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회 쿨투라 신인상 게임평론 부문 당선작] 게임규칙에서 게임적 리얼리즘으로: 〈바이오쇼크 : 인피니티〉를 중심으로 본 게임체험의 진화와 완성
[제7회 쿨투라 신인상 게임평론 부문 당선작] 게임규칙에서 게임적 리얼리즘으로: 〈바이오쇼크 : 인피니티〉를 중심으로 본 게임체험의 진화와 완성
  • 박원호(Kocca)
  • 승인 2014.03.25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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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게임에 대한 다양한 정의들

90년대를 지나온 대한민국의 게이머들은 성인이 되기 이전 어른들에게 수없이 ‘게임 하지 마라’라는 잔소리를 들어왔을 것이다. 당시 기성세대들은 게임을 공부의 적으로 규정하고 게임산업을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았을 것이다. 2013년 카카오톡을 통해 서비스되는 모바일게임이 스마트폰 시장의 큰 이슈로 떠오른 지금, 지금의 기성세대들은 젊은 세대 못지않게 스마트폰을 통해 ‘게임’이라고 불리는 상품을 소비한다. 어떤 의미에선 정말 놀라운 일이다. 게임Game이란 유럽계 언어인 ‘gehem’ 즉 ‘흥겹게 뛰어 놀다’에서 출발한 말로, 현재는 놀이play와 오락amusement의 의미까지 포함하고 있다. 필자가 논하고자 하는 게임은 뒷골목의 어린아이들 혹은 술자리에서 대학생들이 모여 하는 게임과는 다른 전자오락, PC게임, 오락실 게임, 콘솔게임, 모바일 게임과 같은 디지털 매체를 이용한 비디오게임을 말한다. 

게임시장의 역사를 같이 해온 전통적인 게이머들과 어느 사회나 어느 시대에도 존재하는 소위 말하는 기성세대들은 게임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이해한다. 기성세대들은 게임을 단순히 놀이문화의 디지털화로 바라본다. 이런 시각은 게임을 단순히 ‘노는 행위’ 즉 시간 죽이기의 한 방법으로 생각한다. 지하철에서 스마트폰으로 ‘애니팡’을 하면서 목적지를 기다리는 중년의 샐러리맨들이 바로 이런 부류일 것이다. 한편 게이머들은 문학, 연극, 영화, 만화에 이은 새로운 예술의 표현양식으로 게임을 바라본다. 게임을 해석하는 방식이 다른 것은 아직 인류의 역사에서 탄생한지 반년도 지나지 않은 ‘게임’에 대해서 그 누구도 정확한 정의를 내리지 못한 것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다음 제시되는 게임에 대한 정의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게임의 본질을 이야기하고 있다.

제한된 규칙 안에서 권력의 비평형 상태를 만들기 위한 투쟁을 하는, 자발적 지배 체제의 훈련2)
-엘리엇 애배던(Eliot Avedon), 브라이언 서튼 스미스(Brian Sutton-Smith)

플레이어가 목적을 향해 투쟁하도록 만드는 내생적 의미의 상호작용 구조3)
-그렉 코스티키얀(Greg Costikyan)

불평등한 상태로 귀결되는 구조화된 충돌에 플레이어가 참여하는, 닫히고 정규화된 시스템4)
-트레이스 풀러톤(Tracy Fullerton), 크리스 스웨이(Chris Swain), 스티븐 호프만(Steven Hoffman)

놀고 싶다는 자세로 접근하는 문제 풀이 활동5)
-제시 셸(Jesse Schell)

소설, 연극, 영화, 만화와 달리 게임에 대한 정의에 대한 기준은 매우 다양하다. 앞에서 제시된 게임의 정의들은 문제풀이, 훈련, 시스템, 목적 등등 각기 다른 단어들을 사용하여 게임을 논하고 있다. 이렇게 게임을 바라보는 시각에서 다양한 정의가 공존하는 이유는 각기 다른 이유는 게임시장이 형성되면서 다양한 장르가 생겨나고, 그 장르를 형성하는 메카니즘이 다양해졌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의 정의로 모든 장르의 게임을 한번에 아우르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액션게임에 대한 정의를 통해 사운드 노벨 게임을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롤플레잉게임의 정의를 통해 어드벤처게임을 정의하는 것 역시 불가능할 것이다. 

그렉 코스티키얀은 게임의 정의를 위해 목적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지만, 〈동물의 숲〉이나, 〈심시티〉 혹은 〈심즈〉 시리즈와 같은 목적이 불분명한 게임들 역시 게임시장에서 당당하게 엄청난 판매량과 인기를 자랑하며 수많은 게이머들에게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게임이라는 찬사를 들어왔다. 게임은 일종의 가상현실로서 선택을 통한 결과로서 일종의 피드백이 존재하지만, 굳이 게이머에게 선택을 강요하지 않으며, 선택이 큰 역할을 하지 않는 게임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상품들은 온,오프라인 시장에서 게임이라는 이름으로 거래된다. 과연 게임이란 무엇일까?

게임은 하나의 정의로 통일하기 힘들 정도로 다양한 형태로 발전, 정착되어 왔다. 하지만 이런 각기 다른 견해를 뒷받침하는 게임체험에는 분명 하나의 공통점이 존재할 것이다. 필자는 여기서 게임이기 때문에 가능한 게임체험을 통해 게임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논하고자 한다. 필자 역시 게임문화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 중에 한 명이지만, 솔직히 게임에 대한 정의를 내리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다. 필자에게는 개인 블로그에 게임에 대한 지극히 주관적이고 감상적인 정의에 대해 바로 댓글로 반박글이 달리는 경험이 있다. 분명 누군가가 공식적인 자리에서 게임에 대한 정의를 내린다면 분명 게임원리주의자들이나 다른 게임 오타쿠들에게 반박 당할 것이다. 하지만 이 시도는 앞에서 말한 게임에 대한 정의를 모두 부정하거나, 절대적인 하나의 가치를 만들기 위함이 아니다. 바로 게임에 게임적 체험을 통해 게이머가 새로운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인식의 변화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다.

 

2. 게임이기 때문에 가능한 체험

게임문화사의 《게이머즈》는 예전부터 진지하면서도 코믹한 기획기사를 잘 쓰는 게임잡지였다. 2001년에서 2002년, 게임잡지 《게이머즈》에서는 총 6번에 걸쳐 아주 흥미로운 특집기사를 내보낸 적이 있다. 게임의 해석학이라는 특집시리즈는 RPG에서 슈팅까지 몇몇 게임의 장르들에 대한 황당한 분석기사였다. 다음은 당시 잡지의 기획기사에서 실렸던 질문들이다.

왜? 주인공이 절도를 해도 제지하는 사람이 없는가?(롤플레잉)6)
어떻게 작은 주머니에 어마어마한 양의 아이템을 보관할 수 있는가?(롤플레잉)
왜? 몬스터를 죽이면, 돈이나 아이템이 떨어지는가?(롤플레잉)
왜? 바닥에 음식물이 떨어져 있는가?(액션)7)
기체의 폭파 동시에 나타나는 후발주자의 정체는 누구인가?(슈팅)8)
왜? 주인공은 먹지도 화장실에도 가지 않는가?(연예 시뮬레이션)9)

이 특집기사 시리즈에서 거론된 의문점들은 항상 게임제작자와 게이머 사이에 암묵적으로 동의된 비논리들이었다. 이 궁금증들은 하나같이 황당하며, 게임제작에 전혀 의문을 가질 필요가 없는 질문들이었으며 그 의문에 대한 해답도 엉뚱한 것뿐이었다. 나는 포함한 많은 독자들은 이 특집기사를 보고 큰 폭소를 터트렸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기사에서 지적했던 몇몇 의문점들은 게임을 이해하기 위해서 한번쯤은 집고 넘어가야 하는 질문이었다.

사실 게임체험은 말 그대로 비합리성과 비논리로 가득 찬 비현실적인 여정이다. 하지만 그 어떤 게이머들도 그것에 의문을 제시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그 현상을 받아들인다. 플레이어들이 이런 비현실적인 현상에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질문의 해답은 바로 놀이의 기원 속에 있다. 사실 게임의 탄생 이전 이와 가장 유사했던 인류의 놀이 역시 비현실적이기 때문이다.

뒷골목 아이들의 놀이는 다양한 기호와 기호들간의 관계-규칙 그리고 스토리텔링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이들은 놀이에 참가하면서 규칙에 의해 목표달성에 실패하거나 경쟁에서 밀려나면 ‘죽었다’라고 외친다. 누군가 위험한 놀이 중에 목숨을 잃은 것도 아니지만, 이 순간만큼 참가자는 자신이 죽음의 상태에 이른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얼음땡’ 놀이는 서로 잡고 도망쳐야 하는 추격전의 서사가 지배한다. 이 추격전 놀이에 참가한 꼬마아이는 추격자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얼음이라는 기호를 사용한다. 술래에게 도망치지 못한 꼬마가 ‘얼음’이라고 외친다고 해서 갑자기 급격한 온도변화를 느끼고 냉동인간이 되지 않지만, 그 외침은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는 참가자의 상태를 의미한다. 하지만 진짜 아이들은 얼어버린 것처럼 멈추어 서있다. 이미 놀이의 참가자들은 자연주의적 현상이 아닌, 놀이의 규칙으로서 저항감 없이 얼음이 된다. 이것은 게임의 비현실적 현상을 받아들이는 게이머들의 심리와도 닮아 있는데, 여기서 우리는 게임의 디자인을 구성하는 주된 개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책 『게임 디자인 원론』에서는 게임 디자인 스키마(Schema 개요, 윤각, 도표)를 크게 3가지 규칙rule, 플레이play, 문화culture로 나누고 있다.10) 디자인된 시스템의 조직인 규칙을 플레이하는 인간의 경험이 플레이며, 곧 그 시스템에 의해서 연관 지어지고, 그 안에 존재하게 된 더 넓은 의미의 맥락으로서 문화가 존재한다. 이 3가지가 조화를 이루고 있을 때 게임속에서 벌어지는 현상은 지극히 논리정연하게 플레어에게 다가오는 것이다.

〈사진 1〉 〈마계촌〉(캡콤, 1985년)의 기사(플레이어)와 적의 공격을 받고 죽음을 맞이한 해골
〈사진 1〉 〈마계촌〉(캡틴, 1985년)의 기사(플레이어)와 적의 공격을 받고 죽음을 맞이한 해골

이 거대한 스키마를 디자인하는 주된 수단이 바로 기호다. 화면상에서 공주를 구하기 위해 괴물들과 싸우던 기사는 결국 치명적인 공격에 사망하여 해골이 되어 사라진다. 그리고 프로그램은 ‘기사’라는 그래픽적인 기호를 ‘해골’로 교체하고 화면상에 게임오버GAMEOVER’메시지를 출력한다. 게임속에 등장하는 기호들은 그 자신 이외의 무언가를 나타낸다. 기사는 ‘정의로운 주인공’을, 낫을 든 사신은 ‘위험한 적’을 그리고 해골은 ‘죽음’을 나타내고 게이머는 아주 빠른 시간에 그 기호들에 대한 해석자로서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수행하며 이 해석은 그 맥락에 의해 좌우되고 그 결과로 의미가 도출된다. 이것은 입력된 프로그래밍 언어의 결과물이며, 규칙에 따라 게임의 실패를 의미하지만, 게이머의 관념은 이 순간을 죽음으로서 받아들이다. 

인류가 뒷골목에서부터 해온 모든 놀이는 현실을 벗어난 그만의 기호와 상징으로 이루어진 상황극이었으며, 그것을 디지털화의 결과물이 바로 게임이다. 게임프로그램은 게임의 시스템과 규칙을 구축하고 그것을 그래픽이라는 형식으로 기호를 출력한다. 게임체험을 통해 마주치는 비현실적인 현상들의 본질은 바로 게임을 구축하기 위한 시스템의 조각들이다. 몬스터를 퇴치하고 돈이나 아이템이 떨어지는 것은 게이머를 위한 일종의 보상시스템이며, 슈팅게임에서 주인공이 죽은 후 똑같은 캐릭터가 출현하는 것은 컨티뉴(재도전)를 의미한다. 게임 속 주인공들이 화장실을 가지 않는 이유는 생리현상이라는 것 자체를 구현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게임 속에서 음식물을 섭취하면 바로 에너지를 회복하는 것도 의학적으로는 성립할 수 없지만, 게임의 시스템 안에서는 플레이 자체를 이끌어내는 규칙의 일부로 해석할 수 있다. 게임 속에서 나타난 비현실적인 현상들은 모두 게임 자체가 성립되기 위한 이유로서 설명할 수 있다. 이 비현실적인 현상들은 곧 이 게임의 시스템으로서 규칙과 플레이를 구성하고 문화적 맥락을 통해 게임으로서의 ‘장르’에 대한 설명으로 정립된다.

소위 말하는 UI와 인터페이스는 게임에서 보여지는 비현실적 체험의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게임의 캐릭터는 게임의 규칙과 시스템을 통해 독특한 신체성을 지닌다. 게이머는 〈사진 2〉처럼 UI를 통해 지도와 내가 가진 무기의 잔탄량의 수, 그리고 나의 HP와 같은 정보를 전달받는다. 혹은 〈사진 3〉처럼 주머니 속에 엄청난 양의 장비를 보관할 수 있다. 

〈사진 2〉 〈세인츠 로우3〉(볼리션, 2011년)의 인터페이스
〈사진 3〉 〈바이오 해저드4〉(캡콤, 2005년)의 인벤토리

이 시스템으로 인해 게이머는 마치 첨단기술로 무장한 공간의 한계를 넘어선 신체를 부여 받는다. 게임은 기호적 세계 속에 있기 때문에 자연주의적 현실과는 다르다. 가장 문제시되는 것은 이런 물적 공간의 한계가 사라지며 시간의 불가역성을 거스른다는 것이다.

사실 게임은 현실에 가까워질수록 재미가 반감된다. 게임이 재미있는 이유는 현실을 그대로 재현해서가 아니라 위와 같은 현실에서 불가능한 것들이 게임의 메커니즘에서 구축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메커니즘을 구성하는 기호와 규칙들의 완성을 위해 현실성은 우선 고려대상이 아니다. 놀이와 도전의 연속을 위해서는 인류역사상 손을 꼽을 정도로 몇 번 벌어진 적 없는 일이 몇 번이고 반복되어야 한다. 현실 속에서 의학적으로 즉사한 사람이 다시 부활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게임 속에서는 그렇게 놀라운 일도 아니다. 오히려 게임이기 때문에 가능한 꼭 이루어져야 하는 당연한 현상에 가깝다. 여기서 필자는 게임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추가하고자 한다. 바로 게임이란 자연주의적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현상 혹은 행위를 구현한 디지털 매체다.

 

3. 멀티세이브와 무한 컨티뉴 : 게임체험이 야기하는 평행우주와 루프

게임의 장르에 따라 규칙과 재미를 만들어 내는 메커니즘이 서로 차이를 보이면서 비현실적 경험들은 다양한 양상을 띤다. 게임적 체험은 다양한 방식으로 세분화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우 공통적으로 보이는 현상이 하나 있다. 대부분의 게임 속 주인공들은 시스템 상에서 영생을 누리는 존재들이다. 이들은 죽음이라는 기호를 통해 게임오버를 거쳐 가더라도 컨티뉴를 통해 부활의 기회를 얻게 된다. 단순한 ‘시간 죽이기’를 위한 게임이 아닌 플레이타임이 100시간을 넘어가는 대작게임에는 세이브 & 로드 기능이 필수적으로 시스템에 포함되어있다. 컨티뉴 그리고 세이브 & 로드를 포함한 게임의 대리 체험과 가상현실은 이전 인류의 놀이와 결정적인 차이를 만들어낸다. 바로 루프와 평행우주다.

- 멀티세이브시스템으로 인한 평행우주

양자역학에서 말하는 평행우주라는 개념은 주로 인간의 선택에 의해서 갈라지는 다양한 가능성의 우주를 말한다. 게임은 결국 어떤 행동을 할 것인가에 대한 다양한 선택의 연속이다. 평행우주에는 상수와 변수라는 개념이 있다. 수많은 평행우주에도 항상 존재하는 것을 상수라고 한다면 그 상수에서 시작하여 선택으로 인해 다른 형태로 갈리는 것을 변수라고 한다. 게임을 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진 플레이어가 상수라고 한다면, 플레이어의 선택에 따라 달라지는 세계를 변수라고 할 수 있다. 

게임에서 선택은 매우 중요하다. 게임을 한다는 것은 행동과 결과를 의미 있는 방식으로 뒷받침하도록 디자인된 게임 시스템 안에서 여러 가지 선택을 한다는 뜻이다. 모든 행동은 시스템 전체에 영향을 주는 변화를 낳는다. 이것은 곧 게임의 가장 큰 특징중 하나인 상호작용과도 연결된다.11)

그 선택의 대가는 매우 커야 한다. 하지만 게임제작자는 항상 잘못된 선택을 한 플레이어가 역전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주어야 한다. 게이머들은 문제를 풀기 위해 다양한 선택을 하게 된다. 그리고 선택의 결과는 비선형적인 구조를 가진 게임 속에서 수많은 평행우주를 만들어낸다. 

〈사진 4〉 〈엘더스크롤5 : 스카이림〉(베데스타 소프트윅스, 2011년)
〈사진 5〉 〈폴아웃 : 뉴 배가스〉(베데스타 소프트윅스, 2010년)

게임 〈엘더스크롤 5 : 스카이림〉에서 플레이어는 자신의 종족과 사용하는 무기 그리고 마법을 선택할 수 있으며, 자신의 특기를 지정할 수 있다. 〈사진 5〉 그리고 그의 게임 속 인생의 선택에 따라 스카이림 대륙을 지배하는 지배계층을 바꿀 수도 있다. 핵전쟁 이후의 미국을 다루고 있는 게임 〈폴아웃 : 뉴 베가스〉에서 플레이어는 한 배달부가 되어 정체불명의 조직에게 습격당해 배달할 물건을 빼앗기고 생매장 당한다. 〈사진 6〉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배달부는 자신을 습격한 자들을 추적하며 모하비 황무지의 세력타툼에 휘말리게 된다. 여기서 게이머가 선택한 집단은 모하비 황무지의 패권을 잡고 미국의 역사를 바꾸게 된다.

플레이어의 선택에 따라 달리진 수많은 시나리오를 체험하면서 수많은 상황을 세이브한다면 이 게임이 설치된 컴퓨터 안에는 수많은 평행우주로 가는 입구가 존재하는 것이다. 

- 무한컨티뉴 시스템을 통한 부활과 루프

게임의 상황은 항상 일정한 순간의 자의던 타의던 결국 항상 세이브를 진행하며 게임오버의 순간의 가장 최근의 세이브한 상황을 로드한다. 게임은 재도전의 연속이다. 게임오버가 출력되더라도, 항상 시스템은 다시 도전하시겠습니까? 라고 게이머에게 묻는다. 이것은 시스템에서나 게이머의 관념에서나 동시에 진행되고 있는 질문이다. 그로 인해 게임 속에서 캐릭터는 끊임없이 도전하는 행위를 통해 몇 번의 부활의 경험을 반복하게 된다. 혹은 몇 번이고 같은 적과의 전투를 반복할지 도모른다. 고전게임 〈마계촌〉의 아서는 2번 적에게 공격받으면 해골이 되어 즉사하지만 컨티뉴를 통해 다시 스테이지 처음부터 부활할 수 있다. 〈사진 6〉 그는 공주를 구할 때까지 수없이 많은 루프를 반복해야 한다. 이것은 가장 위대한 게임으로  칭송받는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는 물론 수많은 게임의 주인공들이 공유하고 있는 현상이다.

〈사진 6〉 〈마계촌〉(캡콤, 1985년)
〈사진 7〉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닌텐도, 1985년)

일정한 시간을 기점으로 죽음에 이른 캐릭터를 통해 몇 번이고 같은 경험을 반복하게 되는 컨티뉴의 연속은 일종의 루프의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루프를 반복하면서 방금 캐릭터가 얻은 경험치나 레벨, 아이템은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며, 주인공을 게임오버에 이루게 한 그가 도전해야 하는 문제 역시 같은 환경에서 재현된다. 이 루프를 통해 플레이어에게는 같은 상황을 반복하는 경험을 축적하게 된다. 이 루프에서 탈출하는 방법은 곧 하나, 목표를 완수하고 게임을 클리어하는 것이다. 이 무한컨티뉴와 멀티 세이브 시스템으로 구현되는 평행우주와 루프의 경험은 수많은 게임에서 가능한 게임체험일 것이다. 이것은 게임이 무엇인가를 논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라고 할 수 있다.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과 같이 게임을 소재로 한 영화(그 외에 다른 매체 포함)들이 항상 표면적인 겉핥기에서 멈추어버리는 이유는 이런 게임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앞에서 서술했던 게임에 대한 정의를 다시 수정해본다. 게임이란 평행우주와 루프에 대한 디지털시뮬레이터다.

4.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

게임 속 캐릭터들은 이 루프와 평행우주를 인식하지 못하지만, 게이머들은 항상 이 과정을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최근의 게임 기술은 게이머들이 세이브와 로드 그리고 컨티뉴를 인식하지 못하게 할 정도로 까지 발전해왔다. 자연주의적 현실에서는 불가능하지만, 상상력으로 구현된 게임 속에서만 가능한 행위 혹은 현상에 대해서 게이머들이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것은 그것을 게임의 시스템으로서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기 때문이지만, 이제는 그것이 게임체험이라는 것으로 조차 이해하지 인식하지 못하는 단계로 까지 진입한 것이다. 게이머가 게임을 게임의 체험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더욱 더 높은 단계의 몰입으로 이어진다. 게임의 비현실적 현상의 지속적 노출은 이것이 게임이라는 것을 게이머에게 알려주면서 그 자체의 가상현실에 대한 몰입을 방해한다. 게임을 구성하는 현상들이 자연스럽게 네러티브의 일부로 녹아들면 당위성을 갖추기 시작하면 게임의 몰입은 크게 증가한다.

〈사진 8〉 〈데드 스페이스2〉(비서럴게임즈, 2011년)
〈사진 9〉 〈언차티드〉(너티독, 2009년)의 수첩

호러 TPS게임 〈데스 스페이스〉의 세계관에는 RIGResource Integration Gear라는 특수한 장비가 등장한다. 척추에 달려있는 이 장비는 신체 보호복 겸 휴대용 소형 컴퓨터로서, 자신의 신체상태가 어떤지를 바로 확인할 수 있도록 척추 부분에 체력 게이지가 붙어 있다. 〈사진 8〉을 자세히 보면 주인공이 장착하고 있는 RIG에는 주인공의 HP가 표시되어 있으며, 그가 들고 있는 무기에는 잔탄량이 출력된다. 이 게임 플레이 장면은 괴물과 미지의 공간이라는 요소만 제외하면 마치 있는 그대로를 묘사한 사진 같다. 이런 연출방식은 게임화면에서 최대한 인터페이스를 화면상에 노출하지 않는 방식이다. 게임 〈언차티드〉에서 플레이어가 게임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힌트를 출력하면 캐릭터가 수첩을 꺼내 해당 페이지를 열고 카메라가 그 수첩을 따라 움직인다. 〈사진 9〉 인터페이스 혹은 UI라고 정의되는 화면상의 모든 정보는 실제 그 세계의 귀속된 것으로 대체된다. 그리고 게이머는 점점 게임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인의적 그리고 비현실적 요소와 멀어진다. 

게임 〈어쌔신 크리드〉시리즈는 앞에서 말한 세이브 & 로드, 컨티뉴 시스템이 정당화 되는 게임이다. 독특하게도 이 게임은 메타이야기적인 게임이면서, 게임 속에서 게임을 하는 흔치 않은 경험을 제공한다. 암살단의 후손인 데스몬드는 그 암살단의 비밀을 파헤치려는 성당기사단에게 납치당하여 엡스테고라는 한 회사에 억류된다. 그는 엡스테고의 협박으로 인해 애니머스라는 기계 속으로 들어가 자신의 선조인 알테어라는 암살자의 인생을 대리 체험한다.

게임을 단순한 놀이를 넘어 인생 혹은 경험의 대리체험으로서 인식할 때 데스몬드는 자신의 선조의 인생을 대리체험 하면서 그 안에서 실패할 경우 목숨을 위험 받는 무서운 게임에 돌입하게 되는 셈이다. 애니머스라는 기계는 데스몬드의 선조인 알테어의 유전자를 분석하여 그의 기억을 하나의 가상현실로 구현할 수 있다. 그의 인생의 기억과 비밀을 더 자세히 알기 위해서는 사용자가 들어가 (그와 유전적으로 가장 가까운 후손) 그의 인생의 기억을 따라가면서 동기화를 해야 한다. 이 과정이 플레이어에게는 곧 플레이의 경험이 된다.

〈사진 10〉 〈어쌔신 크리드〉(유비소프트, 2007년) 애니머스에 들어가는 데스몬드
〈사진 11〉 데스몬드의 선조 알테어
〈사진 12〉 게임 〈어쌔신 크리드〉의 중층화(重層化)된 내러티브와 멀티세이브 시스템

플레이어는 게임기 하드웨어를 통해 데스몬드가 되고 데스몬드는 그 안에서 애니머스를 통해 알테어가 된다. 데스몬드가 애니머스를 통해 알테어가 되는 경험은 게이머가 게임을 통해 인생을 사는 것과 매우 유사한 경험을 하게 되는 샘이다. 데스몬드가 애니머스에서 죽으면 이전의 기억으로 되돌려 다시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이런 부활과 루프의 과정은 〈어쌔신 크리드〉시리즈에서는 비현실적인 요소가 아닌 그 세계관에서 벌어지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어쌔신 크리드〉는 게임의 세계를 이야기의 층과 (애니머스 속의) 메타이야기의 층으로 나누고 데스몬드 이외의 인물들을 모두 이야기적인 캐릭터로 그리면서 데스몬드를 게임적, 메타이야기적 플레이어로서 그리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증층화重層化를 도입함으로서 〈어쌔신 크리드〉는 무한컨티뉴와 멀티세이브 시스템을 네러티브의 자연스러운 일부로서 적용시킨 것이다. 데스몬드는 자신의 선조들의 기억을 통해 하나의 메시지를 받게 되고 새로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물론 지금까지 데스몬드를 통해 애니머스를 플레이 한 게이머 역시 새로운 인식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게임체험의 비현실적이라는 요소가 네러티브와 하나가 되면서 당위성을 지닌다. 이로서 게이머는 그 세계의 네러티브를 체험하면서 게임의 비현실적 체험을 당연히 가능한 현상으로서 받아들이게 된다. 그 순간만큼 이 가상현실은 게이머에게 무엇보다 리얼한 순간이다. 게이머가 이와 같은 몰입과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순간 게임적 리얼리즘이 탄생한다. 게임은 기술의 발전을 거듭하면서 더더욱 현실에 가까워지고 있다. 밀리터리 액션게임에서 그려지는 총격전은 거의 실사를 방불케 하며, 심지어는 판타지 RPG에서 그려지는 드래곤과 같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은 이형의 괴물들까지 점점 더 현실적으로 묘사된다. 게이머들은 이것을 보고 진정으로 현실적이라고 느끼며 경탄한다. 하지만 그들이 이것을 리얼하다고 느끼는 것은 단순히 그래픽적인 표현 방법의 기술적 발전의 결과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바로 이것은 그들이 일상에서 경험해보지 낯선 체험으로부터 오는 리얼함에 근거한다.

‘게임적 리얼리즘’은 일본의 평론가 아즈마 히로키의 저서 〈게임적 리얼리즘〉으로 인해 처음 제시되었다. 아즈마 히로키는 일본의 애니메이션과 라이트 노벨을 통해 캐릭터 소설이 가진 필연적인 메타 이야기적인 상상력이 하나의 시작과 하나의 결말을 가질 수밖에 없는 소설이라는 형식에 침입했을 때 그 접점에서 생겨나는 리어리즘을 ‘게임적 리얼리즘’정의했다.12) 하지만 나는 그가 미소녀 게임이나 라이트노벨 즉 서브컬쳐를 이해하고 해석하기 위해 제시한 이 개념을 게임 그 자체를 해석하기 위핸 개념으로 이해하고 싶다.

〈사진 13〉 〈콜 오브 듀티 : 모던 워페어 3〉(인피니티 워드, 슬렛지해머 게임즈, 2011년)
〈사진 14〉 〈엘더스크롤5 : 스카이림〉(베데스타 소프트윅스, 2011년)

과거 게임의 목적은 대부분 세속적인 것들과 관련이 있었다. 소위 말하는‘정의를 지키는 히어로’가 주인공인 게임들 역시 비폭력이 아닌 경쟁과 파괴행위를 통해 목적을 달성했으며, 게임의 문화적 맥락을 아우르는 이해관계의 선악이 모호해 질수록 다양한 목적을 가진 캐릭터들이 등장했다. 게임 속 주인공을 움직이게 하는 네러티브와 스토리텔링은 일상을 파괴하며 주인공을 모험으로 불러들이면서 시작된다. 그 누구도 게임 속에서 차례대로 줄서기, 청소하기와 같은 윤리적인 행동을 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이것이야 말로 게임이 아닌 노동이며, 이런 노동을 게임플레이로 내세우는 게임제작자들은 게임의 본질을 모독하는 것이다.

게이머들은 게임 속에서 지배자이자 약탈자가 되길 꿈꾸며, 자신의 성적욕망을 꿈꾸기도 한다. 게임 속에서 등장하는 적이 악마가 되어도 독일나치가 되어도 혹은 SF적 디스토피아에서 톨킨의 상상력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판타지 세계라도 이런 세속적인 욕망들은 수많은 게임들이 공통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욕망을 이루는 과정은 형성하는 게임의 시스템은 대부분 유사한 인터페이스 디자인을 가지고 있는데, 노골적으로 게임이라는 것을 드러내면서 전혀 다른 이야기를 이미 익숙한 이야기로 만든다. 배경이 달라도 주인공이 달라도 심지어는 목표가 달라도 모두 같은 이야기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게임이라는 가상현실이 장자가 체험했던 호접몽과 같이 순간적으로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느낌을 주기 위해서라면 그 꿈이 항상 낯설어야 한다. 이미 이전에 경험했던 꿈과 유사한 꿈은 어떤 호기심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시스템이 네러티브의 일부가 된다는 것은 곧 그 세계로 돌입한 게이머에게 새로운 낯선 환경을 제공하는 것이며, 지각의 자동화를 피할 수 있게 된다. 이는 더욱 세련된 스토리텔링을 가능케 하며, 단순히 디지털 기계를 잡고 놀고 있는 인간을 가상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새로운 자아로 만들어준다.

게임이라는 가상현실을 낯설게 하는 순간 게이머에게 있어서 게임체험은 하나의 경험으로서 받아들여지게 된다. 게임적 리얼리즘은 결국 게이머가 이것이 현실이다 혹은 리얼하다고 인식하게 되는 단계를 말한다. 이것은 결코 현실과 가상을 구분하지 못하는 단계의 게임중독으로 인한 정신적인 붕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인간은 수많은 경험을 통해 자신을 완성해나간다. 게이머들이 게임 속의 비현실적인 현상들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인식체계에는 게임의 체험을 자신의 삶의 한 부분 즉 자신의 인생에서 체험했던 한 경험으로서 받아들이는 인식론이 작용하는 것이다. 엔딩에 다다른 게이머가 새로운 인식으로 인해 세상을 바라본다면 이 과정을 통해 게임적 리얼리즘이 탄생하게 된다. 

다음 소개할 게임 〈바이오 쇼크 : 인피니트〉는 그 스토리와 시스템을 통해 극한의 몰입을 이끌어내는 게임적 리얼리즘에 대한 게임이다. 기술적 완성도와 함께 이 게임의 구조는 어떤 방식으로 게임적 리얼리즘이 실행되는 가를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사진 15〉 〈바이오 쇼크 : 인피니트〉(이레셔널 게임즈, 2013년)

5. 게임적인 게임 〈바이오 쇼크 : 인피니트〉

〈바이오 쇼크 : 인피니트〉는 〈어쌔신 크리드〉시리즈 그 이상으로 게임적 리얼리즘을 내러티브로서 구현한 게임이다. 이래셔설 게임즈에서 제작한 〈바이오 쇼크〉시리즈는 대대로 무거운 주제의식을 가지고 있다.  1편과 2편에서는 각각 자유의지주의와 전제주의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었다. 〈바이오 쇼크 : 인피니트〉는 극단적 애국주의 혹은 인종차별주의와 극우사상을 비판하는 주제의식을 전달함과 동시에 그 비유를 위해 양자역학의 개념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이 게임에서 게임적 리얼리즘의 루프와 평행우주적 상징에는 엘리자베스라는 여주인공의 역할이 매우 중요한데, 그녀를 통해 벌어지는 모든 행위는 게임적 리얼리즘이면서 동시에 이 게임의 주제를 역설하며, 플레이어가 새로운 인식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는 기준점이 된다.

〈사진 16〉 콜롬비아로 가는 등대의 입구의 쪽지
〈사진 17〉 등대에서 발견된 누군가의 시체

- 콜럼비아와 한 남자

1910년 핑커톤 탐정 사무소 소속의 탐정이었던 부커 드윗은 과격한 일처리 방식으로 불명예 퇴직을 당한 후 사설탐정으로 일한다. 지나치게 도박에 빠져든 부커는 큰 빛을 지고 곤란한 상황에 처한다. 그에게 한 수수께끼의 인물로 부터 “소녀를 데려오면, 빚을 청산해 주겠다(bring us the girl and wipe away the debt)”라는 의뢰가 들어온다. 

부커는 의뢰를 받고 공중도시 컬럼비아에 20년 가까이 갇혀 있었던 엘리자베스라는 여성을 데려오기 위한 험난한 여정을 떠난다. 바다 한 가운데에 자리잡은 등대에 다다른 부커는 생전 처음 보는 기계장비를 타고 공중도시 컬럼비아로 들어간다. 지상세계에서 볼 수 없는 첨단기술로 만들어진 공중도시의 신세계에 압도당한 부커는 공중도시를 둘러보던 중 충격적인 인종차별의 현장을 목격하고 생명을 위협받는 온갖 수난을 겪게 된다. 

〈사진 18〉 동전던지기를 시키는 루티스 남매, 결과는 모두 앞면 즉 122번째 앞면이다.
〈사진 19〉 동전던지기를 시키는 루티스 남매, 결과는 모두 앞면 즉 122번째 앞면이다.

- 122번째 루프

컬럼비아로 진입하기 위한 입구인 등대로 부커 드윗을 대려다 준 과학자 쌍둥이인 로버트 루티스와 로잘린드 루티스 남매는 이야기의 복선이 되는 중요한 대사를 던진다. 등대로 들어간 부커는 등대 앞에서 ‘여자를 데리고 오면 빛을 청산해 주겠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다(bring us the girl and wipe away the debt, this is your last chance)’라는 쪽지를 발견한다. 그리고 등대 안에서는 머리에 자루를 뒤집어 쓴 남자의 시체와 함께 ‘우리를 실망시키지 마라’라는 메시지가 남겨져 있다. 게이머들은 게임을 진행하면서 이 메시지들을 마치 등대로의 진입이 여러 번 반복되고 있다는 것 같은 묘한 복선으로 느끼게 된다.

로버트: 우리 다시 노젓기로 돌아가도 될까? (Can we get back to rowing?)
로잘린드: 안 그러면 그곳에 도착하질 못 할테니 그러는 게 좋겠어. (I suggest you do or we're neveer going to get there.)
로버트: 아니. 내 말은 네가 좀 도와주면 무척 고맙겠단 얘기야. (No. I mean I'd greatly appreciate it if you would assist.)
로잘린드: 저 남자한테 부탁하는 건 어때? 나보다는 저 남자가 더 그곳에 가고 싶어할 텐데. (Perhaps you should ask him? I imagine he has a greater interest in getting there than I do.)
로버트: 아마도 그렇겠지. 하지만 그래봤자 소용없어. (I suppose he does. But there's no point in asking.)
로잘린드: 왜 소용없는데? (Why not?)
로버트: 왜냐면 노를 안 저으니까. (Because he doesn't row.)
로잘린드: 노를 안 젓는다고? (He doesn't ROW?)
로버트: 그래. 저 사람은 노를 안 젓는다고. (No. He DOESN'T row.)
로잘린드: 아. 무슨말인지 알겠어. (Ah. I see what you mean.)

컬럼비아의 진입한 부커 드윗이 다시 루퍼트 남매를 만났을 때 그들은 부커에게 동전 던지기를 시킨다. 동던을 던진 부커 드윗은 앞면이 나온 것을 확인하고 뒤를 돌아서는 데 놀랍게도 루버트의 매고 있는 판낼에는 122번의 앞면이 나왔다는 표시가 되어 있다. 이 현상들은 플레이어(부커)가 경험하고 있는 지금까지의 게임 체험이 122번째 반복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등대로 진입하기 전 두 쌍둥이의 대화는 부커가 평행 세계를 겪을 동안 몇 번이고 부탁해 봤지만 단 한 번도 같이 노를 저어주지 않았다는 얘기를 의미하며, 등대의 시체는 이전 루프에서 임무에 실패한 부커 드윗의 시체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다. 과연 어떻게 122번의 루프가 가능한 것인가?

〈사진 20〉 게임의 여주인공 엘리자베스
〈사진 21〉 영화 〈스타워즈 : 제다이의 귀환〉이 개봉된 80년대의 파리골목이 보이는 균열을 열고 있는 엘리자베스

- 균열의 문을 여는 소녀 엘리자베스

공중도시 컬럼비아는 제커리 해일 콤스톡이라는 극우주의 정치가이자 사이비종교의 교주가 지배하고 있는 위험한 광기를 가진 도시다. 그는 자신의 딸인 엘리자베스를 거의 20년 가까지 거대한 탑에 가두어 두고 있었다. 오른손의 새끼손가락이 없는 그녀는 균열(Tear)이라고 불리는 시공간을 찢어버리는 특수한 초능력을 가지고 있는데, 그녀는 집적적으로 이 균열에 개입하여 다른 평행세계로 가는 문을 열거나 물건을 끌어올 수 있다. 혹은 아 에 두 가지의 평행우주를 합쳐서 현실을 바꿀 수도 있다.

게임 〈바이오 쇼크 : 인피니트〉에는 무한컨티뉴를 가능케 하는 것은 바로 그녀의 능력이다. 엘리자베스를 데리고 탈출하려는 부커 드윗이 혹시 컬럼비아의 군경찰들과의 전투에서 사망하면 엘리자베스는 부커를 안전한 장소로 데려가 무언가를 주사하거나 하는 방식으로 되살리고 다시 죽기 이전의 장소로 되돌린다. 이것은 엘리자베스가 부커가 바로 죽기 이전의 순간 시공간을 열어 부커를 치료하고 다시 죽기 이전의 장소로 되돌리는 것으로 보인다.13) 

〈바이오쇼크 : 인피니티〉의 무한컨티뉴의 경험은 엘리자베스라는 초능력을 가진 캐릭터에 가능한 경험으로서 그려진다. 부커 드윗이 122번째 엘리자베스를 구하기 위해 컬럼비아로 가는 여정을 반복할 수 있는 이유는 〈바이오쇼크 : 인피니티〉 세계관의 매우 중요한 요소인 차원의 균열이 크게 작용하고 있으며, 평행우주와 루프라는 게임적 체험의 특징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사진 22〉 사립탐정 부터 드윗과 극우사상가 콤스톡은 동일인물이다.
〈사진 23〉 사립탐정 부터 드윗과 극우사상가 콤스톡은 동일인물이다.
〈사진 24〉 그리고 엘리자베스는 부커 드윗이 과거에 콤스톡에서 팔아 넘긴 자신의 친딸이다.

- 끝없는 퍼져나가는 평행우주 그리고 소멸 

평행우주는 인간의 선택을 통해 형성되며 끝없이 퍼져나간다. 게임이 플레이어라는 상수의 선택을 통해 수많은 변수라는 평행우주를 만들어나가는 것처럼 〈바이오 쇼크 : 인피니티〉의 평행우주는 바로 부커 드윗이라는 상수의 선택을 통해 형성된다. 사실 이 부분에는 부커 드윗이라는 주인공의 개인사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부커는 16살 소년병으로 군에 입대하여 운디드 니 전투에 참여 인디언 학살에 관여하면서 PTSD에 시달리게 된다. 부커는 거기서 해방되고자 스스로 세례를 받기 위해 성직자 앞에 선다. 여기서 분기가 갈리면서 이야기는 평행우주적 규모로 진행되는데, 세례를 받기 직전의 부커는 일종의 상수의 개념에 속하는 인물이다. 어느 우주에서 세례를 받기 위해 성직자 앞에선 부커는 존재한다. 여기서 2가지의 변수가 발생한다.

변수A : 부커 드윗은 세례를 한다고 과거의 죄를 씻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세례를 거부한다. 방탕한 생활을 이어가던 부커는 한 여자를 만나 가정을 꾸려 안정을 취한다. 하지만 출산 중에 아내가 사망, 절망에 빠진 부커는 딸 안나를 팔아넘기고 방탕한 생활을 이어간다.

변수B : 세례를 받은 부커 드윗은 이름을 콤스톡으로 개명한다. 그는 로잘린드 루티스라는 과학자의 도움으로 극우와 백인우월주의로 가득 찬 공중도시 컬럼비아를 건설한다. 콤스톡은 양자역학실험에 참여하면서 급격한 노화와 무정자증을 겪는다. 자신의 그는 과학의 힘으로 변수A의 부커 드윗이 사는 평행우주로 가는 문을 열어 부커 드윗의 딸을 데려온다. 그는 딸 안나에게 엘리자베스라는 이름을 붙이고 탑안에 가두어 억류한다.

즉 이 게임의 스토리는 변수A의 부커 드윗이 변수B의 콤스톡이 사는 평행우주로 넘어가면서 벌어지는 사건이다. 컬럼비아는 엘리자베스의 영향으로 인해 곳곳에 크고 작은 균열이 노출되어 있었다. 즉 컬럼비아라는 도시 자체는 무한세이브시스템이 언제든지 가능한 도시다. 부커는 컬럼비아를 탐험하면서 크게 4번의 평행우주를 건너가게 된다. 변수B의 콤스톡이 지배하는 컬럼비아(가 존재하는 우주) - 무기 기술자 첸링을 찾아 넘어간 컬럼비아 - 유색인종들이 공산주의 혁명을 일으킨 컬럼비아 - 타락한 엘리자베스가 1984년 뉴욕을 침공하는 컬럼비아. 새로운 평행우주로 넘어간 부커 드윗은 자신의 기억을 재구성하면서 기억의 혼재를 느끼고 격한 어지러움을 동반하는 코피를 흘린다. 게임이라는 평행우주 밖에서 게임을 플레이 하고자 하는 유저는 곧 상수라고 할 수 있다. 유저는 곧 게임을 진행하면서 선택을 하고 그에 따른 평행우주를 생성한다. 그리고 새로운 플레이를 위해 각각의 평행우주를 넘나들면서 플레이어는 기억을 가지고 있지만 그의 분신이 되는 캐릭터는 새로운 신체와 새로운 기억을 가지게 된다. 

〈사진 25〉 부커 드윗은 평행우주 건너가면서 기억의 혼재를 느끼고 이전의 기억을 상실한다.

게임의 멀티세이브가 선택으로 인한 평행우주를 만들어나가는 체험이라면 이 행위는 변수A 부커 드윗의 여정은 곧 플레이어가 자신이 결과로 인해 만들어진 수많은 세이브 파일을 넘나드는 행위에 대한 은유로 해석할 수 있다. 부커드윗이 경험하게 되는 엘리자베스의 능력을 통한 루프와 평행우주를 넘나드는 여정은 앞에서 말한 게이머의 게임체험과 매우 유사하다.

〈바이오 쇼크 : 인피니티〉의 세계관은 주인공의 죄책감으로 형성되어 있으면서 운명론적인 결론에 다다른다. 과거 부커 드윗(변수A)은 자신의 딸 안나 드윗 즉 엘리자베스를 다른 차원의 자기자신(변수B)에게 팔아 넘겼다. 그는 루티스 남매에 의해 변수B의 세계로 엘리자베스를 구하러 가면서 과거 딸을 버렸던 기억을 조작한다. 결국 컬럼비아는 지상을 소돔 즉 타락한 세상으로 규정하고 지상세계를 폭격하게 된다. 그것은 변수B로 시작되는 수많은 평행우주의 똑같은 종착점이다. 부커 드윗은 엘리자베스를 구하려고 하지만 그 어떤 우주에서도 결국 실패하고 엘리자베스는 타락한다. 부커는 결국 콤스톡을 살해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자베스가 세계를 파멸로 몰아넣는 미래는 바꿀 수 없다. 어차피 또 다른 평행우주에서 살아남은 콤스톡이 세계를 멸망으로 몰아넣기 때문이다. 진정 이 끝없는 루프를 종결시키는 방법은 따로 있었다. 부커 드윗은 엘리자베스와 함께 차원의 문을 열어 자신이 과거 세례를 받으려고 했던 한 강가로 넘어간다. 그곳에서 부커 드윗은 다른 평행우주에서 건너온 수명의 엘리자베스들과 마주친다. 자신이 과거 세례를 거부하면서 동시에 세례를 받으면서 콤스톡이 태어났던 진실을 알게 된 부커 드윗은 콤스톡의 탄생을 막기 위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다. 그로 인해 수많은 콤스탁이 태어나 세상을 파멸로 이끌 수많은 평행우주가 사라지면서 엘리자베스 역시 사라진다. 즉 이전부터 122번째 이상 반복되어왔던 루프가 종결되고 드디어 게임이 클리어된 것이다.

〈사진 26〉 수많은 평행우주에서 넘어온 다른 엘리자베스'들'
〈사진 27〉 부커는 그녀들의 손에 의해 죽음을 받아들인다.

- 현실로의 귀환, 그리고 변수가 된 플레이어

콤스톡의 평행우주가 사라진 후 기나긴 잠에서 깨어난 부커는 애타게 자신의 딸 안나(엘리자베스)를 찾는다. 그리고 그가 안나의 방에서 인기척을 느끼고 방문을 여는 순간 게임이 끝난다. 과연 여기서 안나를 찾는 부커 드윗은 어떤 부커 드윗인가? 엘리자베스는 부커 드윗의 딸로서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는 것일까? 사실 이것은 중요하지 않다. 자신의 딸을 애타게 찾는 부커 드윗은 드디어 이 무한의 루프에서 벗어난 게이머 자신을 상징하며, 그가 안나를 찾는 행위는 그 경험을 통해 새로운 인식을 가지게 된 게이머에 대한 비유로 읽을 수 있다.

게임 〈바이오 쇼크 : 인피니트〉는 지극히 게임적인 게임이다. 이 게임은 스토리의 상징과 비유를 통해 극우주의, 역사왜곡, 종교적 광신을 비판하지만, 그 스토리 속에 그려진 부커 드윗의 여정은 게이머 게임체험과 매우 흡사하다. 무한 컨티뉴와 멀티 세이브 시스템으로 이루어지는 무한루프와 평행우주는 세계관의 일부로서 자연스럽게 내러티브와 결합되어 있다. 

게임체험을 내러티브로 녹여낸 게임의 규칙은 단순한 규칙이 아니라 하나의 인식론적인 기반이 된다. 이것의 의미는 단순히 기술적으로 세이브 엔 로드 시스템을 자연스럽게 감추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루프와 평행우주를 반복하는 부커드윗의 여정은 우리가 나 자신의 인생의 경험으로 받아들이면서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으로 이어진다. 그는 어떻게 해도 엘리자베스를 구하지 못 할 운명이었으며, 컬럼비아는 지상을 폭격할 운명이었다. 하지만 부커는 평행우주를 넘어가 스스로 죽음을 맞이하면서 수많은 우주를 구원했고 운명을 바꾸었다. 이것은 게임의 세계에 대한 인식이 이런 서사가 보여주는 양식처럼 무한한 가능성 속에 놓인 수많은 선택을 해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게임은 단순한 놀이나 시뮬레이트가 아닌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무한하게 열려있는 형식이다. 선택은 평행우주를 만들고 플레이어는 무한루프를 넘어 미션을 클리어한다. 게임적 인간이란 무의미한 디지털 매체의 중독에 빠진 인간이 아니다. 그저 승패가 정해져 있는 선택이 아무 대가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게임을 하는 인간, 그저 운명 속에 빠진 인간은 게임적 인간이 될 수 없다. 게임적 인간은 루프와 평행우주와 같은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두는 인간이다. 

책 『The Art Of Game Design』에서 제시 셸Jesse Schell은 게임은 경험하게 하지만, 경험 자체는 아니라고 정리했다. 플레이어와 게임은 실제 하지만 경험은 허구이며, 게임 디자인은 그 허구의 질로 평가를 받는다.14) 하지만 필자는 게이머가 그 허구를 리얼한 경험으로서 받아들이고, 그들이 이 경험을 통해 새로운 인식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면 분명 경험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진실된 허구를 통해 진정한 의미의 게임적 리얼리즘이 탄생하게 되기 때문이다. 정리하자면 게임이란 디지털매체를 통해 인간이 리얼하다고 느끼는 모든 경험을 말한다. 게임은 과거에도 지금도 항상 이렇게 리얼한 경험이었다. 게임 속에서는 무한루프도 평행우주도 지극히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1) 필자.
2) Jesse Schell, 『The Art Of Game Design』, CRC Press; 1 edition, 2008, p.75
3) 위의 책, p. 76.
4) 위의 책, p. 79.
5) 위의 책, p. 83.
6) 김우진, 「RPG의 해석학 : 용자」, 『게이머즈』 2001년 7월호, p. 130.
7) 김우진, 「액션의 해석학」, 『게이머즈』 2002년 8월호, p. 160.
8) 김우진, 「슈팅의 해석학」, 『게이머즈』 2002년 9월호, p. 112.
9) 김우진, 「연애시뮬레이션 게임의 해석학」, 『게이머즈』 2002년 10월호, p. 141.
10) KATIE SALEN & ERIC ZIMMERMAN, 윤형섭, 권용만 역, 『게임 디자인 원론 1』 지코사이언스, 2010, p. 32.
11) 위의 책, p. 126.
12) 아즈마 히로키, 장이지 역, 『게임적 리얼리즘』, 현실문화연구, 2012, p. 108.
13) 인터넷 상에서는 다른 평행우주의 부커를 데리고 오는 것이라는 해석이 제시된 적도 있다, 단 엘리자베스가 없거나 스토리상 떨어져 있는 상태에서라면 부커가 자신의 사무실 현관문 앞으로 이동하여 문을 열고 나가면서 다시 시작한다. 부활에 어느 정도 돈이 필요하기 때문에 돈이 100$ 미만이거나 고난이도의 '1995 모드'에서는 게임 오버가 된다.
14) Jesse Schell, 앞의 책, p. 49.


박원호1) 서울 출생. 한신대학교 디지털문화콘텐츠학과 졸업. 블루홀 스튜디오 근무. 한국콘텐츠아카데미 게임콘텐츠제작 1학년 과정 수료하였으며, 현재 2학년 과정 중.

 

 

* 《쿨투라》 2014년 봄호(통권 33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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