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회 쿨투라 신인상 시 부문 당선작] 「아몰퍼스」 외 2편
[제17회 쿨투라 신인상 시 부문 당선작] 「아몰퍼스」 외 2편
  • 김해솔
  • 승인 2023.02.01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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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몰퍼스

김해솔

 

도서관을 하나 상상한다. 이 도서관은 지금 내가 앉아있는 도서관 보다 중요하다. 이렇게 믿지 않으면 도서관을 상상할 필요가 없지. 지금 내가 앉아있는 도서관이 더 중요하다면. 내가 도서관을 상상하는 대신 도서관에 꽂혀있는 책을 펼치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면. 그러나 지금 나는 내 상상 속 도서관이 더 중요하다. 그래서 앉아있던 도서관에 불 질렀다면. 방화범 되었다면.

 

그럼 벌 받아야지.

 

그래서 벌 받았다. 감옥에서.
벌 받으면서, 상상 속 도서관에서 도서관 하나를 다시 상상했다.

 

*

 

시간이 흐르고 감옥에서 석방된 뒤,

 

나는 도서관에 불을 지른 전과가 있는 사람. 내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은 노래하네. 전과자는 믿을 수 없어. 믿을 수 없으니 상상할 수 없어. 상상할 수 없으니 함께할 수 없어. 나는 사람들이 함께하고 싶지 않은 사람. 그러나 여전히 상상할 수 있었네. 내 상상 속 도서관에 앉아 책 태우는

 

아이를

 

한 명 상상한다. 이 아이는 내가 상상하는 도서관 보다 중요하다. 이렇게 믿지 않아도 이 아이는 상상할 수 있지. 상상하지 않아도 함께일 수 있지. 함께이지 않아도 믿을 수 있다는 걸 내가 이 아이를 만나기도 전에 알았다면. 그래서 내가 너를 낳았다면. 그게 네게 상처가 됐다면,

 

그럼 벌 받아야지.

 

그래서 벌 받았다. 네 옆에서.
너를 끌어안으면서. 그 무엇도 상상하지 않으면서.

 

라고

 

나는 중얼거렸다. 도서관 속에서.

 


 

 

쾨니히스베르크의 다리

 

 

그 사람과 헤어진 날

 

너는 식빵을 먹다가
식빵을 식빵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부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탄생한 식빵의 첫 번째 이름

 

공허

 

그 뒤로 너는

 

그 사람에게
보고 싶다고 말하지 못할 때마다

 

공허를 뜯어먹었다
공허는 영양가가 없어 아무리 뜯어먹어도 배가 고팠고
배가 고프니까 너는

 

공허 와 공허 사이에

 

계란이나

양상추 같은 것들을 넣어 먹기 시작했는데 그러자

 

공허를 다른 이름으로 부르고 싶어졌다 그렇게
탄생한 식빵의 두 번째 이름

 

방어

 

그림2에 담을 수 없는 건 두 가지다


그 사람의 전화

그 사람의 사과

 

그러니까 이건… 삼킬 수 없겠어

 

(너는 중얼거리고)

 

그렇게
탄생한 식빵의 세 번째 이름

 

초원

 

보다 더 새파란 초원
어쩌면 보다 더 새파란 초원 그 옆에 더 새파란 초원과 각각의

 

연결된

 

초원 한 가운데 나는 서있다 초원의 크기가 나보다 작다 초원이 작은 것일까 네가 큰 것일까, 너는 묻고

 

한 가운데를 향해 손을 뻗는다

 

펑!

 

우리가 함께 서있던 다리가 터지기 전에

 


 

 

아우또노미아

 

 

플라스틱 벽으로 조직된 실험실 안, 과학자들이 몰려있다
수근거린다

 

오늘도 한 건 해냈군
사랑 하나를 또 발명해냈어

 

이번엔 살릴 수 있을까?

 

나는 사랑을 본다 평소엔 투명하나 빛을 받으면 잠깐 그 형상이 불투명해지는게 특징인 사랑이다 사랑의 재질이 유리와 유사해 보여서, 순간적으로 나는 사랑의 표면에 물세례를 날린다 사랑이 나를 본다

 

미안

 

순간적으로 나는 사과한다 순간적인 일들이 반복되었으므로 사랑은 서사인가 사랑을 쳐다보며 나는 중얼거린다 과학자들이 키득대기 시작하고. 나는 그들이 웃는 까닭을 추리한다 1. 내가 사랑 앞에 서툴러서. 2. 내가 그러든 말든 사랑은 내게 관심 없을 것 같아서. 3. 나도 과학자니까. 나는 묻는다

 

4번입니까?

 

과학자들이 웃음을 멈추고 나를 본다 사랑이 과학자들 사이를 가로질러, 내 앞에 선다 왼손으로 내 주머니에서 4번을 꺼내고, 오른손으로 내 왼손을 잡으며 사랑이 묻는다

 

어디서 난 거야

몰라 그냥 있던데

거짓말

다칠까 봐

누가

테트리스 할래?

누가 세로로 떨어질 건데?

 

그리하여 실험실 밖으로 동시에 떨어진 우리는 달리기 시작한다 뛰어!
더 빨리! 잠깐만, 망설여도 쌓이는

 




 

떼가 하늘을 가로지른다

 

고니의 종류는 흔히 두 가지다 흑조와, 백조. 오리과에 속하는 대형 물새로 겨울철에만 우리나라를 찾는다고, 달리던 도중 사랑이 말한다.

 

잠깐,
지금 8월인데?

 

 


김해솔 1994년 서울 출생.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동국대 국어국문문예창작과에서 석사과정을 밟고 있다. 호저(초월일기, 호저의 초월TV)의 본체다.

 

 

 

* 《쿨투라》 2023년 2월호(통권 104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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