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회 쿨투라 신인상 연극평론 부문 당선작] 영원과 한계, 그리고 우리: 연극 〈맨 프럼 어스〉 공연평
[제8회 쿨투라 신인상 연극평론 부문 당선작] 영원과 한계, 그리고 우리: 연극 〈맨 프럼 어스〉 공연평
  • 손옥주
  • 승인 2015.03.30 0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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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 속에서 순간을 환기하는 방법

바야흐로 우리 몸에 저장된 시간을 호흡하며 살아가는 아카이브의 시대다. 더불어, 몸에 기록된 연대기적 시간이 길어진다는 게 터부시되던 시대도 어느덧 과거가 되어버렸다. 아카이브화된 몸의 일상을 살아가는 오늘날의 우리에게 있어 나이 들어간다는 것은 오히려 자연의 한 형식으로 체험되고 있기 때문이다.

늙어가는 속도를 인위적으로 조절할 수는 있어도 늙어감 자체를 우리 몸에서 폐기시킬 수 없다는 삶의 명제가 우리 생의 자연으로 긍정되고 있다는 신호는 무엇보다도 작금의 국내외 공연예술계를 통해 읽어낼 수 있다. 피나 바우쉬가 1978년 말에 초연했던 자신의 대표 안무작 〈콘탁트호프Kontakthof〉를 65세 이상의 남녀 일반인을 위한 버전으로 발표했던 2000년 이래로, 제롬 벨의 컨셉 안무작 〈루츠 푀르스터〉(2009), 알랑 플라텔이 이끄는 무용단 레 발레 세 드 라 베의 〈가르데니아〉(2010), 또는 우리나라에서도 공연된 바 있는 로메오 카스텔루치의 연출작 〈신의 아들을 바라보는 얼굴의 컨셉에 대하여〉(2010) 등 늙어가는 몸 자체를 작품 전면에 내세운 일련의 작업들이 공연 무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국내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어서 2011년 2월에 초연한 안은미 무용단의 〈조상님께 바치는 댄스〉나 서울문화재단이 지원하는 ‘서울댄스 프로젝트’등의 예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연령대별로 분류된 각종 커뮤니티 공연예술 프로젝트들이 워크샵 형식으로 진행되거나 더 나아가 공연화되어 지금까지도 무대에 오르고 있다.

그런데 만약 우리 몸에 켜켜이 쌓인 시간의 층위가 한 개인이 일반적으로 경험하고 상상할 수 있는 정도의 차원을 뛰어넘어 집단적 역사의 차원으로까지 확장된다면 어떨까? 집단적 기억이 개인 안에 더 이상 망각의 형태로 새겨 넣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기억의 집단성이 한 개인에게 지금까지 살아온‘리얼 타임’으로 경험될 수 있다면? 인간의 수명이 생물학적 관점에서 최대 190살까지 가능하다는 설이 통용되는 세상에 만약 1만 4천년을 살아온 존재가 등장한다면 그는 인간인 걸까, 신인 걸까? 이도 저도 아니면 부재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있음을 드러내는 유령적 존재의 전복인 걸까?

작년 11월 7일부터 올 2월 22일까지 대학로 유니플렉스에서 공연된 연극 〈맨 프럼 어스〉는 관객들로 하여금 이처럼 익숙하지 않은, 다소 불편한 질문들과 대면하게 한다. 구석기 후기부터 현재까지, 자칭 1만 4천년을 살아온 불멸의 주인공 존 올드맨과 극히 평범한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그의 동료 간의 대립을 그려내는 이 작품은 오늘날의 공연계에 유행처럼 번져가고 있는 나이, 더 정확히 말해 나이 들어가는 몸에 대한 물리적 상상력이 닿을 수 없는 곳에서 시작하여 역설적으로 나이에 관한 가장 실제적인 차원으로 발전되어간다. 그리고 이처럼 그저 허무맹랑하게만 들리던 비현실적이고도 비인간적인 이야기가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이해되고 경험될 수 있는 지점으로 수렴될 때 연극 〈맨 프럼 어스〉는 관객으로 하여금 연대기적 시간의 연속이 아닌, 개개인의 ‘지금 바로 이 순간’을 사유하게 하는 하나의 연극적 실천이 된다.

 

변하지 않음으로써 증명되는 시간의 변화

잘 알려졌다시피 연극 〈맨 프럼 어스〉는 세계적인 SF 작가 제롬 빅스비의 마지막 시나리오이기도 했던 동명의 2007년 작 헐리우드 영화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우연한 기회에 미국에서 이 영화를 접한 배우 이원종은 작품의 무대 제작을 결심하게 되었고, 약 7년여의 준비 기간을 거쳐 마침내 작년 11월에 서울에서 세계 최초로 초연을 성사시키게 되었다. 여기에 〈돐날〉의 연출가로도 잘 알려진 극단‘작은 신화’의 대표 최용훈이 연출을, 극단‘미추’에 이어 극단‘코끼리만보’에서 활동하며 마당극에서부터 뮤지컬까지 아우르는 다양한 장르의 대본작업을 해온 배삼식 작가가 각색을 맡아 작품에 연극적 전문성을 더했다. 그렇다면 과연 이 영화가 제작자의 마음을 사로잡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 연극의 제작프로듀서인 허동훈은“영화 자체가 워낙 연극을 염두에 두고 만든 점이 많은 것 같았”([양미르의문화리뷰]‘ 맨프럼어스’—원작영화보다뛰어난연극, 문화뉴스 2014년 12월 11일자)다는 생각을 밝힌 바 있는데, 영화적 언어를 연극적 문법을 통해 번역해내고자 했던 이들의 의지는 도대체 어떻게 실천될 수 있었던 걸까?

연쇄적으로 이어지는 이 같은 질문의 끝에는 바로 작품의 핵심을 이루는 빅스비의 시나리오가 있다. 시간의 바깥에서 시간의 안을 구성하는 동시에 현실 공간 안에서 그 공간의 바깥을 상상한다는, 사뭇 모순적으로 들리는 설정을 통해 작가는 한 편의 글에 시나리오라는 특정 장르를 넘어선 이야기로서의 보편성을 부여한다. 그리고 그 보편적 이야기의 페이지 위에 광활한 우주 속 인간이 아닌, 지구상의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에 대해 조금씩 기록해간다.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던 것처럼 〈맨 프럼 어스〉는 자그마치 1만 4천년을 살아왔다고 주장하는 주인공 존 올드맨과 그런 그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동료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이 내용상의 주를 이룬다. 그리고 작품 마지막에 갈등을 해소하는 방식으로 여러 차례의 반전이 등장하는데, 그로 인해 장면 연출과 관련해 특별한 시각적 볼거리가 도입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서사적인 긴장감이 작품 전반에 걸쳐 팽팽하게 유지된다.

작품의 줄거리에 대해 짧게 언급하자면 다음과 같다. 캘리포니아 주 사막 한 복판의 어느 외딴 도시에서 대학교수로 근무하던 존은 어느 날 갑자기 자신에게 속해있던 모든 것을 내려놓은 채 다른 곳으로 떠나겠다고 선언한다. 그러자 이 소식에 놀란 존의 대학 동료들은 환송회를 위해 마지막으로 그의 집에 모이는데, 바로 이 모임에서 존은 왜 떠나느냐는 그들의 질문에 대한 답으로 그동안 완벽하게 유지해왔던 비밀, 즉 자신이 구석기 후기부터 살아온 원시인이며 늙지도 죽지도 않는 존재라는 것을 밝힌다. 여기에 그 동안 자신은 신대륙 발견 당시 콜럼버스와 한 배를 타기도 했고 프랑스에서 고흐의 친구로 살기도 했으며 인도로 가 부처의 가르침을 받기도 했으며 더 나아가 심지어 실제 예수로 살기까지 했다는 충격적인 주장을 더한다. 게다가 자신이 실제 살았던 예수는 성서 속의 신적 존재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인도에서 직접 체험한 부처의 가르침을 서방 세계에 전파하려고 노력했던 한낱 인간에 불과하다는 말로 종교적 신념에 가득 찬 동료들을 분노케 하기도 한다. 그리고 어느 한 곳에 정착한 후 10년쯤 지나, 자기 혼자 그 시간만큼 늙지 않았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알아차리게 될 때쯤 다른 곳으로 떠난다는 말로 대답을 갈무리한다.

그러나 정작 자신들의 질문에 대해 말 그대로 동서고금을 넘나드는, 실현 불가능한 대답만을 들은 존의 동료들은 마치 자신들이 던진 질문 속에 그에 대한 답이 포함되어 있거나, 아니면 심지어 답 자체가 이미 질문에 선행한다는 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이 인류학, 고고학, 미술사학, 생물학, 심리학 등 각자의 전공 영역으로 판단의 기준을 돌려 존의 고백이 왜 터무니없을 수밖에 없는지에 대해 주장하기 시작한다. 존에게 있어 그런 동료들의 비난에 응수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자신의 경험에 대해 들려주는 것이다. 상상된 것이 아닌, 어디까지나 오랜 시간을 관통하며 직접 경험된 시간인 한에서 존의 이야기는 허무맹랑하다는 단순한 치부에서 벗어나 서서히 납득 가능한 논리의 세계로 진입하게 된다. 이때 그의 경험을 매개하는 것은 바로 늙지 않은 자신의 몸, 그리고 크로마뇽인의 부싯돌이나 고흐의 그림처럼 여전히 낡지 않은 채 존의 곁에 남아있는 과거의 사물들뿐이다. 이처럼 변하지 않고 살아남은 한에서만 여기 이렇게 그들 앞에 서서 변해온 시간을 증거 할 수 있다는 모순적 설정이야말로 이 작품을 구성하는 주요한 전제가 된다.

물론 경험된 바가 아무리 기존에 증명된 일상적 논리에 부합한다 할지라도, 따라서 이해 가능한 것으로 여겨진다 할지라도, 그것이 일반적인 믿음에 위배된다면 그것은 분명 논리적임에도 불구하고 결코 논리적일 수 없다는 모순에 노출되고 만다. 존 올드맨의 자기 고백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이야기의 범위가 확장되면 확장될수록, 등장인물들의 세계를 공고히 유지시켜온 체계 곳곳에 균열이 가해지고 그 결과, 존과 동료들 사이의 대립을 통해 이들의‘학문적 삶’이란 사실상 ‘앎에 대한 종교적 삶’에 다름 아니었음이 드러난다. 자신이 바로 나사렛의 예수라는 존의 주장이 작품의 정점을 향해 인물들 간의 갈등을 증폭시킬 때, 이를 해소하기 위한 방법으로 요청된 것은 바로 앎에 대한 동료 교수들의 종교적 믿음 대신 경험에 의거한 존 올드맨의 이야기를 철회하고 부정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존은 자신이 지금까지 내뱉은 모든 이야기를 일순간에 사실이 아니라고 부정함으로써 자신이 벌여놓은 틈 사이, 즉 다른 인물들이 기꺼이 살아가고자 하는 세계의 균열을 봉합시킨다. 이것이 바로 이 작품이 보여준 첫 번째 반전인 셈이다. 하지만 뒤이어 이 작품은 동료 교수 중 한 명인 나이 지긋한 심리학자 윌 그루버의 실제 아버지로 존을 상정함으로써 다시 한 번 쉽게 예기치 못했던 반전을 꾀한다. 이처럼 여러 차례의 극적 반전을 병렬함으로써 〈맨 프럼 어스〉는 이야기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작품을 접한 관객들 개개인의 상상력이 원작자 빅스비가 그려낸 이야기의 프레임 너머로 여전히 부단히 움직이고 있음을 암시한다.

 

프레임 바깥의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

그렇다면 과연 존과 동료들 사이의 갈등을 그려내기 위한 방법으로 새로이 호출되는‘연극’이라는 장르는 이 작품과 만나 어떠한 매체적 의미를 획득하게 되는 걸까? 1만 4천년을 살아온 주인공의 이야기를 담아내기에는 연극이라는 장르가 너무나 협소한 건 아닐까? 연극은 누구나 알다시피 장면 재현을 위한 시간과 공간 조건이 매우 제약된 현장예술이다. 그렇다면 이 같은 연극의 특성이 원작을 무대화하는데 있어 근본적인 한계로 작용하지 않을까?.

이와 같은 질문들은 역으로 원작인 영화가 애초에 무대화를 염두에 두고 촬영된 것 같다던 공연 제작진의 추측을 상기시킨다. 올 2월 중순까지 대학로 무대에 오르는 뮤지컬 〈러브레터〉나 피나 바우쉬가 이끈 부퍼탈탄츠테아터에 관한 빔 벤더스 감독의 3D 다큐멘터리 영화 〈피나〉(2011)등의 예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 지금까지 무대 언어와 영상 언어 간의 상호 번역은 국내외에서 꾸준히 이어져왔다. 연극 〈맨 프럼 어스〉 또한 그와 같은 장르 간 번역의 역사 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을 듯한데, 이 작품의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원작인 영화에 이미 연극적인 기본 구성이 녹아있다는 점에서 연극 제작자로 하여금 무대화에 대한 보다 강한 확신을 갖게하였을 것이다. 게다가 이 작품은 아무리 1만 4천년의 시간을 살아왔다하더라도 변하지 않는 외모로 인해 시간을 10년 단위로 나누어 살아가야하고, 그저 한 명의 지극히 평범한 인간으로 특정 공간 속에서 정해진 시간을 일상으로 살아갈 뿐이므로 자신이 직접 경험한 시간과 공간 바깥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는 이중적 인물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런 만큼 어쩌면 연극이라는 현장 예술의 시공간적 제약이야말로 우주와도 같은 무한대의 시간 속에서 여전히 지극히 평범한 인간으로서의 자기 한계를 의식하며 살아가는 주인공의 모습을 그려내기 위한 기본 조건을 마련해낸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원작인 영화를 무대 언어로 번역해낸 연극 작품은 원작에 비해 매체 특성상, 혹은 각색상 어떠한 차이점을 보일까?

우선, 영화 속 장면과 연극 속 무대 위에서 각기 다르게 시각화되는 공간적 특징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영화에 등장하는 공간은 이사 직전의 황량함이 느껴지는 주인공의 작은 단층집과 이삿짐을 나를 차를 세워둔 집 앞 마당 정도로 매우 단출하다. 물론 집 내부와 집 바깥의 마당 정도로 영화 속 공간을 강하게 한정시키는 구성은 오히려 영화의 중심이 주인공의 이야기 그 자체로 향하게 하는 효과를 가져 온다는 점에서 분명 영화 전체에 긍정적으로 기여하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영화 속 공간 조건이 매우 제약적이기 때문에 각각의 시퀀스가 담아내는 공간적 배경이라고는 생물학자 해리가 앉아서 말장난을 하던 소파나 자신에게 익숙한 삶의 방식에 맞춰 늘 거주 공간에 불을 쬘 곳을 마련해놨다던 존이 불꽃을 바라보던 벽난로 등, 작은 단층집을 부분적으로 분할하여 비춰주는 것이 전부이다. 이처럼 영화 속 배경 공간이 물리적으로 지극히 한정되어 있는 경우, 아무리 하나의 공간을 부분으로 나누어 시퀀스마다 따로 담아낸다 하더라도 공간 연출적인 변화를 주기에는 무리가 있다.

영화에서 이와 같은 시각적 지루함을 상쇄시켜주는 유일한 요소는 바로 등장인물들의 연기나 몸짓, 혹은 인물 간의 관계를 고조시켜주는 배경음악이 아니라, 영화 전체를 관통하며 전개되는 그들 사이의 ‘이야기’이다. 다시 말해, 이 영화에서는 독특하게도 특수 효과 등의 기술력이 투입되지 않았기 때문에 존의 과거사가 시각적으로 전혀 재현되지 않은 반면, 일반 SF영화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영상 기술력을 바탕으로 한 시각적 스펙터클이 등장인물 간의 담화 방식, 즉‘이야기’를 통해 비가시적으로 생성되는 셈이다. 그리고 이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잘 알려진 역사 속 특정 시기 및 특정 문화적 콘텍스트와 강하게 결부되어 있다는 점에서 관객들 저마다의 머릿속에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재현된다. 가령, 크로마뇽인들의 수렵 활동이나 예수의 산상수훈과 같은 일련의 사건들이 인물들의 이야기 속에 등장할 때마다 관객들은 저마다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그 각각의 사건에 대해 배경과 인물이 주입된 하나의 시퀀스로 머릿속에 그려보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관객 각자의 머릿속에서 상상되는 이야기에 영화 시퀀스가 가진 공간적 특수성이 부여될 때, 관객들은 각자의 방식대로 영화 속 이야기에 몰입하게 된다. 다시 말해, 영화 〈맨 프럼 어스〉는 집 내부와 집 바깥의 앞마당 정도로 제한된 공간 안에 놓인 인물들 각자가 의견을 말할 때마다 한 사람씩, 혹은 서너 사람씩 한 장면 안에 담음으로써 공간적 제약을 극대화시키는 한편, 이들이 나누는 동서고금을 넘나드는 대화를 통해 그 웅크리고 있던 공간성의 너비를 크게 확장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연극 〈맨 프럼 어스〉에서의 공간성은 영화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구현된다. 전언했듯이, 영화 〈맨 프럼 어스〉에 등장하는 공간은 단 두 곳 정도로 압축되며 각각의 공간은 시퀀스마다 강조되는 인물에 따라 편집된 상태로 스크린에 등장한다. 따라서 만약 카메라의 시선이 창문에서 소파로, 소파에서 벽난로로 진행되어 간다면 우리는 같은 시간에 도대체 문 바깥에서는 어떠한 상황이 펼쳐지고 있을지 전혀 알 수가 없다. 말하자면 영화 속에서 서로 다른 공간들은 동시적으로 이야기될 수 없는 셈이다. 하지만 연극 〈맨 프럼 어스〉에 등장하는 공간은 장면이 끝날 때마다 무대 미술의 교체 등을 통해 전환되지 않고, 공연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무대 세트로 유지된다. 때문에 이 공연에서 장면 전환은 오로지 세트 내에서 조명을 끄고 켜는 방식으로만 이루어진다. 심지어 무대 세트는 영화 속에서 분리된 채 장면마다 따로 담겼던 존 올드맨의 집 실내와 바깥마당의 구조 모두를 한 곳에 모아 집 거실을 무대 중앙과 오른편에, 그리고 집 바깥의 모습을 무대 왼편에 배치시켜놓는다. 이와 같은 공간 구조의 연출을 통해 관객들은 실내외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는 인물들의 움직임과 이야기를 빠짐없이 포착할 수 있다. 이처럼 공연 내내 단 하나의 세트로만 재현되는 공간성은 대부분의 인물들을 공연 처음부터 끝까지 무대 위에 등장시키는 이 작품의 연출력과 맞물려 연극 자체가 갖는 현장성을 보다 강화시킨다. 영화와는 달리 특정 인물 또는 특정 공간에만 포커스를 둔 프레임 형식으로 무대를 시각적으로 구성할 수 없다는 것, 따라서 관객들이 어느 장면에서 특정 인물만을 집중해서 본다 하더라도 그 장면을 함께 그려내고 있는 다른 인물들을 결코 프레임 바깥으로 삭제시키지 못한다는 것, 그리하여 결국 연극 무대 위에서 지금 펼쳐지고 있는 이야기 그 자체를 하나의 풍경처럼 감각하게 된다는 것. 이처럼 번역된 무대 언어 속에서 인물들 중 어느 누구도, 심지어 그들이 한 마디의 말도 내뱉지 않는 순간이라 할지라도 매 순간 소외됨 없이 이야기의 한 부분이 되어 관객들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연극 〈맨 프럼 어스〉의 무대 위에는 영화를 구성하는 시퀀스 프레임의 한계 속에서 결코 동시간적으로 포착될 수 없는 이미지들이 동시에 범람한다. 뿐만 아니라 간결한 방식으로 장면을 구성함으로써 시나리오로의 몰입도를 높였던 영화에 비해 이 작품의 무대 공연은 다수의 등장인물들을 동시에 등장시킴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한 특정 인물의 대사와 동작뿐만 아니라 그가 이야기하고 있는 순간에 무대 전체를 구성하는 다른 인물들의 동작,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내는 분위기 전체를 감각하게끔 한다. 특히 연극 공연은 아무리 원작 텍스트와 분리 불가능한 관계를 맺는다 하더라도 현장예술이라는 특성상‘우연’, 즉 예측 불가능한 시간의 긴장 속에서 진행되기 때문에 배우들에게 있어 공연 시간은 연기를 위한 시간이 아닌 살아가는 시간의 연속이며, 이는 곧 관객들에게 하나의 총체적 삶의 형태로 다가온다. 연극 〈맨 프럼 어스〉에서 이야기뿐만 아니라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등장인물들, 더 자세히 말해 그들의 움직임이 부각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지금, 여기에서 발생하는 총체적 사건으로 관객들에게 경험되는 연극 공연은 이야기 바깥에서 그 이야기를 구성하는 요소들에 대해 주목하게 만드는 것이다.

 

끝없는 한계, 영원의 다른 이름

영화 원작과 연극 작품이 보이는 또 다른 차이로는 서로 다른 결말을 들 수 있다. 유명 헐리웃 배우가 출연한 것도 아니고 과거의 시간이 기술력을 바탕으로 스펙터클하게 그려지지도 않은, 단지 미화 20만 불 정도의 저예산만으로 제작된 영화 〈맨 프럼 어스〉가 시종일관 관객들의 주의력을 집중시킨다면 그 이유는 아마도 빅스비의 원작 시나리오가 가진 힘에 있을 것이다. 일반인들이 상식적으로 알고 있던 지식 체계의 전복을 꾀하는, 그리고 그 지점에서 다시 반전을 꾀하는 형식의 원작은 이야기의 구조와 내용상의 밀도만 보아도 여느 작가에게 쉽게 각색의 가능성을 허락지 않는 듯하다.

그러나“원작이 음악과 미장센을 통해 1만 4천년의 진실에 힘을 더했다면, 연극은 그러지 못한다. 그렇기에 (이번 무대는) 영화와 기본 줄거리는 같지만 결말은 달라진다. 이것이 연극이 가야 할 올바른 방향이라 생각했다”(고아라, [현장스케치] 노화도, 죽음도 초월한 그의 진실… 연극 ‘맨 프럼 어스’ 프레스콜, 뉴스컬처, 2014년 11월 7일자)는 연출가 최용훈의 고백에서도 드러나듯이, 무대 언어로의 번역 작업을 거치며 〈맨 프럼 어스〉는 원작과는 전혀 다른 내용의 결말을 얻게 된다. 원작인 영화의 마지막은 다시 새로운 곳으로 떠날 채비를 마친 존 올드맨이 다음에 이어질 10년간의 삶을 위해 홀로 먼 길을 떠나겠다는 계획을 바꿔 자신에게 사랑을 고백한 샌디와 함께 소박한 짐이 담긴 미니 트럭을 타고 머나먼 여정을 떠나는 모습으로 장식된다. 말하자면 더 이상 지금, 여기에서 느끼는 사랑의 감정을 1만 4천년동안 이어온 삶의 방식 아래에서 희생시키거나 억누르지 않겠다는 의지가 담긴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 영화의 세 번째 반전이 이루어진 셈이다. 그러나 유한한 삶을 사는 인간이 불멸의 생을 꿈꾸는 것과 반대로 30대 중반의 모습 그대로 영원한 시간을 살아가는 주인공 존 올드맨의 모습에서 유한한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감정의 극한을 읽어낸 연출가는 작품의 결말과 관련해 다음과 같은 의견을 밝힌 바 있다.

“유한한 삶을 사는 인간은 무한함을 욕망할 수밖에 없다. 반면에 만사천년동안 살아온 사람에게는 한계가 있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이별, 관계의 단절, 그런 고독과 아픔들을 우리는 알 수 없다. 그 무한함의 결핍을 통해 자연스럽게 우리 삶을 돌아볼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중층적 의미들이 바뀐 결말에 드러나게 될 거라 생각한다.”(이번 생이 끝나지 않는다면
- (주)올라운드엔터테인먼트, (주)페이스엔터테인먼트 〈맨 프롬 어스〉, 서울연극센터 웹진 [연극in] 55호, 2014년 11월 6일자)

비록 아무리 비현실적인 불로불사의 존재로 세상의 시간을 몸소 관통하며 살아간다 해도 제한된 공연 시간과 제한된 물리적 무대 공간 속 존 올드맨은 지금, 여기의 시공간을 체현하고 있는 한 인간일 뿐이라는 것. 원시인이자 예수이자 고흐의 친구로 서로 다른 삶을 살아온 주인공은 공연이 이루어지는 무대 위에서 결국 자신을 사랑한다던 샌디의 손을 잡아주지 않는다. 작품 말미에 존이 백발의 심리학자 윌 그루버의 내면에 고질적으로 남아있던 콤플렉스의 근원, 즉 윌의 아버지라는 사실이 밝혀진 후 그 충격에 윌이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자 30대 중반의 젊은 아버지의 모습으로 노년이 된 아들의 죽음을 경험한다는 설정은 영화와 연극 모두 동일하게 그려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도 불구하고 늙지 않을 자기 자신과 시간이 지난만큼 늙어갈 샌디가 존재하는 방식의 차이에 대해 희망에 찬 열린 결말을 추구했던 영화와는 달리 연극은 두 인물 사이를 가로지르는 차이를 굳이 봉합하려 하지 않은 채 그들 각자의 현실을 그저 있는 그대로 그려 낸다. 그러므로 어쩌면 공연이 끝난 후에도 무대 위에 유령처럼 남아있을 그들은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각자의 삶의 방식을 유지하며, 서로가 살아가는 방식과 이유를 인정하며, 삶의 한계에 다다를 때 지금의 자리를 떠나 다른 곳으로 향하거나 혹은 이승에서 저승으로 거처를 옮기며, 그렇게 평행하게 살아갈 것이다.

 

이 땅으로부터 온, 이 땅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이야기

위에서 언급한 무대 미술과 결말 부분에서 나타나는 특징 외에도 연극 〈맨 프럼 어스〉에는 제목 그대로 초월적 우주인이 아닌, 지상 위의 시간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반영한 것 같은 인물 설정이 눈에 띈다. 가령, 영화 속 주요 등장인물인 고고학자 아트와 그의 제자이자 연인인 린다는 연극에서 역할이 바뀌어 젊고 아름다운 청년 아트가 중년의 고고학자이자 남들의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린다의 제자이자 연인으로 등장한다. 뿐만 아니라, 영화 속에서 이삿짐을 나르는 일꾼으로 잠시 등장했던 두 남자의 역할은 무대 위에서 한 명의 남자 배우와 다른 한 명의 여자 배우를 통해 재현되는데 이들은 공연 마지막에 경찰로 다시 한 번 무대에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처럼 원작과는 다른 남녀 간의 성역할, 그리고 우리 주변에서 일상적으로 흔히 볼 수 있는 젊은 아르바이트생들을 연상시키기도 하는 배우들의 역할 분담을 통해 서울 대학로 한복판에서 공연된 연극 〈맨 프럼 어스〉는 관객들에게 작품의 내용을 통해 유추해볼 수 있는 인생의 한계, 혹은 원작의 무대화를 통해 경험해볼 수 있는 연극이라는 장르의 시공간적 한계를 뛰어넘어 우리 사회문화 전반의 한계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다.

무대 위에서 1만 4천여 년의 시간을 살아온, 그리고 앞으로도 지금의 외모 그대로 늙어갈 수밖에 없다는 역설적 시간의 상징 존 올드맨의 이야기를 구술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아마도 그것은 거대 서사에 균열을 가하는 올드맨의 역사적 실제, 그 상상적 층위에 지금, 여기의 무대 위에서 펼쳐지고 있는 등장인물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등장인물을 연기하는 배우들의 현실적 층위를 얹는 작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공연이 진행되는 내내 종교적 믿음의 대상이 된 학문을 일상으로 여기며 살아가는 등장인물들의 이야기 속 모습, 그리고 이 같은 이야기된 일상과는 사뭇 다른 그들의 예측할 수 없는 무대 위 실제 모습 사이를 쉴새 없이 오가게 된다. 매 순간이 찰나적 사건인 연극 무대에서는 장면에 대한 사후 편집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처럼 순간에 대한 삭제나 교정의 가능성이 애시 당초 폐기되어버린 잔혹한 예술 장르로서의 연극은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매 순간 예측할 수 없다. 무대 위의 인물이 순간에 몰입되어 자신도 모르게 내뱉는 한숨, 그리고 미리 약속되지 않은 상태로 내딛게 되는 발걸음 속에서 이야기 속 자신의 모습을 그려낼 때, 그는 이 땅으로부터 온 우리, 이 땅에서 살아가는 우리, 그러므로 예측 불가능한 우리의 모습을 비로소 재현하게 된다.

무대 위 현실의 한정된 조건 안에서 매 순간 실현되고 실천되는 우리 삶의 모습은 존 올드맨이 극중에서 낮게 읊조리던 대사 한 문장을 떠올리게 한다: “Anything is possible.”유한한 세계와 무한한 세계가 가능성의 영역에서 공존한다는 것. 그 공존을 굳이 인위적으로 변형시키지 않고 그저 있는 그대로 무대 위에 펼쳐 보인다는 것. 바로 여기에 연극 〈맨 프럼 어스〉의 참 의미가 있다.

 


손옥주 1981년 수원 생.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 연극학, 무용학 박사학위 취득. 현재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근대 독일어권 무용계에 나타난 한국 재현에 관한 포스트닥터 프로젝트 수행 중.

 

 

 

* 《쿨투라》 2015년 봄호(통권 37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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