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비평] 예술은 공식이 아니다 - 고정관념에 대처하는 아웃사이더의 자세
[예술 비평] 예술은 공식이 아니다 - 고정관념에 대처하는 아웃사이더의 자세
  • 오혜재(독학 예술가)
  • 승인 2023.02.02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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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보, 아프리카!(2018). 29.7 × 42 cm. 혼합 매체.

나는 영문학도였다. 문학도라면 작품 전체의 메시지를 결정짓는 첫 문장이 작가들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안다. 영문학에서 가장 유명하고 강력한 첫 문장으로는 허먼 멜빌의 소설 『모비딕』의 그것을 꼽는다. “나를 이스마엘이라 불러주오. Call me Ismael.” 이스마엘은 성서에 등장하는 아브라함의 서자다. 여종이었던 어머니와 집에서 쫓겨나 사막에서 방랑하며 고난을 겪지만, 신의 은총을 받고 아랍인들의 조상이 되는 인물이다. 문장 하나로 독자들은 부평초같이 부유하며 곡절많은 인생을 살아온 소설 속 뱃사람들과 생생히 마주하게 된다.

문학에서 『모비딕』이 있다면, 미술에서는 영국의 미술사학자 에른스트 H. 곰브리치의 저서 『서양미술사』가 있다. 1950년에 발간된 이후 35개 언어로 번역되고 16차 개정판까지 나올만큼, 미술계의 전설적인 예술서다. 이 책은 “미술이라는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미술가들이 있을 뿐이다. There really is no such thing as art. There are only artists.”라는 문장으로 시작된다. 여기에는 이 책이 선사시대부터 현대까지 각 나라와 민족의 다양한 미술 현상을 조망하는 역사서로서, ‘다름’만 존재할뿐 차별과 서열화를 낳는 어떠한 고정관념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작가의 가치관이 응축되어 있다.

삐뚤어지니까 예술가다

고정관념은 선입견에서 시작된다. 선입견은 특정 경험을 통해 마음 속에 자리잡게 된 생각으로, 이는 지극히 개인적이면서 쉽게 변할 수 있다. 그러나 일부 경험을 통해 선입견에 대한 확신이 생기면 이는 특정 관념으로 ‘고정’된다. 이렇게 굳어진 생각은 그에 따른 실질적인 행동과 태도를 낳게 되는데, 이것이 편견이다. 편견의 단계에서는 소통, 수용, 합의, 변화 등의 유연함을 허용하기가 쉽지 않다. 소위 ‘고인 물’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고정관념을 타파하는 노력이 지속적으로 필요하다.

특히 예술가에게 고정됨은 경계대상 1순위다. 예술의 근원은 창작이다. 창작은 기존에 없던 새로운 무언가를 생산해 내는 행위다. 미국의 추상표현주의 화가 바넷 뉴먼의 말처럼, “예술 작품이 예술 작품이 되려면 문법과 구문론을 초월해야 한다.” 그렇기에 예술가는 새로움과 맞닥뜨린 기존 체제의 반발과 비판을 극복하고, 사회의 한 부분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한 산고産苦도 종종 감수하게 된다. 19세기 자연주의 문학의 대가이자 미술비평가였던 에밀 졸라는 “문학과 예술의 역사는 인간의 정신이 새롭게 표출될 때마다 그것을 덮어버리려던 비난을 보여주는 순교자의 명부다”라고 했다. 어쩌면 예술가는 필연적으로 삐뚤어져야 하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아웃사이더의 이유 있는 반항, 낙선전

아이러니하게도, 그리고 안타깝게도 근현대 미술사에서 예술에 대한 고정관념은 점차 심화되어 왔다. 서양에서는 선사시대부터 중세에 이르기까지 ‘예술art’이라는 말이 인간의 창조 행위 전반을 의미했다. ‘art’는 라틴어 ‘ars’에서 유래한 말로, 그리스어 ‘techne’를 직역한 것이며, 원래는 순수예술과 응용예술(또는 실용예술, 생활예술, 장식예술)이 구별되지 않았다. 이러한 구별은 르네상스 시대에 예술에 대한 수요가 증대함에 따라, 예술가의 사회적 지위가 소시민적 수공예인으로부터 자유로운 정신노동자로 변화하면서 예술가라는 직업이 등장한 이후에 생겨났다. 그리고 예술가에 의한 순수예술이라는 개념은 18세기 이후에 확립됐다. 동양에서도 원래는 순수예술에 해당하는 개념이 없었으나 19세기에 서양 미술을 받아들이면서 비로소 순수예술과 비순수예술을 구별하게 됐고, 그러한 구별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윌리엄 모리스, 『모리스 예술론』).

19세기 영국의 예술사상가 윌리엄 모리스는 르네상스와 그 이후 여러 예술가들의 예술을 평가절하했고, 르네상스 이후 직업적인 천재 예술가의 등장을 ‘예술의 타락’이라고 비판했다. 러시아의 대문호이자, 모리스처럼 인민예술론을 추구했던 레오 톨스토이는 ‘모조 예술’의 등장에 대해 개탄하면서, 모조 예술품의 생산에 기여하는 3가지 조건으로 ‘예술가의 직업주의, 비평, 예술학교’를 꼽았다. 이들 비판의 핵심은 예술작품이 상류층 등 특정 계급의 전유물이 되거나 돈만 쫓는 타락한 자본주의의 부속품으로 전락한다는 점, 비평과 학교 교육체계에서 새롭고 참신한 예술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대신 기존의 익숙하고 전통적인 잣대를 들이댄다는 점이었다. 예술가 데이비드 베일즈와 테드 올랜드는 저서 『예술가여, 무엇이 두려운가!』에서 현 시대의 예술가들이 처한 딜레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예술 석사학위가 (혹은 현대예술에 대한 지식조차) 예술 창조의 선결조건이 아니라는 의견은 틀린 말이 아닌 것 같다. 어쨌든 예술은 예술 관련 학과가 나오기 훨씬 이전에, 누군가 예술가들의 작품들을 분류하고 수집하기 훨씬 이전에 이미 존재했던 것이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예술가 대부분은 정규 훈련을 받으며 예술 세계의 경향을 익히고, 화랑이나 대학에 의존해 살아나가고 있다…(중략)…예술가들이 일상적으로 직면하게 되는 문제들 중의 하나는 예술 체계 및 예술 체계가 중요하게 여기는 문제들과 조화를 이루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점차 박제화剝製化 되어가는 예술계 안에서 근현대 예술가들은 많은 현실적 어려움과 좌절을 겪어왔다. 동시에 이들은 예술가로 남고자 기존 체제를 대상으로 유의미한 반격을 가했다. 대표적인 예가 1863년 개최된 ‘낙선전Salon des Refusés’이다.

19세기 중반을 기점으로 프랑스 미술계는 크게 두 가지 예술 사조가 자리잡고 있었다. 하나는 기존의 고전주의적인 양식을 답습하며 국가 주도의 살롱Salon 체제를 따르는 제도권 예술가들이었다. 미술학교의 교육과정과 살롱 심사위원들도 대부분 이 정통의 계보를 이어받은 이들이었다. 또 하나는 제도권 미술에 반발하는 비제도권 화가들이었다. 이들 제도권-비제도권 미술가들 간 대립은 표면화되었고, 살롱전에 등장한 비제도권 미술작품들에 대해 보수적인 심사위원단과 평론가들은 혹평을 쏟아냈다. 살롱전은 예술가로서의 성공을 위한 보증수표인 동시에, 창조와 혁신을 가로막는 장애물이기도 했다.

제도권-비제도권 간 갈등이 극한으로 치닫던 1863년, 살롱전 심사위원단이 유난히 보수적이고 엄격한 심사 기준을 적용하면서 출품작 5,000점 중 절반 이상이 낙선했다. 이례적인 낙선 비율로 미술계에서는 편파 심사에 대한 반발이 확산되었고, 황제 나폴레옹 3세는 살롱 인근에 ‘낙선전’이라는 이름으로 낙선 작품들을 전시하라고 명했다. 관객과 평론가들의 호응을 얻기는 어려웠지만, 낙선전은 프랑스 예술의 해방과 인상주의의 기폭제가 되었다. 또한 1884년부터 현재까지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프랑스 독립미술가협회 ‘앙데팡당Indépendants’의 효시가 되었다.

달밤(2020). 42 X 59 cm. 혼합 매체.

굴레를 벗어나

나는 독학 예술가self-taught artist다.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한국예술인복지재단에서 예술활동 증명을 승인받았지만, 한국 미술계에서는 여전히 낯선 정체성이다. 외국에서는 오래전부터 아웃사이더 아트의 영역에서 활동하는 비주류 예술가들을 인정해 주었다. 비주류 예술의 개념은 1920년대 초 유럽에서 정신병동 내 정신질환자들의 그림에서 태동했고, 1945년 프랑스의 화가 장 뒤뷔페가 정신질환자, 지적장애인, 소외계층 등의 예술을 ‘날 것의 예술raw art’이라는 뜻의 ‘아르 브뤼art brut’로 정의하면서 개념이 보다 명확해졌다. 1972년 영국의 예술학자 로저 카디널이 아르 브뤼의 영문 번역어로서 ‘아웃사이더 아트outsider art’라는 용어를 고안했고, 이는 ‘독학 예술self-taught art’을 비롯해 ‘민속 예술folk art’, ‘나이브 아트naïve art’ 등 다양한 개념으로 세분화되었다. 뒤뷔페가 설립한 ‘아르 브뤼 컬렉션Collection de l’Art Brut은 또다른 이름의 낙선전인 셈이다.

한국사회에서 독학 예술가로 활동한 지난 9년간 나는 무수한 시행착오 속에서 지식과 경험을 축적하고, 예술에 대한 나의 의지와 열정을 이해해주는 사람들을 찾아나갔다. 이들 시행착오는 대부분 예술계에 산재된 고정관념에서 비롯되었다. 미대 졸업장이 없다는 이유로 전문 갤러리에서 전시 공간 사용을 거절당한 적도 있었고, 해외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나이 제한이 국내 공모전에서는 심심치 않게 적용되어 발목을 잡기도 했다. “그림은 가급적 커야 하고, 캔버스에 그려야 하며, 소위 ‘돈 되는’ 소재와 색감을 사용해야 한다”는 일종의 예술 공식같은 이야기도 들었다. 중요한 것은 나에게는 ‘모르는 게 힘’이었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몰랐기에 폐쇄적으로 사고하지 않고, 열린 마음과 남다른 열정으로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자 노력했다. 곰브리치의 말처럼, 예술을 공식화하지 않는 예술가가 결국 승리할 것이다.

사실상 어떤 시기의 일부 미술가나 비평가들이 그들의 미술의 법칙을 공식화하려고 시도한 적이 있었지만 결과는 항상 같았다. 즉 신통치 않은 미술가들은 이러한 법칙을 적용하려고 노력했지만 아무것도 이루어내지 못한 반면에, 위대한 대가들은 그러한 법칙을 깨트리면서도 이전에는 아무도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그런 새로운 형태의 조화를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오혜재 독학 예술가.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영어영문학 학사(언론정보학 부전공)와 다문화·상호문화 협동과정 석사 학위를 받았다. 정규 미술 교육을 받지 않고 2014년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 국내외 다양한 전시행사에 참여해왔다. 2007년부터 유네스코한국위원회에서 근무하고 있다. 저서로는 『저는 독학 예술가입니다』, 『독학 예술가의 관점 있는 서가: 아웃사이더 아트를 읽다』, 『유네스코 70년사: 23가지 키워드로 읽는』, 『미국의 우상이 된 쿠바인, 핏불: 초국적 시대, 나로 살아가기』가 있다

 

 

* 《쿨투라》 2023년 2월호(통권 104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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