고스란히 투영함과 동시에 그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 그것은 〈황해〉에서처럼 감당할 수 없는 대상에게 죽음을 선고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대상을 포기한 상징적 죽음을 선고한 것과 다름없는 선언이자 명령이기도 할 것이다. 따라서 〈무산일기〉의 마지막, 실제 죽음이 언급되지 않더라도 마치 죽어버린 존재처럼 승철을 인식하게 되는 건 그 때문이다. 언제나 카메라, 아니 영화는 양면적이고, 까다롭고, 낯설다. 그것은 응시-인식이라는 행위양식, 그리고 그의 윤리성에 관한 규정이 여전히 어려운 숙제이기 때문이다.


개에게 충실한 충견 혹은 새

〈풍산개〉는 '휴전선'이라는 국민국가의 가장 뜨거운 전쟁(장)의 영역에 있음에도 권력과 폭력의 재생산을 거부하는 영화다. 영화가 전쟁(장)으로 뛰어들면서 그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지 못하고 도리어 그곳을 '게임화' 했던 역사를 떠올린다면 〈풍산개〉의 등장은 매우 고무적이라 할 수 있다. 근래의 한국 영화가 가족(국민국가의 다른 이름인)중심주의를 증오와 분노의 이름으로 더 공고히 하던 모습을 떠올렸을 때, 증오와 분노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세계의 위기를 돌파하려는 이 영화는 쉬이 거부할 수 없는 텍스트이기도 하다. 풍산의 동선을 통해 알 수 있든 한반도의 문제를 양면에서 다루는데도 특정 국가의 호출과 명령에 따르지 않는다. 그래서 풍산은 두 국가 모두에게 불온하고 위협적이다. 하지만 풍산은 모두에게 스스로 등을 돌렸음에도 찢긴 세계를 봉합하려 한다. 이러한 풍산의 독특한 행보와 동행하는 이 영화는 한반도의 모든 어리석음을 비판하고 윤리적인 존재의 죽음-희생을 일으키면서, 세계의 위기에서 영화는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묻는다.

〈풍산개〉 또한 〈황해〉처럼 인간 중심적 시선을 가진다. 이 영호 또한 추적자-카메라를 한반도 곳곳에 배치하여 짐승을 감시하고 통제한다. 하지만 그것은 이 영화의 단면일 뿐이다. 우리는 이 영화 곳곳에서 그 카메라가 누구의 손에 들려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이 영화의 '시작(소트)' 장면에서부터 말이다. 〈풍산개〉의 시선-카메라는 두 가지이다. 일테면 영화속 '모니터'의 시선과 '풍산이 든 카메라'의 시선이다. 소년을 업고 비무장지대를 건너던 풍산을 담은 열 감지 카메라의 모니터, 풍산의 고문과 인옥(김규리)과의 대화를 엿듣던 감시 카메라의 모니터, 나아가 이 모니터의 시선을 체화한 남한의 정보부 요원과 북한 간첩에 이르기까지. 이 시선은 풍산과 인옥을 조준 자에 놓고 그들을 조롱하는 시선과 다름없다. 따라서 그 시선의 주인이 감시자에게 줄곧 남쪽 편인지 북쪽 편인지를 묻는 것은 어리석게 보이고, 그 우문에 '침묵'으로 답하는 풍산은 지혜로워 보인다.

풍산의 카메라-시선은 타인에 대한 '심문'이 아닌 '의문'과 '질문'을 가진다. 그래서 풍선의 카메라-시선은 세계의 위기를 푸는 열쇠로 여겨진다. 풍산의 카메라-시선 앞에 헤어진 가족과 만나고자 자신의 '말'을 열심히 붙이는 벙어리-이산가족이 있다. 풍산은 그들의 고통에 의문을 품고 질문을 던진다. 자신의 카메라-시선으로 그 벙어리의 말-고통을 담는다. 풍산은 벙어리가 전하지 못한 말을 자신을 희생하면서 전달해 준다. 이산가족과 인옥이라는 벙어리는 그(또는 카메라)의 앞에서 눈물을 흘린다. 이때 우리는 풍산이야말로 벙어리이지만 가장 중요한 말을 하고, 또 전달하는 존재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사진을 찍는 행위는 대부분 찍히는 대상과 상황에의 개입을 거부하는 것으로 끝맺는다. 대상을 호기심이나 미적인 대상으로밖에 여기지 않는 것이다. 그 행위는 약한 의미에서의 도둑질과 다름없어 보인다. 하지만 풍산은 대상과 상황에 대한 교감과 공감의 교두보로 사진-카메라를 대한다. 그런 점에서 풍산은 카메라의 존재론적 특질을 긍정적으로 재설정하는 현자라고 할 수 있다.

풍산을 교통이 이루어질 수 없는, 찢긴 세계를 왕래하는 어느 '충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말없이 이 세계와 저 세계를 침묵으로 접촉하는 무한한 운동을 펼치는 충견 풍산. 그리고 그의 희생적이고 윤리적인 태도가 체현된 시선-카메라. 풍산은 국민국가라는 주인subject의 요구/명령으로부터 이미지와 서사를 길어오지 않고, 노예slave의 눈-시선이 닿는 여기와 저기의 어느 곳에도 놓일 수 없는 날카로운 슬픔과 아픔을 돋을새김한다. 말하자면, 주인의 시야가 은폐해버린 역사와 상처를 핥는 충견의 치유는 필연적으로 고통을 동반하지만, 이 벙어리의 어법으로부터 출불하지 않는다면 단호하게 절단된 이곳과 저곳의 축적된 증오와 불신의 체계는 넘어설 수 없었다는 것이다. '풍산'이 '개'이면서도 '새'와 다를 바 없는 이미지로 중첩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충'견'의 예민한 감각은 이산가족의 고통과 영혼을 감각했듯이 인옥의 원혼도 붙잡아둔다. 풍산은 인옥의 원혼에 세계를 완전히 떠났다고 믿지 않는다. 비록 짧은 사랑이었지만 여전히 함께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풍산은 인옥을 위해 증오와 복수가 아닌 그 영혼을 위한 '사령제'를 벌인다. 인옥에게 그녀가 처참하게 죽게 된 이유, 세상의 어리석음, 개병에 걸린 존재의 나약함을 보여주려는 풍산이다. 그것만이 현세를 떠나지 못한 인옥의 억울함을 풀어줄 수 있다고 믿기 때무이다. 인옥의 시신에 신발을 신겨주던 풍산, 그런 그의 등 뒤로 상승하던 카메라는 제 몸에서 나온 인옥의 원혼이다. 카메라는 인옥에게 접신하는 것으로써 이후 사령제가 인옥의 원혼을 어루더듬는 순간에 동참한다. 아지트로 하강하던 카메라는 그래서 사령제에 응한 인옥의 발걸음이라 할 수 있다. 첫 번째 제물, 북한 간첩 상철이 총 맞은 '귀신들'이 있다며 원혼-인옥을 감지하면서 사령제는 시작된다.

풍산의 사령제는 폭력과 죽음을 강제했던 자들에게 반성과 참회의 여지를 준다. 한반도와 같은 좁은 곳에서 서로 찢고 찢기던 자들에게 말이다. 풍산의 도움을 받았던 늑대(남한 정보부 요원)가 풍산의 뜻을 전달한다. 하지만 이미 개병이 걸린 그들은 제 광기를 누르지 못하고 폭주한다. 인옥은 화해의 기회를 절멸의 위기로 이끄는 존재들을 목격하며 제 죽음의 원인을 깨닫고, 그 어리석음을 멀리하듯 아지트를 나온다. 불 꺼진 아지트를 뒤로하고 통일전망대로 들어서는 카메라-원혼은 풍산을 뒤따르는 인옥의 발걸음이다. 그곳에서 인옥은 여전히 담을 넘으려는 풍산을 본다. 찢긴 세계를 조금이나마 봉합하기 위해 월경하려는 풍산을 말이다. 예상대로 피에 젖은 풍산의 촬영기 즉 벙어리의 유일한 '언어'가 남북을 오가는 장면이 비치고, 예상대로 풍산은 죽는다. 하지만 풍산의 죽음은 비극으로 낙하하지 않는다. 풍산의 고결한 의지를 인옥이 잊지 않기 때문이다.

총에 맞은 풍산이 낙하한 직후 새가 휴전선을 가로지르는 장면이 나온다. 아마도 그 새는 찢긴 세계를 왕복하던 풍산일 것이다. 이때 여러 마리의 새가 '함께' 날아가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강물에 빠져 목숨을 잃은 직후의 온옥에게도 새가 병치 된 바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앞선 장면을 먼저 새가 되어 경계를 가로지르던 인옥과 이제 새가 되어 경계를 더욱 자유롭게 오갈 수 있게 된 풍산이 함께 새로 승화한 장면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함께 날아가는 새의 모습을 통해 인옥과 풍산의 죽음은 '개죽음'으로 낙하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불사'로 세계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는 운동으로 여겨진다. 이는 영화가 그들에게 보내는 애잔한 상찬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영화의 최종 쇼트는 태극기라는 국민국가의 상징적 기호를 정면으로 대면하는 시선-카메라다. 이 영화는 그 폐쇄적인 이분법을 비판하고 날아가는 새의 운동을 믿는다. 여기서 대상을 변하게 하는 힘이 영화에 있음을 상기한다면, 아니 대부분 영화가 그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음을 떠올린다면, 대상과 세계를 변하게 하려 했던 풍산의 카메라-영화의 힘은 긍정적 운동으로 의미화할 수 있지 않을까. 더군다나 그 힘이 전쟁(장)에 다름없는 경계를 가진 한반도에서의 삶/생명을 위한 고결한 희생이라면 말이다.

풍산이 보여준 영화적 가능성 때문에 카메라가 관음증 환자와 추적자의 전유물이 되는 것을 꺼릴 수 밖에 업게 된다. 그들은 성급한 죽음 선고를 내릴 것이고 조준자를 당겨 은밀한 살인을 저지를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아니, 프로파간다로 숱한 삶/생명을 동원할 국민국가에게도 맡길 수도 없다. 카메라는 대상과 동행에의 의지가 있는 쪽에 가까워져야 하고 찢긴 세계 그리고 대상을 위해 희생을 개의치 않는 쪽과 친숙해져 있어야 한다. 그것은 죽음을 넘어, 죽음을 공유하고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영화의 가능성을 보다 선명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의 세마리의 개가 물어왔던 대상과 세계의 위기를 감각하는 능력과 위기에 대응하는 소극적 · 적극적 의지 모두를 보듬어 줄 필요가 있다. 그러한 개의 감각과 의지는 자기중심적이 아닌, 인간과의 공유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인간의 능력만으로 이 위기를 홀연히 돌파해낼 수 없다면, 그 탐지견, 반려견, 충견과 함께하는 여정을 모색해야 하지 않을까. 더군다나 세 마리의 개가 지나갔던 한반도와 그 주변의 존재라면 이 여정을 외면할 수 없을 터. 국민국가의 위기이자 가능성을 감당하지 못해 불신과 냉소 또는 증오와 분노로 서로가 서로에게 응답하는 상황이라면 이는 더더욱 외면할 수 없는 일이지 않겠는가.

 

 


1) 물론 남한 사회에 소속된 존재의 손은 그와 다른 형태로 재현된다. 즉, 구남이 자신을 죽이려 할지도 도른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김승현의 동정 어린 손이 그것이다. 김승현의 손이 개-구남에게 물어 뜯긴다는 점에서 지갑에서 만 원군 지폐를 꺼내 건네는 동정조차 국민국가의 구조 안에서는 허용될 수 없다는 사실을 무섭게 보여준다.
2) 김항, 『말하는 입과 먹는 입』, 새물결, 2009


엄준석 1983년 부산 출생. 경성대학교 연극영화학과 졸업. 중앙대학교 첨단영상대학원 영상학과 영화이론 수료. 2011년 10월 부산 독립 영화 잡지 '빛 평' 편집장 역임. 메이드 인 부산 독립 영화제 특별 언급상(작품 〈검은 깃발〉). um3034@naver.com

 

* 《쿨투라》 2012년 봄호(통권 25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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