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Theme] AWARDS - ‘2019 오늘의 영화’ 수상작 '버닝'의 이창동 감독 인터뷰
[2월 Theme] AWARDS - ‘2019 오늘의 영화’ 수상작 '버닝'의 이창동 감독 인터뷰
  • 윤성은(영화평론가, 본지 편집위원)
  • 승인 2019.04.10 14: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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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가 관객들에게 감각적으로 와닿는, 새로운 영화적 체험을 주는 작품이길 바랐어요.”

작년 5월 칸영화제에서 <버닝>이 공개되었을 때, 필자를 비롯한 현지의 영화 관계자들은 모두 이번에 한국 영화계에 좋은 소식이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영화는 세련되고 심오했으며 새로운 영화적 체험을 선사하는 작품이었다. 외신과 바이어들의 관심도 <버닝>에 집중되어 있었고, 잔치 분위기는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그래서 수상 불발 소식이 전해졌을 때의 충격과 슬픔은 말할 수 없이 컸다. 그 날 오후, 이창동 감독은 칸에 있던 한국 영화 관계자들을 모아 식사를 대접하면서 당신은 마음이 편하다고 오히려 위로했다. 그 감동적인 시간에 겉으로는 웃으면서 속으로 눈물을 삼켰던 사람이 나뿐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 후, 약 8개월 만에 이창동 감독을 파인하우스필름 사무실에서 만났다. 처음에는 세계적인 거장을 인터뷰한다는 긴장과 부담이 앞섰지만, 영화와 문학과 시대와 인간에 대한 그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희열과 흥분이 다른 감정을 완전히 압도했다.

 

윤성은(이하 윤): 우선,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영화상을 수상하게 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오늘의 영화상은 2006년도에 시작해서 올해로 14회째를 맞고 있는데요, 이번 수상으로 감독님이 최다 수상자가 되셨습니다.

이창동(이하 이): 영화 별로 많이 만들지도 않았는데. (웃음)

윤: 2008년도에 <밀양>으로, 2011년도에 <시>로 수상하신데 이어 세 번째 수상이세요. 수상소감이랄지, 의미를 부여해 주신다면요?

이: <버닝>은 뭐라고 할까, 좀 논쟁적인 작품이랄까. 제 나름대로는 영화라는 매체를 받아들이는 우리의 관습이나 고정관념에 대해 질문하는 영화였기 때문에, 관객들이 낯설게 받아들일 수도 있고, 심지어 거부감을 느낄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아시다시피 영화 개봉 당시에는, 특히 국내에서는 그런 분위기가 강했구요. 그런데 연말에 와서 인정이랄지, 이런 평가를 받는 게 고맙기도 하지만 좀 어색하기도 해요. (웃음)

 

 

8년 만에 신작을 내놓다

윤: 8년 만의 신작을 처음으로 디지털카메라로 찍으셨죠. 영화 제작 환경의 변화도 느끼셨을 것 같고, 그 환경의 변화는 미학적인 부분에까지도 영향을 미쳤을 거라 생각하는데 이번에 현장에서 느꼈던 점들이 궁금합니다.

이: 후반 작업에서의 디지털 작업, 즉 D.I 작업은 <밀양> 때부터 해왔기 때문에 지금 말씀하신 기술적인 변화는 그때부터 경험했던 것이구요. 필름 카메라가 아니라 디지털카메라로 찍었다는 점은 달라졌죠. 영화의 기술적인 발전은 영화 작업을 대중화시켰는데요, 그래서 오히려 기술이 중요하지 않게 되어 버렸죠. 왜냐하면 필름으로 영화를 만들 때는 최소한의 기술 습득이 꽤 어렵고, 그걸 수행하기 위해서 자본이나 인력 등의 토대가 필요했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누구나 카메라를 들고, 심지어는 아이폰을 가지고도 영화를 찍을 수 있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에 오히려 영화의 본질이 더 중요해진 거죠. 그러면 우리가 영화의 본질에 대해서 기술의 발전만큼 고민하고 있느냐 하면, 저는 다소 회의적입니다. 세계적인 추세인 것 같아요. 기술의 발전을만끽하고 있다고 할까요. 그러면서 영화 매체가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힘이 간과되면서, 장기적으로는 관객들이 영화에 대한 매력을 잃어버리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어요.

윤: <버닝>은 세계적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헛간을 태우다」를 원작으로 하고 있는데요, 영화를 만드시기 전에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왜냐하면 저는 그의 단편이나 에세이는 좋아하지만 장편은 명성만큼 대단하다고 생각하지는 않거든요.

이: 저 개인적으로나 한국문학사적으로나 무라카미 하루키는 특별한 존재죠. 지금까지 그런 정도의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작가는 거의 없었어요. 한국문학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80년대 내내 문학의 효용 가치, 문학의 사회적 책무에 대한 내적 고민이랄까 고뇌랄까 이런 게 계속 있었는데, 우리 현실에 구체적인 모순이 있고, 어떤 절대악 같은 대상이 있을 때 문학이 뭘 해야 하는가 하는 것은 저 같은 80년대 작가들은 태생적으로 안고 있었던 질문이죠. 그러니까 작가가 내적 검열을 할 수밖에 없는 시대였고 작가의 상상력이나 감수성의 자유로움보다 얼마만큼 사회 변화에 도움이 되는 소설인가가 중요했죠.

  그러다가 90년대에 들어오면서 갑자기 하루키 바람이 시작되었거든요. 대학가, 젊은 세대들, 지식인들을 기점으로 시작되었는데, 지금까지의 이념 갈등 문제에서 벗어나서 좀 더 다른 삶의 자유로움을 추구하고 다른 방식의 삶을 누리고자 하는 내적 욕구의 발현이었다고 봐요. 한국에서만 무라카미 하루키를 ‘하루키’라고 부르는데요, 저는 예전부터 ‘무라카미’라고 불렀습니다만, ‘하루키’는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일반명사가 된 애칭죠. 당시 한국인들에게 새로운 삶의 방식을 추구하고자 하는 욕구는 하나의 문화적 현상이었어요. 하루키가 그 욕구의 섭정이 된 거죠. 파스타를 만들어 먹고, 재즈 음악을 듣고, 조깅을 하고… 우리에게 작가나 예술가는 그런 이미지가 아니었거든요. 조깅이 웬 말입니까. 길거리에 최루탄이 날아다니는데.

 어찌 됐든 그의 문학은 그 이상의 기호나 문화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기가 어렵게 되어 버렸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80년대 작가군의 한사람이었고, 제 자신의 능력이나 문학의 역할에 대해서 심각하게 좌절을 겪었던 사람이거든요. 그건 영화를 하게 된 이유이기도 했구요. 그러니까 제가 보기에는 세상이 바뀌지 않았는데, 갑자기 세상이 바뀐 듯이 문학적, 예술적 담론들이 효용 가치가 떨어진 것으로 보는 분위기는 받아들이기 어려웠죠. 따라서 진지한 것보다 쿨한 것, 세련된 뭔가를 추구하는 삶의 방식의 상징이 된 무라카미의 문학에 일정한 편견을 갖지 않기란 쉽지 않았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들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한 그만의 문학적 대응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점에서 영화의 원작을 받아들이는 연출가의 입장에서도, 문학을 하는 입장에서도 과거와 다른 그의 문학적 대응 방식, 독자들에게 수용되고 있는 방식, 왜 광범위한 독자들의 호응을 얻고 있는가는 깊이 따져볼 만한 부분이죠.

윤: 저는 지금도 칸영화제 당시를 많이 회상하는데요. <버닝>이 공개된 후 현지의 반응이 너무 뜨거웠기 때문에 수상 불발 소식을 들었을 때 실망, 좌절감도 더 컸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국내 관객들의 반응이 엇갈리는 것이 흥미로웠습니다. 제가 <버닝>에서 본 것은 동시대 한국의 청춘들, 젊은 세대들의 보이지 않는 불안과 존재론적 고민이었는데, 오히려 외국에서 호평을 받는 걸 보면 이 주제가 확장성이 크다는 의미일까요?

이: 외국에서의 반응이 제 예상보다 뜨거웠다면 국내 반응은 제 예상보다 ‘훨씬’, 차가웠습니다. 좀 의아했죠. 싫어할 수는 있지만, 나름의 시도와 고민이 있고, 질문을 던진 영화기 때문에 심하게 공격이나 비판받을 영화는 아니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비아냥을 넘어 분노하는 반응들을 보면서 순수하게 그 이유가 궁금했어요. <버닝>이 ‘분노’에 관한 영화라서 그런걸까. (웃음)

 저는 아주 단순하게는, <버닝>이 아트하우스에 걸리는 영화라는 전제하에 한국 관객과 외국 관객의 반응이냉탕과 열탕만큼 차이가 나는 것은 감수성의 차이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버닝>이 여러 겹의 질문을 담고 있는 영화고, 해답을 주지 않는 영화이기는 하지만 관객과 관념놀이를 하기 위한 작품은 아니거든요. 저는 만들 때부터 지금까지 이 영화가 관객이 느끼고 체험하는, 감각적으로 와 닿고, 감수성에 호소하는 영화이길 바랐어요. 그런데 느끼지 않거나, 느끼지 못하면 극장에서 어려운 시험 문제를 푸는 기분일 테니까, 좋아하기 어렵죠. 감각이 단순화된 경향, 혹은 느끼기를 거부하는 경향이 있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의 문제일지도 모르는데요, 그게 제가 분노와 관계있지 않을까 의심해 보는 부분입니다. 사는 게 힘든데, 그럴 때 사람들은 적이 있어야 해요. 무엇 때문에 내가 힘들다 라는 핑계라도 생기니까요. 그런데 <버닝>은 그 대상을 보여주지 않고 질문만 던지니까, 기분 나쁘죠. 그런 사례들을 많이 봤는데요, 영화에 등장하는 몇몇 디테일을 관객들은 기호로 받아들입니다. 거기에는 원관념이 있죠. 그런데 <버닝>은 그 원관념을 부정하는 영화거든요. 사람들이 관습적으로 쉽게 생각할 만한 기호를 주지만, 그걸 의심하게 하는 거죠. 실재하는 건지 아닌지. 그렇게 기호가 배반되거나 부정될 때 화가 나고 실망하기 시작하면서 영화를 보는 내내 계속 쌓인 게 아닐까. 제 나름대로의 분석입니다.

 

 

 

해미와 종수와 벤

윤: 이제 영화의 주축을 이루는 세 인물에 대해 이야기 해보고 싶습니다. 저는 해미라는 인물이 가장 흥미로웠어요. 어떤 평자들은 해미가 신비주의적으로 대상화되고 있다고도 말하고, 왜 중간에 사라지느냐, 소모적으로 사용했느냐는 비판도 하지만 저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해미는 내레이터 모델에 대한 남들의 시선이 어떻든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고, 그레이트 헝거를 만나기 위해 아프리카에 가기도 하고, 노을을 보며 즉흥적으로 춤을 추기도 하는 인물이니까요. 다른 남성 캐릭터들보다 비전형적이에요. 감독님이 생각하시는 해미는 어떤 존재인가요?

이: 해미에 대한 다양한 시각은, 그럴 수 있다고 봐요. 서사적으로 여성이 사라지고, 그 여성을 찾는 이야기는 그리스 로마 신화 때부터 지금까지 사용되는 전형적인 플롯이죠. 그런데, 이 영화는 그 서사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영화거든요. 사라진 여성이 죽어서 발견되든, 어디 도망가 있든, 결론이 있는 서사가 아니고, 그 여성이 누구냐 라는 질문을 따라가는 영화예요. 해미는 그레이트 헝거를 좇는, 삶의 의미와 자기만의 자유를 추구하는 사람이죠. 그건 곧 부시맨 이래 인류가 추구해온 하나의 삶의 본질 같은 거구요.
 그런데 두 남성은 다른 게임을 하는 인물들이에요. 영화의 가장 근본적인 키는 해미가 가지고 있는데, 갑자기 사라져 버린 거예요. 종수는 그 키를 찾으려고 하는 거구요. 인물이 중간에 사라졌으니까 그냥 서사적으로 소모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 겉만 본 거죠. 하다못해 영화를 구조적으로 접근한다면, 왜 그렇게 사라질 인물이 영화의 중심에서 그런 춤을 추었을까요. 그 춤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요. 그 춤은 영화를 보고 난 관객들에게 가장 인상적인 이미지로 남아 있을 텐데 말이죠. 영화가 그 이상의 언어로 뭔가를 전달할 수는 없어요. 그래도 안 받아들이면 할 수 없는 거구요.

윤: 얼마 전, 한 감독님으로부터 ‘영화와 관객의 만남도 인연이다’라는 말을 들었는데 <버닝>과 인연이 없었던 관객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종수는 남자들 앞에서 옷 벗는 건 창녀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말하는 시쳇말로 ‘한남’(한국남자)으로서의 한계도 갖고 있지만, 재능이나 꿈이 없는 인물은 아니죠. 제가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그가 해미의 집에서 섹스를 할 때, 남산타워로부터 반사된 한 줄기 빛을 보거든요. 긴장되고 집중해야 하는 상황에서 그의 눈에 한 줌의 빛이 들어왔던 건 어떤 의미였을까요?

이: 말씀하신 그 시선이 종수의 캐릭터에 어떤 특별함을 부여할 거라고 생각하고 찍지는 않았어요. 다만 그 햇살의 존재에는 의미가 있죠. 우선, 해미가 귤 판토마임을 할 때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없다는 걸 잊어버리면 돼’라고 말하는데, 이 영화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를 미리 알려주는 대사이기도 하죠. 눈에 보이는 것과 실재하는 것이 다를 수 있고, 실제 있는 것과 있다고 믿는 것이 다를 수도 있고. 그런데 해미 방의 빛은 진짜 햇빛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잖아요. 반사된 빛이니까. 너무나 희미해서 사실 빛인지 아닌지도 모르겠고. 북향방에 살고 있는 해미 삶의 고달픔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구요. 그러나 동시에 하필이면 종수가 섹스를 하는 중에 들어왔던, 해미와 하나가 됐던 순간의 그 빛은 어쩌면 그에게 로맨틱한 느낌이었을 수도 있죠.

윤: 오, 그렇게는 생각 안 해봤는데! (웃음) 그럼, 벤의 이야기를 해보죠. 영화에서 명확하게 벤의 시점으로 보여줬던 장면이 있었잖아요. 자기 집에서 여자친구에게 화장을 해주는 부분이었는데요, 관객 입장에서는 좀 당황스러운 장면이었어요. 시점이 바뀐다는 건 감정을 이입해야 할 대상이 달라지는 것이니까요. 그 장면 때문에 벤이 사이코패스가 아닌가 하는 심증이 커지기도 했구요.

이: 그 장면은 앞뒤 장면들과 연결해서 보아야 합니다. 종수가 글을 쓰는데 카메라의 위치가 초월적인 존재처럼 밖으로 빠지고, 벤의 시점이 등장한 후 그다음 장면에서 살해될 때까지 연결돼요. 카메라가 글을 쓰고 있는 해미의 집에서 빠져나오고 부암동 쪽에서 바라보는 용산 일대, 각각의 삶과 각각의 이야기가 살아있을 것 같은 서울의 수많은 고만고만한 집들과 건물들 전경을 보여주면서 뭔가 마무리되는 듯한 느낌이 있길 바랐구요.
 그다음엔 어쩌면 다른 이야기가 시작되는 듯한 느낌을 주길 바랐죠. 그 다른 이야기가 무엇인지는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을 거예요. 종수가 쓴 소설의 한 부분일 수도 있구요. 그래서 약간의 장르적인 느낌도 주길 바랐어요. 사이코패스처럼 느껴졌다고 하신 것도 장르적인 관습 때문이잖아요. 관객이 느끼는 게 자연스러운 것일 수도 있고, 관습적인 생각을 따라가는 것일 수도 있다, 또는 관객들 각자가 원하는 서사를 원하는 대로 받아들이는 것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던지고 싶었습니다.

윤: 종수가 벤을 쫓아다니다가 벤이 호수를 보는 장면도 나옵니다. 이 장면은 현실인 듯 꿈인 듯 모호하게 그려지고 있는데요, 벤이 멋있게 호수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포르셰를 가운데 두고 종수가 엿보게 되죠. 여기서 벤은 또 다른 사람으로 보여요. 해미처럼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사람은 아닐까 하는.

이: 영화의 후반부는 종수가 벤을 추적하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그 날의 추적은 집 앞에서부터 성당, 갤러리 레스토랑을 거쳐서 저수지까지 가는 길인데요, 그 추적의 끝은 ‘아무것도 없다’라는 겁니다. ‘공허’랄까요. 그냥 ‘없다’가 아니라 너무 평온하고, 평화로운 ‘공空’이죠. 그럼에도 그렇게 표면적으로만 받아들일 수만은 없는 평온이에요. 저수지 안에 뭐가 들어 있을지 모르듯이요. 이런 비슷한 코드가 영화에서 우물도 있잖아요. 우물도 실제 있었는지 없었는지, 우물에 빠졌다는 것이 뭘 의미하는 건지 모르죠. 저수지도 우물처럼 물을 담고 있는 어떤 것인데, 더 크고 무엇을 품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공간으로서 유사한 이미지가 있는 거죠.

 

우연성의 포착, 그리고 음악

윤: 이미 여러 인터뷰에서 언급을 하셨지만, 이 영화에서 노을과 춤의 시퀀스 이야기를 빼놓을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매직 아워에 찍어야 해서 하루에 두 번 정도밖에 시도할 수 없는 장면이었죠.

이: 가능한 한 인위적인 효과 없이 영화를 찍으려고 했구요, 그게 디지털 작업의 장점이었죠. 과거에는 불 가능했을 텐데요. 롱 테이크로 찍으면 가장 좋지만 그렇게 찍기엔 너무 어려운 장면이니까 불가피하다면 끊어서 갈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운이 좋게도 둘째 날 오케이를 냈어요.

윤: 그 장면과 관련해서 ‘영화는 본질적으로 우연성을 포착하는 작업이다’, ‘영화는 운을 맞이해야 되는 작업이다’라는 표현을 하셨더라구요. <버닝>을 촬영할 때는 특히 그런 장면이 많으셨다구요.

이: 정말 운이 많이 작용했어요. 원래 영화 매체의 속성 자체가 다 설계하고 계산하고 준비한다 해도 사실 은 우리 삶이 그러하듯이 그 모든 것이 운이거든요. 우리 영화는 2016년에 시나리오를 쓰고 영화를 찍으려고 했는데 저작권 협의가 잘 안되어서 1년을 연기해야 했어요. 그러면서 시나리오가 변했죠. 저작권이 빨리 해결됐으면 다른 영화가 되었을 텐데, 1년 동안 시나리오를 수정하면서 영화에 겹이 더 생겼어요. 그러면서 결정적으로 캐스팅도 바뀌어서 스티븐 연, 전종서 씨가 들어왔구요. 촬영에 들어가서도 따지고 보면 다 운이죠. 다 운이에요. 전부 운이에요.

윤: (웃음) 제가 듣기로, 감독님은 현장에서 배우들의 감정을 밑바닥부터 끌어내서 잠재적 역량까지 모두 발휘하게 해주시는 분이라던데요. 전작들에서 설경구, 문소리, 전도연 씨의 연기를 보면 알 수 있죠. 그건 운이 아니라 스킬일 것 같은데요.

이: 그건 필요해요. 그렇게 해야죠, 감독이. 그런데 그것만으로 되는 건 아니라는 거죠. 영화는 빛을 담는 작업이잖아요. 학생들에게도 많이 했던 말인데 감독이 착각하는 게 자기가 뭐든지 다 할 수 있다거나 해야 된다고 믿는 거예요. 그건 마치 자기가 신이 됐다고 믿는 것과 같아요. 영화는 현실의 우연성을 포착하는 거거든요. 아무리 많이 준비해도 촬영 당일 배우의 표정 하나, 대사의 떨림 하나, 그날의 공기, 햇살에 어른거리는 먼지까지 연출할 수는 없어요. 그런 건 우연히 오는 거예요. 그걸 어떻게 잡아내는가가 문제죠. 그런데 실제 영화 현장에서는 그럴 여유가 없어요. 그러니까 영화를 찍는다는 건 그 필연성과 우연성 사이에서 싸워야 하는 거죠. 이번 <버닝>은 그래도 운이 많이 따랐던 것 같아요 .

윤: 음악에 대한 질문입니다. 이전까지 감독님 영화에 음악이 거의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한국영화 계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모그 음악감독님과의 만남에 기대가 컸죠. 저에게 <버닝>은 특별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데도 끊임없이 근원적인 불안감을 추동하는 작품인데, 음악이 그런 분위기를 잘 만들어줬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요구가 있었는지요?

이: 소음인지, 음악인지 구분이 잘 안 되는 음악. 그런 개념을 이야기했던 것 같아요. 제가 갖고 있는 이 영화의 콘셉트는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관객이 ‘영화적 체험’을 하게 만드는 거였거든요. 즉, 영화적 요소들이 어러져서 관객의 감수성과 만나는 그런 영화이길 원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그게 하나하나 독립적으로 살아 있어야만 하는 거죠. 또 그것이 그냥 관습적으로 익숙하게 받아들이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어서는 안 되고요. 예를 들어 영화가 스릴러의 외양을 띠고 있다고 해도, 스릴러의 텐션을 가중시키는 기존의 방식을 배제하길 원했죠. 종수가 새벽에 달리고 있는 장면이나 벤이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있는 장면은 서스펜스와 관계가 없는데도 불안함을 주는 것처럼 음악도 그중 하나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음악이 예상되거나 또는 관객이 익숙하게 구상할 수 있는 어떤 것으로 사용되는 것이 아니고 그 자체로 있으면서 하나의 영화적 체험을 만드는 것, 그런 음악이길 원했죠.

 

다음 질문을 기다리며

윤: 마지막으로, 좀 이른 얘기지만 감독님의 다음 행보가 궁금합니다. 이번 영화는 감독님의 전작들과 다르다는 평가가 많았죠. 그 요체는 <버닝>에서 공동체의 윤리라든가 사회의 위악, 부도덕 등이 표면화되지 않고 끝까지 잠재되어 있다는 것일 텐데요, 저는 평자를 포함한 관객들이 감독님의 영화가 칼날을 목에 바짝 들이대서 정신을 바짝 차리게 해주길 바랐던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창동 감독님의 다음 작품은 어떤 영화가 될까요?

이: 앞으로 어떻게 변해갈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영화를 한 편 한 편 하면서 제 나름대로는 변하려고 노력을 해 왔는데요, 사실 늘 질문을 했어요. <버닝>에서는 좀 더 다른 방식, 남들이 잘 안 하는 방식의 질문을 해 본거죠. 하지만 저에게는 본질적인 것이었는데, 왜냐하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대체 어떤데, 거기서 우리는 어떤 영화를 만들고,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니까요. 혹자는 청년 세대의 구체적인 상황을 다루지 않았다고 많이 실망할진 모르지만 저로서는 그 문제의 본질을 이야기하려고 노력했던 작품이에요. 변화 중 하나를 짚어서 얘기한다면 작가(공동 각본가인 오정미 작가)가 있어서 그런지도 모르겠어요.

 젊은 작가니까, 일단. 나에게 없는 시선, 나에게 없었던 감수성을 제공했을 수도 있어요. 어찌 됐든 저로서는 이게 지금까지 영화를 만들면서 늘 해왔던 고민, 질문이 더 깊어진 결과라고 생각되거든요. 앞으로 제 내면이 삶과 세상과 만나면서 어떤 질문을 만나게 될지, 영화로 어떻게 나타날지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과연 이런 영화 작업을 계속할 수나 있을지 잘 모르겠고.

윤: 또 8년을 기다리진 않기를 바랍니다. 반으로 줄여주시면 안될까요. 3-4년 안에.

이: 이제 시간이 정말 아까우니까 열심히 해봐야죠.

윤: 더 깊어진 감독님의 질문을 스크린에서 만나볼 날을 기다리겠습니다. 오늘 장시간의 인터뷰, 정말 감사드립니다.

 

 

* 《쿨투라》 2019년 2월호(통권 56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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