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월평] 부재한 곳으로 가는 꿈 - 위화, 문현선 옮김, 『원청』
[문학 월평] 부재한 곳으로 가는 꿈 - 위화, 문현선 옮김, 『원청』
  • 허희(문학평론가)
  • 승인 2023.02.02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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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위화 사랑은 각별하다. 1960년대 피를 팔아가족을 부양하는 남자의 일대기를 다룬 『허삼관 매혈기』의 덕이 클 것이다. 한국에서 영화화에 나섰을 정도로 이 작품은 오랫동안 인기를 누렸다. 그 외 『인생』, 『형제』, 『제7일』 등 위화의 소설은 한국에 대부분 번역되었는데, 시대의 격변과 가족사를 연결 짓는 서사 구현 방식이 아무래도 우리 문학과 친연성이 있기 때문인 듯하다. 이번 신작도 1900년대 가족 이야기다. 가족에 천착한다는 점에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과 비교될 수 있지만, 위화는 그보다 훨씬 더 역사성에 강조점을 두는 작가이다. 왜 1900년대에 주목했느냐는 질문에 위화는 이렇게 답한다.

“이 시기를 배경으로 고른 이유는 우선 소설에 나오는 이 시기가 지금, 현대 중국에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에요. 그 시기에 마르크스주의를 비롯해서 서양의 여러 사상들이 중국으로 많이 들어왔고요. 제왕적 봉건주의 사회에서 복잡다단한 사회로의 변화 역시 그 시절부터 시작이 됐습니다. 지금 중국에 형성되어 있는 사상적 조류도 신해혁명을 주축으로 해서 그 시기부터 생겨난 것들이라고 할 수 있어요.” 위화는 소설가로서 현대 중국의 실존적 기원을 탐구하겠다는 포부를 『원청』에 담아냈다. 집필 계획을 세운 지는 오래되었다. 그는 20여 년 전부터 그러한 생각을 품은 채 관련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해두었다.

『원청』을 우리 식으로 읽으면 문성文城이다. 지역 이름으로 등장하지만 실제로 있는 지명은 아니다. 하지만 린샹푸는 아내의 고향을 원청으로 알고 있다. 샤오메이는 남편과 어린 딸을 두고 집을 홀연히 떠나버렸다. 두번째 행방불명이었다. 첫 번째로 집을 나갔다 돌아왔을 때 린샹푸는 샤오메이에게 말한 바 있다. “당신이 또 말도 없이 떠나면 내가 찾으러 갈 거예요. 아이를 안고 세상 끝까지 가서라도 당신을 찾을 거예요.” 그녀가 다시 종적을 감추자 그는 진짜로 자신이 한 말을 지킨다. 린샹푸는 아내가 향했을 곳으로 짐작되는 원청으로 젖먹이 딸을 데리고 기약 없는 여정에 나선다.

말은 그냥 재미있자고 하는 것이지 지키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고 여기는 요즘 시대에 린샹푸의 언행일치는 은근한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그는 이후에도 자기가 한 말을 지키려고 애쓴다. 그뿐만 아니라 이 소설에 나오는 대부분의 긍정적 인물은 약속을 허투루 간주하지 않는다. 법적 구속력이 있는 계약서를 쓴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신의를 따르는 데 목숨을 내건다. 이러한 사실을 놓고 볼 때 『원청』은 협俠의 세계관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중국은? 멀리서 보기에도 그렇다고 하기 어렵다. 그러니까 위화는 이 작품으로 묻는 것 같다. 현대 중국의 기원에 있는 의로움의 정신은 무슨 까닭으로 이토록 변질되었는가?

해석은 독자에게 맡기고 린샹푸는 샤오메이를 찾는 여행을 이어 나간다. 재차 언급해두건대 원청이라는 동네는 없다. 일전에 그녀와 동행했던 오빠 아창이 자신들은 “원청이라는 아주 먼 남쪽 도시”에서 왔다고 꾸며댄 말일 따름이다. 나중에야 린샹푸는 “아창이 말한 원청은 실재하지 않으며 아창과 샤오메이의 이름도 거짓이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는 아창이 묘사한 원청과 가장 비슷한 시진에서, “샤오메이가 나타날 때까지 언제까지고 시진에서 기다리리라 작정했다.” 이처럼 『원청』은 행방이 묘연한 아내를 기다리는, 고향을 떠난 한 남자의 긴 세월을 서술한다.

더불어 이 작품에는 ‘또 하나의 이야기’도 덧붙여있다. 이 부분은 샤오메이의 입장에서 쓰였다. 그녀가 어째서 린샹푸를 떠날 수밖에 없었는지, 딸을 보고 싶어 하는 심경이 어떠했는지 등을 알 수 있다. 하나의 사건을 두고 위화는 남과 여의 시각이라는 두 가지 방식으로 접근한다. 그러면서 그는 삶의 진실이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가지일 수 있음을 드러낸다. 섣부른 포용론과는 무관하다. 진실은 단번에 나타나는 것이라기보다 서서히 납득되는 것이다. 그렇게 믿는 사람만 이 소설을 쓰고 읽는다. 안 그러면 600여 쪽에 달하는 이토록 긴 이야기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진실을 그저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위해서 소설은 작동한다.

위화는 다음과 같이 인터뷰를 남겼다. “인생에서 아름다운 것은 지나쳐버리기 쉽다. 『원청』에서 린샹푸와 아내의 사랑은 이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아름다운 거다. 어딘가에는 있지만 내가 찾지 못한다고 생각하는게 가장 아름답다. 『원청』은 이런 인생의 ‘알 수 없음’에 대해 쓴 것이다.” 인생의 알 수 없음에 관해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지만, 그는 어긋난 이상과 현실을 거론한다. 누군가는 이것을 비극이나 불행이라고 단정 지으리라. 그런데 위화는 아름답다고 표현한다. 이와 같은 관점의 다름을 잘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작은 차이가 결과를 사뭇 다르게 바꾸어낸다.

『원청』은 린샹푸와 샤오메이의 운명을 그리지만, 동시에 위화가 밝히는 바 “중국 청나라 말기에서 민국 초기까지를 배경으로 삼고 (……) 치욕스러운 영토 할양과 배상금 지급을 강요받은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었”던 역사를 배경에 둔다. 한 사람이 바깥세상과 유리된 채 자기 안으로만 골몰하며 살 수 없다는 것. 설령 그렇게 보인다고 해도 그는 언제나 사회 속의 개인임을 자각해야 한다는 것. 그것을 위화는 작품이 진행되는 내내 보여주려 노력한다. 그러기에 이 소설은 토머스 모어가 집필한 『유토피아』와 겹친다. 있기를 바라되 어디에도 없는 장소인 유토피아는 공상의 산물이 아닌, 사유재산 등을 문제 삼은 매우 정치적인 저서이다. 『원청』 역시 그러함을 위화는 역설한다. 그에 따르면 유토피아, 즉 원청은 만들어질 수 있다.

“그 시절을 살았던 보통 사람들을 그려야만 그 시기에 관한 가장 기본적인 것들을 그릴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들이 대표하는 것은 이 사회의 진정한 기반이에요. 중요한 인물이나 영웅을 그리는 것은 어떻게 보면 그 시대의 뉴스거리겠죠. 반면 그 시대에 살았던 보통 서민들을 다루는 것은 정말 그 시대의 기초를 다루는게 아닌가 생각해요. (……) 민중이 역사를 만든다는 이 말이 저한테는 뿌리 깊게 남아 있어서요. 『원청』이야말로 그 민중들이 역사를 만들어내는 이야기라고 생각한 거죠.”

 


허 희 대학과 대학원에서 문학을 공부했다. 2012년 문학평론가로 활동을 시작해 글 쓰고 이와 관련한 말을 하며 살고 있다. 2019년 비평집 『시차의 영도』를 냈다.

 

* 《쿨투라》 2023년 2월호(통권 104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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