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수미와 '함께 보는 미술'] 미술과 철학: 이기봉의 '당신이 서 있는 곳'
[강수미와 '함께 보는 미술'] 미술과 철학: 이기봉의 '당신이 서 있는 곳'
  • 강수미(미학. 미술비평. 동덕여자대학교 교수)
  • 승인 2023.02.01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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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봉 개인전, 《Where You Stand》, 국제갤러리1관(K1) 설치전경
사진: 안천호 이미지제공: 국제갤러리

스위치 하는 그림

풍경은 내게 보이는 대상인가? 아니면 내가 그 안에 존립存立, 즉 한자 뜻풀이 그대로 ‘서 있음’ 또는 ‘생존하여 자립함’을 가능하게 하는 나를 둘러싼 지평인가? 나를 중심으로 따지면 전자다. 하지만 세계를 중심으로 보자면 후자다. 이렇듯 관점觀點, view point, 즉 보는 위치와 주객의 차이에 따라 해석이 다르고 답도 다르다. 어느덧 우리 사회에서는 모두 다르게 볼 수 있고 각자 의견을 맘껏 주장할 수 있다는 분위기가 자리 잡고 있다. 보편성보다는 개인성을 우선시하는 사회적 흐름이 대세다. 동시에 그 때문에 누구도 상대성을 넘어선 진리를 확신하거나 객관성을 단언하기 힘들어진 것 또한 사실이다. 용감한 주관성이 어지럽다. 그래서 서두로 돌아가자면, 주체는 자신이 서 있는 곳에서 보이는 세계의 파편을 얼마든 전체 풍경인 양 대할 수 있다. 그러나 자기 존립의 가능 조건인 세계라는 물物 자체를 사유하고 성찰할 길은 점점 희박해진다. 이는 철학의 무거운 논제다. 그런데 이러한 주제를 경험적인 차원에서 예술작품으로 물질화해 제시한다면 어떨까? 철학 논고만큼이나 어렵고 딱딱할까?

한국 현대미술의 중견인 이기봉 작가가 국제갤러리 서울과 부산에서 가진 개인전 《Where You Stand》(2022. 11. 17. - 12. 31.)를 통해 우리는 그 미학적 버전을 볼 수 있다. 화이트큐브의 전시장 벽면을 따라, 수풀 우거진 대지와 강에 안개가 자욱한 풍경을 그린 회화 작품들이 일정한 간격과 높이로 걸려 있다. 그 풍경화들은 세련된 스푸마토 기법과 묘사 스타일로 그려졌고, 특히 서정적 무드의 화면 처리와 우아한 색채 효과 덕분에 한눈에 봐도 뛰어난 미술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예술작품으로서의 위상을 명시하는 액자가 없거나 있어도 완전히 하얘서 벽과 구분이 안 되게 전시된 점이 좀 묘하다. 게다가 대부분 화폭이 넓고 단색조인 풍경화들이며, 그림 속 풍경의 지평선은 그 그림을 보는 감상자의 시선과 평행을 이뤄 착각을 유발한다. 말 그대로 감각 지각적 착오다. 감상자가 서 있는 곳이 갤러리가 아니라, 수목과 습지로 둘러싸인 곳에 지은 어느 건물의 실내이며, 거기서 안개가 짙게 피어오른 아침나절의 바깥세상을 내다보는 것 같은 지각상태가 되는 것이다(독자는 여기서 럭셔리 아파트나 인테리어 창호 광고의 한 장면을 떠올려도 좋지만, 영상미가 탁월한 미스터리 영화의 도입부를 상상하면 더 자극적일 것이다).

유구한 미술의 역사에서 그림이 재현의 과업에 복종해 실재의 그림자, 가상의 거울, 세상의 그림책, 세계로 난 창문 역할을 한 것은 익히 알려진 회화론이다. 그러니 이기봉의 풍경화 연작이 ‘창’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해도 특별히 새롭지는 않을지 모른다. 그런데 실제로 그 전시장에서 그 풍경화들을 보는 감상자의 경험은 꽤 유별날 것이기에 특별한 비평적 의미를 얻는다. 간단히 말해 전시장 내에서 이기봉의 회화는 관점의 전환을 일으키는 스위치 같다. 앞서 썼듯이 나/주체가 풍경을 보는 관점으로부터 세계/객관이 내가 서 있는 곳을 전 우주적 차원에서 감싸고 있다는 인식으로의 전환. 그 지각경험이 그림감상의 순간순간 만들어지는 것이다. 마치 딸깍하며 불이 켜지고, 딸깍하며 불이 나가는 것 마냥 그의 풍경화들은 ‘보고 파악하는 대상’과 ‘파편을 볼 수는 있지만 전체는 불가해 한 것으로 남는 존재들’ 사이를 교환 운동하는 장치가 된다.

이기봉 개인전, ≪Where You Stand≫, 국제갤러리2관(K2) 설치전경
사진: 안천호 이미지제공: 국제갤러리

표현 불가능의 무한성

위와 같이 이기봉의 미술을 철학적 논제와 연결해 볼 맥락을 제공한 이는 작가 자신이다. 그는 2008년 이후 14년 만에 국제갤러리에서 다섯 번째 개인전을 가졌다(그 사이의 침묵에 대해 누가 말할 수 있는가?). 그런데 이기봉은 이번 전시작들에서 두 갈래로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1889-1951)의 『논리철학 논고Tractatus Logico-Philosophicus』(이하 『트락타투스』)를 연관시켰다. 출품작 중 명시적으로 『트락타투스』의 문장들을 캔버스 표면에 요철 전사한 경우는 직접적이고 물리적인 연관관계다. 금속활자 인쇄술처럼 음각과 양각을 가진 설치작품 〈A Thousand Pages-White〉에서 『트락타투스』 텍스트가 부질없는 가루 안료를 통해 형태화된 경우도 그렇다. 이들 작품에서 핵심은 만질 수 있을 만큼 뚜렷이 화면에 표현되었지만 불립문자不立文字처럼 읽거나 이해할 수 없는 그 단어들, 문장들이 비트겐슈타인의 논고를 시각적으로 모방하면서 동시에 이기봉의 창작을 통해 새로운 미학을 제시한다는 점이다. 다른 갈래는 이기봉이 미술로 시도한 철학이다.

분석철학의 본령인 비트겐슈타인이 1918년, 스물아홉살에 완성한 『논리철학 논고』는 “현대 철학의 언어적 전환”으로 꼽힌다. 그중 가장 중요하고 널리 유행어가 된 논리는 맨 마지막 제 7명제다.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1가 그것. 이는 주체가 세계 안에 있는 한, 세계 자체를 객관화하는 일은 불가능함, 즉 언어로 표상할 수 없음을 뜻한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우리는 다만 사실들로 이루어진 세계의 일부만을, 그것도 “사실들의 그림들을” 그리는 일로 구체화할 수 있다. 여기서 ‘그림’은 미술의 한 장르를 일컫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모형’이다. 즉 현실 속의 대상들에 대해 우리가 갖는 이미지인 것이다. 그것은 다수이고, 결코 완전체가 될 수 없으며, 비트겐슈타인의 명제처럼 “말할 수 없는 것”이라는 불가능성의 지대를 관통해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침묵”이 “해야 한다” 같은 당위의 과제는 아닐 것이다. 트락타투스에 부친 서문에서 비트겐슈타인의 스승 버트런드 러셀Bertrand Arthur William Russell(1872-1970)은 그가 언어의 표현성에서 표현 불가능성을 주장한 논리는 뛰어나지만 그 입장을 자기가 수용하는 데는 “망설임”이 있다며 이렇게 쓰고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말해질 수 없는 것에 관해서 상당히 많은 것을 말해 나가고”2 있다고. 이를테면 표현 불가능성이 동력이 되어 표현들의 연쇄 “활동”3을 일으킨 것이다.

이기봉, 〈Where You Stand – Grey Shadow 2〉, 2022,
Acrylic and polyester fiber on canvas, 181 x 181 cm
Courtesy of the artist and Kukje Gallery
사진: 안천호 이미지제공: 국제갤러리
이기봉, 〈Where You Stand D-2〉, 2022,
Acrylic and polyester fiber on canvas, 186 x 186 cm
Courtesy of the artist and Kukje Gallery
사진: 안천호 이미지제공: 국제갤러리

존립의 가능태로서 미술

천 일 하고도 하루. 그것은 단순히 1,000일+1일=1,001일이 아니라 ‘무한’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그래서 아라비안나이트의 『천일야화』는 왕비의 부정으로 여성을 혐오하게 돼 밤마다 새 여인을 들였다가 날이 밝기 전 목숨을 빼앗는 폭군 왕의 우화가 아니다. 그렇게 왕이 설정한 삶과 죽음의 분리선을 이야기의 발화로 매일 하루씩 밀어내는 세헤라자데의 무한한 서사 예술이다. 이 대목에서 문득 이런 의문이 들지 않는가? 어떻게 끝이 없는 이야기가 가능한가? 말 짓는 재주가 뛰어나서? 경험이 풍부하고 머리가 좋아서? 물론 그럴 수 있다. 그런데 역설이지만 이야기의 무한성은 곧 우리의 한계 덕분일지 모른다. 세계를 표상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인간 언어의 한계, 생의 모든 순간을 고스란히 살아내야 하지만 그 “사실들의 총체”4를 온전히 재현하는 완벽한 매체나 투사할 스크린을 갖지 못한 생의 비극적 조건이 곧 창작의 원천이라는 말이다.

이기봉이 비트겐슈타인의 철학논고를 음양구조의 설치 작품으로 만들고 제목에 ‘1,000 페이지’를 넣은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당신의 세계, 당신이 그 안에 존립하며 보고 있으나 객관적으로는 당신을 온전히 둘러싸고있는 세계에서 지속적인 ‘있음’이 가능한 조건, 즉 무한한 표현들의 생성 활동을 은유한 것으로 보인다. 작가 이기봉에게 그 활동은 미술이겠고 말이다.

 

 


1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논리-철학 논고』, 이영철 옮김, 책세상, 2006, p. 117.
2 같은 책, p. 138.
3 러셀은 같은 서문에서 이렇게 단언한다. “철학은 교설(敎說)이 아니라 활동이다.” 같은 책, p. 126. 여기서 자세히 논할 수 없지만 비트겐슈타인은 예술가의 작업과 사유 활동을 “세계 위로 날아가, 세계를 있는 그대로 있게”하는 “영원의 관점”을 위한 두 방법으로 생각한 노트를 남겼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문화와 가치』, 이영철 옮김, 책세상, 2006, p. 34.
4 같은 책, p. 19.


강수미 미학. 미술평론. 동덕여자대학교 예술대학 회화과 부교수. 『다공예술』, 『아이스테시스: 발터 벤야민과 사유하는 미학』등 다수의 저서, 평론, 논문 발표. 주요 연구 분야는 동시대 문화예술 분석, 현대미술 비평, 예술과 인공지능(Art+AI) 이론, 공공예술 프로젝트 기획 및 비평. 현재 한국연구재단 전문위원, 국립현대미술관 운영심의위원, 한국미학예술학회 기획이사, 《쿨투라》 편집위원.

 

 

* 《쿨투라》 2023년 2월호(통권 104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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