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월평] 불꽃같은 정염의 폭발과 서늘한 추, 누가 유령인가?
[영화 월평] 불꽃같은 정염의 폭발과 서늘한 추, 누가 유령인가?
  • 강유정(영화평론가, 강남대 교수)
  • 승인 2023.02.02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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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총과 폭탄 그리고 항거

이해영 감독의 〈유령〉은 마이자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중국 영화 〈바람의 소리〉(2009)를 리메이크한 작품이다. 〈유령〉의 소재는 일제강점기 비밀스럽게 진행되었던 가상의 무력 항일 투쟁이다. 남들은 투쟁을 사랑한다지만 평화를 사랑했던, 언제나 비폭력 시위가 먼저였던 고답적 일제강점기 항일 운동 재현의 시기를 지나 우리 영화에서도 의열단을 비롯한 무력 항일 운동이 그려지기 시작한 지는 오래되지 않았다. 평화적 항일 운동 재현에서 항일 지사는 언제나 피해자 혹은 희생자 문법으로 그려지기 일쑤였다. 혹여, 무력 운동이 그려진다면 무정부주의자들의 자유를 위한 일탈로 묘사된 적도 많았다.

무력 항일 운동이 발굴되고, 연구됨에 따라 그 재현도 점차 많아졌다. 이후 무력 항일 운동은 임시 정부 주도로 면밀하게 이루어졌던 적법한 항일 운동 중 하나로 대접 받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영화 문법이 가장 큰 자극을 받았다. 총과 폭탄이 허락된다면, 액션 장르의 상상력이 무한히 열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준익 감독의 〈동주〉(2016)나 조민호 감독의 〈항거:유관순 이야기〉(2019)가 보여주는 높고 지순한 뜻도 있겠거니와 허구와 가상, 상상의 힘을 통해 빚어지는 박력이 주는 영화적 재미도 크다. 그래서 일제강점기는 우리 역사상 보기 드문 총기 액션이 가능한 무대로 재조명되었다.

최동훈 감독의 〈암살〉(2015)이나 김지운 감독의 〈밀정〉(2016)은 액션 영화의 문법으로 재탄생한 일제강점기 항일 운동 서사의 힘을 잘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약산 김원봉을 중심으로 한 게릴라, 무력시위는 총이나 폭탄과 무관한 듯 보였던 경성을 새로운 액션의 장소로 바꾸어 놓았다. 이해영 감독의 〈유령〉은 이런 맥락 가운데 놓여 있다. 숨어서 평화적으로 활동하기만 한 게 아니라 총과 폭탄을 지니고 일제 세력을 없앴던 무장 항일 투쟁 세력들, 그들의 움직임을 그려냈으니 말이다.

2. 첩보극에서 액션으로

마이자의 소설 원작과 중국 원작은 ‘메시지The Message’라는 영어제목답게 반드시 전해야만 하는 메시지 전송 임무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조직을 지키기 위해, 임시 정부의 안위를 위해, 숨어 있는 항일 세력 유령은 자기의 목숨조차 초개와 같이 버린다. 이 과정에서 부각 되는 것은 밀실에서의 숨막히는 취조 가운데 서로가 서로를 불신하는 미스터리와 스릴러의 터질듯한 길항감이다. 마치 아가사 크리스티의 소설처럼 밀실에 갇힌 용의자들은 자신의 무죄와 무관함을 입증하거나 죽기 전에는 폐소를 벗어날 수 없다. 그 가운데 유령은 메시지 전송의 임무를 완수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조직이 아예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다. 모여 있는 사람들 속에 분명 유령은 있고, 유령은 메시지를 남겨야 하며 일경과 일군은 그 유령을 색출해야 한다. 관객들은 밀실 속 인물들의 폐소 공포와 두려움, 들킬지도 모르는 아슬아슬한 긴장감을 고스란히 경험한다.

기본적으로 이야기의 긴장감은 바로 이 첩보물, 스파이물의 묘연함과 과연 누가 유령인가를 추리해나가는 과정의 후더닛의 전략 게임에서 비롯된다. 이해영 감독 역시 이 긴장감의 균형을 잘 맞춰 내면서 리메이크의 단점이라고 할 수 있을 이미 공개된 정답을 피해, 기출 변형을 한 새로운 용의자와 답을 내놓고자 한다. 이 기출 변형 과정에서 이해영 감독이 가장 집중한 것은 바로 액션의 질감이다. 〈바람의 소리〉가 심리적 긴장감에 초점을 맞췄다면 이해영 감독은 그 긴장감을 쌓아 올리다가 한 순간의 액션으로 폭발시킨다. 이후, 원작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무력 항일 투쟁의 방식 즉 총과 폭탄을 든 항거의 방식으로 밀실에서 도망쳐 나와 일제에 맞선다. 〈바람의 소리〉가 메시지를 전하는 데 집중한 정적인 첩보 스릴러였다면 〈유령〉은 이와 결별해, 경성판 총기 액션물로 장르적 전환을 선택한다.

여기서 돋보이는 것은 단연 여성 연기자들의 액션이다. 특히 박소담은 내면적 긴장감이나 비밀을 숨기고 들키고 드러내는 다면성, 액션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층적 면모를 선보이는데, 탁월한 장점을 선보인다. 또 다른 여성 배우인 이하늬는 지금껏 한국의 여성 액션에 있어 한계로 볼 수 있었을 법한 비개연적 신체적 한계를 탄탄한 균형감으로 제압한다. 건장한 남성 배우와 액션의 합을 겨루고, 다퉈도 어색하거나 불안하지 않다. 그 자체만으로 여성을 내세운 액션 영화에서 어떤 성과를 거두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듯 싶다.

3. 선의 영화에서 불의 영화로

원작 〈바람의 소리〉에는 바느질과 수가 여러 번 등장한다. 수라는 여성적 방식을 통해, 비밀이 전달되기도 하고 암호가 제작되고 풀어지기도 한다. 수를 놓는 데 필연적인 바늘이 등장할 수밖에 없고, 그 긴장감의 성격 역시 바늘처럼 첨예하고 섬세하며 날카롭다. 하지만 〈유령〉은 ‘불’의 영화이다. 영화가 시작되면, 한 여성이 다른 여성에게 다가가 담배불을 빌린다. 두 사람은 불이 붙은 담배도 교환한다. 이 불은 총구의 불꽃으로, 옷을 찢어 기름을 적신 화염병의 심지로, 폭탄의 엄청난 폭발력으로 마침내 건물을 집어삼키는 화염으로 연쇄된다.

그 불꽃은 이내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은은히 흐르는 퀴어 코드 위를 흐르기도 한다. 비밀의 대본, 암호를 통한 접선, 주고받는 불씨와 담배, 사랑했던 연인을 따라 투신한 항일운동과 같은 표면 서사 아래 사랑했으나 맘껏 표현하지 못했던 연인들의 비밀스러운 애틋함이 묻어난다. 그 사랑은 스파이들의 첩보처럼 몰래 주고받아야 했던 금지된 사랑의 시그널들로 은연중 전달된다. 그렇든, 그렇지 않든 사실여부를 차치하고, 금지된 에로스의 불꽃은 영화의 긴장감을 더 높여준다.

최근 이해영 감독은 리메이크 영화에 집중하는 듯싶다. 전작인 〈독전〉 역시 동명의 두기봉 감독 영화를 재해석한 작품이었다. 리메이크 과정에서 이해영 감독은 한국만의 그리고 감독만의 독특한 해석을 캐릭터의 새로움으로 녹여 낸다. 〈유령〉 역시 여성 캐릭터들의 재해석이 눈에 띈다. 의존적이거나 보조적인 캐릭터가 아니라 독립적이며 입체적인 여성 캐릭터는 최근 어떤 한국 대중 영화보다도 단연 돋보인다. 일제강점기 시대, 멜팅팟이었던 경성 문화의 세련된 재현도 감독의 감각을 보여주기 충분하다. 우리만의 갈등으로 재해석해내는 과정, 이해영 감독의 리메이크엔 우리의 시대와 정서, 감독이 바라는 세상의 전망이 담겨 있다.

 


강유정 고려대 국어국문학과 대학원 졸업. 2005년 《조선일보》 《경향신문》 《동아일보》 신춘문예 동시 당선으로 등단, 저서로는 『영화 글쓰기 강의』 『타인을 앓다』 등이 있다. 현재 강남대학교 한영문화콘텐츠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사진 제공 CJ ENM

* 《쿨투라》 2023년 2월호(통권 104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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