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 역사의 문학화를 내건 소설로 읽는 한국문화사 - 『소설로 읽는 한국여성사 Ⅰ, Ⅱ』
[북리뷰] 역사의 문학화를 내건 소설로 읽는 한국문화사 - 『소설로 읽는 한국여성사 Ⅰ, Ⅱ』
  • 해나(본지 에디터)
  • 승인 2023.02.02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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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한국작가회의 소설분과에서 기획한 『소설로 읽는 한국여성사 Ⅰ: 고대 중세 편』, 『소설로 읽는 한국여성사 Ⅱ: 근세 현대 편』이 ㈜서연비람에서 출간되었다.

영국의 역사학자 트레벨리언George M. Trevelyan은 “역사의 변하지 않는 본질은 이야기에 있다”고 말하면서 역사의 설화성을 강조했다. 설화의 근간은 서사narrative이다. 1990년대 이후 한국 소설에서 서사가 사라졌다는 이야기가 유령처럼 떠돈다. 우리는 서사가 문학 작품뿐만 아니라 역사서의 기술에도 많이 사용해 왔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사마천司馬遷이 지은 『사기史記』의 상당부분은 인물의 전기로 채워져 있고, 김부식의 『삼국사기』도 전기를 풍부하게 싣고 있다. 일연의 『삼국유사』는 불교 설화를 비롯한 여러 가지 서사가 풍부하게 실려 있다.

한국사를 총체적으로 살펴보려면 정치사뿐만 아니라 경제사·사회사·문학사·음악사·미술사·철학사·종교사상사·교육사·과학기술사·상업사·농업사·환경사·민중운동사·여성사 등 한국문화사를 들여다봐야 한다. 마침 한국문화사를 소설가들이 소설로 접근하면 어떻겠느냐는 논의를 진행해온 (주)서연비람이 (사)한국작가회의 소설분과 위원회 소속 소설가들에게 집필을 의뢰하여 ‘소설로 읽는 한국문화사’ 시리즈의 첫 번째 기획물인 『소설로 읽는 한국 여성사Ⅰ:고대·중세편』과 『소설로 읽는 한국 여성사Ⅱ:근세·현대편』을 기획하게 되었다.

『소설로 읽는 한국 여성사Ⅰ:고대·중세편』에는 김종성 소설가가 집필한 중편소설 1편과 하아무·박선욱·엄광용·이진·정우련·김민주·유시연 소설가가 집필한 7편의 단편소설이 실려 있다. (사) 한국작가회의 소설분과 위원회 소속 8명의 소설가들이 한국사 속에서 치열한 삶을 살아갔던 유화부인·낙랑공주·허황옥·도미부인·평강공주·선덕여왕·문명왕후·기황후를 언어라는 존재의 집으로 초대해 그들의 삶과 사상을 탄탄한 문장으로 형상화했다.

유화는 준비해두었던 것을 주몽 앞에 내어놓았다. “넌 상황이 심각한 것을 모르느냐?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건만.” 유화는 주몽을 응시하며 엄하게 재우쳤다.

“송구합니다, 어머니.”

주몽은 머리를 숙였다. 예주와 함께 있는 시간이 그리도 속절없이 빨리 흘러갈 줄 몰랐다. 유화는 주몽의 손을 잡았다. 떠나야 하는 아들을 책망하고만 있을 때가 아니었다.

“명심해야 한다. 너는 아버지의 나라 조선을 다시 일으켜 세워야만 한다. 그것이 너의 사명이다.”

수없이 얘기했던 말이지만 다시 일깨워준다. 평소 같으면 주몽도 “제가 어찌 그렇게 큰일을 감당한단 말입니까” 의문을 제기했겠지만, 이 순간까지 그럴 수는 없었다.

“분골쇄신하겠습니다.”

유화가 듣고 싶었던 말이다.

“그리고 이것을 가져가거라…….”

유화는 준비해두었던 것을 주몽 앞에 내어놓았다.

“씨주머니다.”
“예? 씨주머니?”
“다섯 가지 곡식의 종자니라. 보리와 콩, 조. 기장, 그리고 삼씨다. 잘 간수해 가져가거라.”

- 『소설로 읽는 한국여성사 Ⅰ:고대 중세 편』, 25쪽

『소설로 읽는 한국 여성사Ⅱ:근세·현대편』에는 류서재 소설가와 은미희 소설가가 집필한 중편소설 2편과 조동길·박숙희·김세인·정수남·김현주·김찬기·안학수 소설가가 집필한 7편의 단편소설이 실려 있다. (사) 한국작가회의 소설분과 위원회 소속 9명의 소설가들이 한국사 속에서 치열한 삶을 살아갔던 신사임당·황진이·허난설헌·논개·김만덕·차미리사·강주룡·유관순·최 용신을 언어라는 존재의 집으로 초대해 그들의 삶과 사상을 탄탄한 문장으로 형상화했다.

미리사는 손바닥이 뜨거울 정도로 대동교육회의 봉선화 빛 붉은 노을을 바라보며 물김치 국물을 마시고나서 껍질째 찐 감자를 베어 먹는다. 소가 되새김질하듯이 우물거리다 김칫국물 사발을 입으로 가져간다, 곤죽이 된 감자 국물이 흘러내린다. 그녀는 자기 손을 바라본다. 아, 내가 감자를 먹고 있었지, 하고 의식이 되살아난다.

노을이 사라지고 없는데, 현감 마님은 아직도 들어오지 않고 있다. 현감 마님은 어머니 장례를 치른 이후부터 산소 옆에 초막을 짓고 낮 동안엔 그곳에서 기거하다가 저녁엔 집에 온다. 하루에 조반 한 끼로 연명하기 때문에, 그녀도 점심 저녁을 짓지 않고 찬밥이나 고구마 감자 등 되나마나 끼니를 때운다.

조금 후면 어둠이 날개 달린 짐승처럼 검은 깃을 펼치며 내려앉을 텐데, 현감 마님은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있다. 그녀는 아까부터 현감 마님의 방문이 신경쓰인다. 근신하는 현감 마님은 가능한 모든 언행을 간소화하고 있다. 출입할 때 차리던 격식도 그중 하나이다. 집을 나설 때 방문을 열어놓고 집에 돌아와서는 방문을 닫는 것으로 당신의 출입을 식솔들에게 알리는 것이다. 발걸음 소리가 크지 않고 헛기침하는 버릇도 없어서, 일부러 신경 쓰지 않으면 이 양반이 들어왔는지 나갔는지 알 수가 없을 지경이다.

어둠이 집안을 덮치기 전에, 방안에 어둠이 들어앉기 전에 방문을 닫아드려야겠어. 그녀는 몸을 일으킨다.

- 『소설로 읽는 한국여 성사 Ⅱ: 근세 현대 편, 121쪽

역사의 문학화를 내걸고 소설로 읽는 한국문화사를 기획한 ㈜서연비람이 (사) 한국작가회의 회원 소설가 9인에게 집필을 의뢰한 9편의 신작 중단편소설은 한국사 속에 삶을 영위했던 여성들을 언어라는 존재의 집으로 초대하고 있다. 한국작가회의 소설분과 위원회 회원 소설가 9인이 소설을 통해 새로 쓴 한국여성사이다.

 


 

 

* 《쿨투라》 2023년 2월호(통권 104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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