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베를린의 다양성과 예술성을 높인 한국영화: 〈우리와 상관없이〉, 〈길복순〉, 〈물 안에서〉
[베를린] 베를린의 다양성과 예술성을 높인 한국영화: 〈우리와 상관없이〉, 〈길복순〉, 〈물 안에서〉
  • 설재원 에디터
  • 승인 2023.03.02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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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16일부터 베를린에서 펼쳐진 11일 동안의 영화 축제가 26일 시상식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최근 몇 년간 전 세계 시상식에 성실하게 출석하던 한국영화가 오래간만에 이름을 올리지 못하며 한편으로는 허전한 감이 있지만, 그래도 한국영화는 한층 격상된 위상에 걸맞은 작품으로 전 세계의 영화인들에게 눈도장을 남겼다. 올해 베를린을 찾은 한국영화는 유형준 감독의 〈우리와 상관없이〉, 변성현 감독의 〈길복순〉, 홍상수 감독의 〈물 안에서〉로, 각각 ‘포럼’, ‘베를리날레 스페셜’, ‘인카운터스’ 섹션에 초청받았다.

 

영화사 능소 제공
영화사 능소 제공

젊은 신예 감독의 탄탄한 장편 데뷔작
유형준 감독의 〈우리와 상관없이Regardless of Us

개막 이튿날 첫 선을 보인 유형준 감독의 장편 데뷔작 〈우리와 상관없이〉는 구조와 절제미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작품은 2막 구조로 구성되어 있다. 1부에서는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기억을 잃은 배우 화령이 병문안을 온 제작진을 만나 시사회와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2부에서는 앞선 인물들이 다시 등장하여 관객으로 하여금 1부에서의 내용을 확인하고 의심하게 한다. 철저하게 화면을 통제한 채 정적인 카메라가 담아내는 롱테이크는 흑백 화면 속 드리운 콘트라스트를 배경으로 섬세하게 짜인 대사에 집중하게 한다. 그래서 〈우리와 상관없이〉는 93년생 젊은 감독의 데뷔작이지만 중후함과 깊은 관록이 느껴지고, 반복과 변주를 건너 마지막 장면까지 끌고가는 힘이 있다.

익숙한 인사동 길이나 흑백 화면의 미니멀한 구성, 어마어마한 대사량은 감독의 국적을 떠나서라도 홍상수를 연상시킨다. 그렇지만 〈우리와 상관없이〉는 현실과 허구 사이를 떠도는 미묘한 본질을 찾아 나선다는 점에서 분명히 유형준 감독만의 차이와 철학이 눈에 띈다. 조각난 이야기의 파편들을 관객 스스로 재조립하게 함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우리가 주변의 세계를 어떻게 형성하는지에 대한 실존적 의문을 낳게 한다.

유형준 감독은 월드 프리미어 상영 후 관객과의 대화에서 “(영화에서) 다들 자기가 주인이라고 생각하는데, 처음에 구상했던 모델은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이야기 자체였으면 했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이 작품이 이야기에서 출발한 것은 아니다. “계속해서 살아 움직이는 ‘입방체’ 같은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는 유 감독은 이를 구현하기 위해 이야기나 상황 등을 재료로 활용했다고 한다. 영화 속 1부와 2부 사이에는 제작 과정에서 1년여의 공백기가 있는데, 그동안 유 감독은 이 입방체를 구현하기 위해 고민했고 그 결과가 1부에 맞춰 찍은 지금의 2부이다. 그래서인지 〈우리와 상관없이〉는 관객에게 계속해서 질문을 던지며 잔잔한 파문을 일으킨다.

 

넷플릭스 제공

전도연은 역시 전도연이었다
변성현 감독의 〈길복순Kill Boksoon

여성 킬러 주인공을 전면에 내세운 영화는 이래저래 쿠엔틴 타란티노의 〈킬빌〉을 연상시키기 마련이다. 〈길복순〉은 이러한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길복순’이라는 제목을 붙여 한국어의 언어적 재미를 살리는 동시에 쿠엔틴 타란티노에게 영향 받았음을 직접적으로 시사하고 있다. 청부살인업체의 에이스인 주인공 복순은 중학생 딸을 둔 싱글맘이다. “사람 죽이는 건 심플해 애 키우는 거에 비하면”이라고 말하는 복순은 계약 기간 만료가 다가오자 일을 그만두고 엄마로서 충실해보려 한다. 그러나 헌터의 세계에서 은퇴는 그리 간단치 않다. 어느새 먹잇감이 돼버린 복순은 본인 스스로와 딸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이벤트로 향한다. 정밀하게 세공된 화면 위에서 펼쳐지는 위트 넘치는 대사와 찰진 음악, 그리고 맛깔나는 편집은 짧지 않은 137분 동안 작품 속으로 깊게 빠져들게 한다. 특히 배우들의 호연이 영화의 완성도를 한층 높였는데, 그중에서도 영화를 이끌어가는 전도연의 연기는 단연 압권이었다.

피를 쫓는 여타의 잔혹한 킬러들과 달리 전도연이 분한 복순은 그저 세상의 여러 직업 중에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그리고 수입이 괜찮은) 살인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복순은 살인에 임할 때 감정적 요동 없이 평온하고 심지어는 유쾌하기까지 하다. 월드 프리미어 전 기자회견에서 전도연은 액션 연기에 부담이 컸고 정말 잘 하고 싶었다고 밝혔는데, 전도연은 역시 전도연이었다. 스타일리시한 그녀의 액션은 자기주장이 강한 카메라와 시각효과를 만나 현실과 환상을 넘나들며 재미난 볼거리를 만들었다.

그렇지만 똑부러진 딸을 대할 때만은 여느 부모와 마찬가지로 복순 역시 코너에 몰린다. 딸 앞에서는 쿨한 모습만 보이려 애쓰지만 ‘싸가지 없는’ 딸은 누굴 닮았는지 무심하게 성질만 살살 긁을 뿐이다. 그래도 하나뿐인 딸만은 자신과는 다른 길을 걷길 바라며 집 안에서 온실을 가꾸는 등 다른 환경을 만들어주려 노력한다. 그러나 어느새 딸에게서도 자신과 닮은 (킬러의) 모습이 보이고, 퍼펙트한 킬러 복순에게 감정적인 균열이 생긴다. 복순의 감정적인 동요는 오직 딸에 의해서만 나타나고, 딸이 학교생활과 연애로 겪는 어려움이 심화될수록 같은 시간 다른 곳에서 복순의에게 물리적·정서적인 상처가 한 겹 두 겹 더해진다. 엄마로서 복순이 겪는 구불구불한 감정선을 이번에도 전도연은 완벽하게 보여주었다.

작가주의적 경향이 강하고 사회적인 이슈에 특히 예민한 베를린영화제지만, 장르영화인 〈길복순〉은 이곳에서도 현지 평론가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다. 로마독립영화제RIFF의 고문을 맡고 있는 지오반니 오토네는 〈길복순〉을 영화제 초반을 가장 빛낸 영화라고 극찬하며 (베를리날레 스페셜 보다는) 경쟁부문에 걸맞는 작품이라고 평했다. 그리고 일반 관객 시사에서는 극장을 가득 메운 관객으로 그야말로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다. 흔히 3대 영화제로 불리는 영화제 중 베를린영화제는 영화인이 아닌 일반 관객의 접근성이 가장 뛰어난 곳이다. 넷플릭스로 한국콘텐츠를 접한 일반 관객의 눈에 〈길복순〉은 ‘한국영화’에 기대한 바를 완벽하게 충족시켜준 작품이었다.

 

전원사 제공

아웃포커스라는 도발적 실험
홍상수의 〈물 안에서in water

홍상수 감독은 자신이 직접 연출, 각본, 제작, 촬영, 편집, 음악까지 모두 맡은 스물 아홉 번째 장편 〈물 안에서〉를 선보였다. 보다 신선한 영화를 소개하는 인카운터 섹션에 초청된 〈물 안에서〉는 그중에서도 가장 독특하고 ‘다른’ 영화였다. 몇 년째 경쟁부문의 단골 손님이었던 홍 감독의 신작이 왜 인카운터스로 넘어왔을까 하는 궁금증으로 〈물 안에서〉는 상영 전부터 관심을 모았다. 그리고 61분의 짧은 러닝타임을 주파한 이후, 의아함은 가라앉고 비로소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작품은 연기에 지친 배우가 자신의 창의력을 확인해보고 싶다며 두 친구와 함께 단편영화를 만드는 모습을 담고 있다. 여기서 대부분의 장면은 인상파 걸작들처럼, 물먹은 듯 흐릿하게 초점 잃은 렌즈로 표현된다. 오프닝부터 스크린을 가득 채우는 저화질의 흐릿한 화면은 〈물 안에서〉의 당황스러운 첫 인상이고, 흐릿함의 정도를 조절하며 이어지는 모호한 이야기는 이미 홍상수에 친숙한 베를린 관객들에게도 적잖은 당혹스러움을 안겼다.

영감을 찾아 고뇌하는 주인공의 모습은 영화 제작에 대한 홍상수의 자기반영적인 고민을 심연에 잠긴 듯한 이미지의 연쇄를 통해 전달한다. 홍 감독의 트레이드마크이기도 한 술자리 장면에서는 잠시나마 초점이 또렷해지기도 하지만, 젊은 청춘들의 술에 젖은 대화는 오히려 공허함으로 자리한다. 전작에서 보여준 감정적이고 위트 넘치던 캐릭터들이 이번 작품에서는 한층 옅어진 채로, 모호하면서도 진지한 태도로 이야기는 ‘왜 영화를 만드는 것인가’로 흘러간다. ‘젊은’ 감독들이 으레 그렇듯이.

각본없이 현장에서의 직관적으로 진행되는 홍상수 특유의 미니멀한 작업 방식은 〈물 안에서〉에서도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다. 예쁘지만 또 너무 예쁘지는 않은 적절한 로케이션을 찾아 헤매고, 발견한 로케이션에 적합한 내러티브를 만들어 낸다. 정적인 카메라 사이로 자유로이 프레임을 넘나드는 인물들은 의미로운 것을 포착하기 위해 배회하는 홍상수 자신의 모습일 것이다. 이처럼 투박하면서도 기본에 충실한 홍상수의 작업은 몇 달 전 개봉한 〈아바타: 물의 길〉이 보여준 블록버스터의 맛과 가장 극단에 서 있다. 영화가 기술의 산물임을 비웃기라도 하듯 그의 새로운 실험은 하이테크놀로지와 영화적 예술성이 별개의 영역임을 다시금 선언한다. 특히 이번에 보여준 아웃포커스라는 도발적인 실험은 어쩌면 홍상수 월드가 또다른 차원으로 접어들고 있음을 알리는 듯하기도 하다.

상영 이후 관객과의 만남에서 만난 홍 감독은 선명한 영화는 이제 좀 신물이 나기도 했다고 너스레를 떨며 처음엔 스스로도 이러한 아웃포커스 실험이 터무니 없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하지만 선명하게 할 것인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순간에 아웃포커스에 대한 생각이 사라지지 않았고, 그렇게 나온 영화가 〈물 안에서〉이다. 덕분에 영화에 대한 평가는 극단적으로 갈렸지만 이번에도 홍상수는 새로운 화두를 전 세계에 던졌다.

이외에도 베를린영화제의 공식부문은 아니지만 베를린 비평가주간에 박세영 감독의 〈다섯 번째 흉추〉가 이름을 올렸다. 범위를 조금 더 넓히면 CJ ENM이 공동투자배급으로 참여한 셀린 송 감독의 〈전생Past Lives〉(경쟁부문)과 이주영 배우가 참여한 〈그린 나이트Green Night〉(파노라마), 덴마크로 입양간 한국 아이의 향수를 다룬 멜린 초이의 〈조용한 이주The Quiet Migration〉(파노라마)도 베를린을 찾은 범한국영화라고 할 수 있다. 덕분에 열하루동안의 영화제 기간동안 극장에서 한국어나 한국배우를 마주하는 것은 어색한 일이 아니었다.

주요 부문에 입상하지는 못했지만 여러 섹션에 골고루 이름을 올린 한국영화는 호평 속에서 베를린영화제의 다양성과 예술성에 기여했다. 최근 몇 년이 한국영화가 세계영화사에 비집고 들어가 나름의 입지를 구축하는 시기였다면, 이제 한국영화는 이를 토대로 조금씩 영토를 확장하는 단계에 접어들었다. 제73회 베를린영화제는 유럽영화의 승리로 기록될 테지만, 한국영화가 남긴 진동은 유의미한 성과로 함께 남을 것이다.

 


 

 

* 《쿨투라》 2023년 3월호(통권 105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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