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도시 베를린 즐기기
[베를린] 도시 베를린 즐기기
  • 손정순 발행인
  • 승인 2023.03.02 10: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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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3회 베를린영화제 스케치

독일에는 여행보다는 출장 가는 일이 많았다. 해마다 2월이면 베를린국제영화제가 열리고, 10월에는 세계 최대 도서전인 프랑크푸르트도서박람회가 개최되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크고 작은 문화행사들이 매월 독일 곳곳에서 펼쳐지다 보니 출장 횟수도 많았다. 그중에서도 베를린은 내가 가장 자주 찾은 곳이다. 팬데믹으로 한동안 영화제에 참석하지 못하다가 3년 만에 다시 베를린을 찾게 되었다.

이번에는 일정상 프랑크푸르트행 비행기를 택했다. 16일 이른 아침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예약한 렌터카를 타고 베를린으로 달렸다. 프랑크푸르트박람회와 칸영화제를 비롯해 여러 전시·행사들을 기획하며, 유럽에서 렌터카를 이용한 경우는 많았지만 이렇게 프랑크푸르트에서 베를린까지 아우토반을 달릴 상상은 하지 못했다. 그러나 운전석에 앉자마자 며칠 앓던 두통도 가라앉고 마음이 편안해졌다. ‘나는 전생에 택시드라이버였나!’ 하는 생각이 순간 지나갔다.

 

프랑크푸르트에서 베를린 가는 길

소도시 바트헤르스펠트에서 브런치를

프랑크푸르트에서 베를린까지의 거리는 약 550km다. 이른 아침 희뿌연 안개 속으로 한 1시간 40분쯤 달렸을까? 차창을 뒤덮던 안개의 장막도 걷히고 하늘이 맑아졌다. 잠시 쉬어가기 위해 소도시로 들어섰다. 비행기와 기차와 대중교통이 해결할 수 없는 자동차 여행만의 특권이다.

고속도로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마트 레베에 들어섰다. 물과 음료를 사고 브런치 겸 갓구운 크루아상과 커피를 주문했다. 북적이지 않는 독일의 이름 모를소도시에서 맞이한 아침이다. 이런 작은 낭만과 여유가 너무나 행복하다.

브런치를 먹으며, 지도를 확인하니 이곳은 독일 헤센주 헤르스펠트로텐부르크지구에 속한 바트헤르스펠트Bad Hersfeld라는 도시였다. 대표 건축물로는 1371년 지어진 시청 건물과 도시교회가 있으며, 6.5ha 면적의 온천공원과 구도심 바로 옆의 레오나르트뮐러안라게 공원 등 규모가 큰 공원도 있다고 한다. 매년 7월 말과 8월 초 사이에 열리는 유럽 최대 규모의 ‘헤센의 날(헤센탁) 페스티벌’로도 유명한 곳이라고 한다.

작은 행복을 충전하고 자동차는 다시 베를린을 향해 달렸다. 양쪽으로 쭉쭉 뻗은 아름드리 나무숲 도로를 통과하며 4시간 정도 더 달렸을까? 베를린 도로 표지판과 함께 브란덴부르크문이 보였다. 그리고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설립한 67m의 높이의 전승 기념탑이 나타났다. 기념탑 위에 있는 황금빛 빅토리아 여신상을 대면하자 드디어 베를린에 도착한 것이 실감났다.

베를린영화제가 열리는 포츠담광장과 프레스 배지 받기

포츠담에 있는 호텔에서 체크인을 하고 간단한 소지품만 챙겨서 베를린영화제가 개최되는 포츠담광장Potsdamer Platz으로 향했다. 영화제의 메인 극장인 베를리날레 팔라스트Berlinale Palast에는 개막식을 보기 위한 인파들이 몰려들었다.

베를리날레 서비스센터로 들어서자 전 세계의 영화인들이 배지를 받기 위해 긴 줄을 서 있었다. 다행히 프레스 줄은 길지 않아 빠르게 배지를 발급받고, 게스트에게 주는 굿즈를 챙겼다. 옆으로 매는 빨간색 작은 어깨 가방이었다. 

제73회 베를린영화제 개막식과 개막작

베를린영화제 개막식 행사와 개막작을 보기위해 포츠담 광장에서 버스를 타고 베를린영화제 최대 규모 관인베르티 뮤직홀Verti Music Hall로 향했다. 베르티 뮤직홀옆에는 베를린의 랜드마크 중 하나인 메르세데스-벤츠 아레나Mercedes-Benz Arena가 있다. 중요 스포츠경기 또는 e스포츠가 열리는 공간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BTS가 독일 베를린에서 공연한 장소로 유명하다. 엊그제 2월 14일(현지시간)부터 15일까지 양일간 에이티즈도 독일 베를린 공연을 성황리에 마쳤다고 한다.

베르티 뮤직홀은 영화 상영이 가능하도록 최근에 리모델링했고, 이번 개막작이 베르티 뮤직홀에서 상영되는 첫 영화이다. 프레스와 일반 관객은 이곳에서 개막식을 스크린으로 보고, 개막작까지 관람할 수 있다. 세계에서 모여든 영화인들과 관람객들이 객석을 가득 메웠다. 축제의 분위기가 물씬 느껴졌다.

제73회 베를린영화제 개막식에는 영화제 집행위원장 마리에테 리센벡을 비롯하여 독일 가수 레슬리 클리오, 이본 캐터펠트, 독일 여배우 릴리 크루그, 영국 무용수 겸 배우 니케아타 톰슨, 아일린 테젤 등과 개막작인 레베카 밀러 감독의 〈쉬 케임 투 미She Came to Me〉의 주연 배우 앤 해서웨이와 피터 딘클리지 등이 참석했다. 사회자와 함께한 심사위원진도 무대에 올랐다.

개막식에서는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실시간 화상연설을 통해 “예술이 정치에서 떨어져 있을 수 있겠냐”고 반문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예술과 정치의 관계가 극도로 중요해진 시점이라며 영화에는 실제이건 이념적이건 장벽을 극복할 힘이 있다는 견해를 밝혔다. 그는 “예술이 (그 자체로) 세상을 바꿀 수는 없지만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그들에게 영감을 준다”고 강조했다.

영화제에 참석한 일부 영화인들은 젤렌스키 대통령에게 공개적으로 지지를 밝혔다. 미국 영화배우 션 펜이 젤렌스키 대통령을 소개하면서 화상연설로 이끌자 청중들은 기립박수를 보냈다. 펜은 코미디언, 대통령, 전쟁 지도자로 이어지는 젤렌스키 대통령의 변신을 다룬 영화 〈슈퍼파워Superpower〉로 베를린을 찾았다. 

카를로 샤트리안 베를린영화제 집행위원장은 “고통받는 우크라이나 국민, 우크라이나를 떠난 수백만 피란민, 나라를 지키려고 남아 계속 전쟁을 영화에 담는 예술가들에게 경의를 표한다”고 말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이날 영국 BBC와 한 인터뷰에서 굳은 항전 의지를 재차 강조했다.

한편 기후운동단체 ‘마지막 세대Letzte Generation’ 소속 기후활동가 2명이 바리케이드를 넘어 레드카펫에 초강력 접착제로 손을 붙여 시위를 감행하는 일도 벌어졌다. 반짝이는 로브 한가운데 “마지막 세대”라는 문구가 새겨진 단순한 티셔츠를 입고 현 정부, 현 사회가 기후위기를 막을 기회가 남은 마지막 세대임을 밝혔다.

올해의 개막작은 스페셜 갈라 부문에 초청된 레베카 밀러의 〈쉬 케임 투 미〉이다. 피터 딘클리지와 앤 해서웨이가 주연을 맡은 로맨틱 코미디는 두 명배우의 연기를 보는 것만으로도 흥미로웠다. 개막작을 관람하고 밖으로 나와 베를린자유대학에 연구교수로 와있는 이향진 교수를 만났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간단히 요기를 하며, 맥주를 마셨다. 시원하게 넘어가는 독일맥주와 함께 베를린영화제의 밤도 무르익어갔다. 

베를린영화제 두 배 즐기기

제73회 베를린영화제에는 장편과 단편, 다큐멘터리 등 모든 장르를 아우르는 400여 편의 작품을 선보였다. 이 모든 영화를 죄다 볼 수는 없는 법, 그렇다면 후회하지 않도록 선택과 집중을 잘해야 한다. 나는 경쟁작과 한국영화들을 우선적으로 예약하고, 남은 시간에는 화제작과 한국에서 보기 힘든 실험적인 작품들을 선별하여 보기로 했다.

이번 베를린영화제에도 작년의 칸영화제처럼 온라인예약제가 실시되었다. 아침부터 긴 줄을 서서 표를 예매하는 수고로움을 덜 수 있으니 베를린의 시스템도 시대에 맞게 진일보했다고 할 수 있다. 대환영이다. 그렇다고 완전히 자유로워진 것은 아니다. 아침 7시부터 사전 티켓예매를 시작하니 매일 아침 다다음 날 표를 예약하기 위해 전쟁을 치러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영화제 개막 다음날부터 하루 평균 5편의 영화를 관람했다. 보통 오전에 두 편 영화를 보고 간단히 점심을 먹고, 오후에 두 편을 보고, 저녁 식사 후 영화를 보거나, 또는 영화관람 후에 늦은 저녁을 먹었다. 영화를 보면서 다음 예약시간까지의 시간이 빌 때면 제일 먼저 프레스센터에 들러 영화제 데일리 《스크린 인터내셔널》과 《버라이어티》 등을 챙겼다. 그리고 기자회견이나 공식 일정들을 체크했다. 공식 프레스센터는 그랜드 하얏트 2층에 마련되어 있어서 원고를 쓰면서 커피와 생수를 무료로 마실 수 있다. 메인극장인 베를리날레 팔라스트에도 프레스들을 위한 별도의 공간이 마련되어 데일리도 챙겨보면서 작업을 할 수 있었다. 영화관을 오가면서 간혹 아는 이들과 부딪힐 때면 묘한 동질감을 느끼기도 했다. 영화관에서 가장 많이 마주친 분 중 한 분이 김동호 이사장님이신데 이사장님을 만나면 깊은 존경심에 고개가 숙여졌다. 이사장님은 노구에도 누구보다 열심히 영화를 관람하고 미팅을 하고, 다큐 촬영에 응하며 일정을 소화하셨다.

식사 시간에는 시간이 맞는 이들과 연락하여 함께 식사를 하며 관람한 영화와 앞으로 볼 화제작에 대한 이야기를 서로 나눴다. 영화이야기를 하며 식사하는 이 시간들이 참으로 귀하고 즐거웠다. 특히 이탈리안 레스토랑 에센자에서 김동호 이사장님과 전혜정 런던동아시아영화제 집행위원장, 이향진 교수, 하은선 미주한국일보 기자와 함께 나눈 저녁은 베를린영화제의 문화살롱 같은 분위기를 연출했다.

베를린 한국영화의 밤

19일 밤 8시(현지 시각)에는 영화진흥위원와 제73회 베를린영화제 및 2023 베를린 유러피안필름마켓EFM이 2년 만에 개최한 ‘베를린 한국영화의 밤’이 개최되었다.

박기용 영진위 위원장은 “코로나 팬데믹 이후 3년만에 다시 베를린에서 K-Movie를 보게 되어 감회가 새롭다. 힘든 시간을 거치며 새로운 도약을 거듭해온 K-Movie가 앞으로 더욱 많은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한류의 중심으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많은 응원과 지지를 부탁드린다”고 인사했다.

주독일한국문화원에서 열린 이날 자리에는 〈더 섀도 우리스 타워〉의 장률 감독, 〈길복순〉의 변성현 감독과 전도연, 김시아 배우, 〈전생〉의 셀린 송 감독과 유태오배우, 〈우리와 상관없이〉의 유형준 감독과 조현진, 조소연. 곽민규 배우를 비롯해 베를린 비평가주간에 초청된 〈다섯 번째 흉추〉의 박세영 감독이 함께했다. 홍상수 감독은 29번째 장편영화 〈물 안에서〉로 베를린국제영화제에 4년 연속 참석했지만 한국영화의 밤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외에도 김홍균 주독일대사와, 김동호 전 부산영화제 이사장을 비롯하여 베를린영화제의 카를로 샤트리안 집행위원장과 마크 페란슨 수석프로그래머, 토론토국제영화제의 아니타 리 수석프로그래머와 베니스영화제의 엘레나 폴라키 프로그래머, 일본 이미지포럼의 카츠에 토미야마 대표, 허문영 부산영화제집행위원장과 정준호 전주영화제집행위원장, 텔레필름 캐나다, 몽골영화진흥위원회, 필리핀영화진흥위원회 관계자 등 국내외 영화인 400여 명이 모여 K-Movie와 K-Food를 즐겼다.

영진위는 26일까지 열리는 베를린영화제에서 종합 홍보관을 운영하며 한국영화 수출업체의 회의 공간을 지원하고, 한국영화 초청작 및 한국 참가사의 신작 라인업 홍보 활동을 병행하였다. 올해도 새로운 실험성과 장르를 개척해나가고 있는 한국영화는 세계인들에게 호평받았지만 아쉽게도 수상은 하지 못했다. 우수한 콘텐츠로 세계인의 마음을 사로잡는 한국영화의 수상을 내년에는 꼭 기대해 본다. 

베를린 도시를 거닐며 문화예술 즐기기

영화제에 오면 가능한 영화를 많이 보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고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그래서 지난 칸영화제에서도 50여 편의 영화를 봤다. 하지만 영화만 본 것은 아니었다. 기획취재 설문을 돌리며 사람들과 만났고, 칸에서 가까운 니스 해변도 거닐고 샤갈미술관도, 앙티브의 피카소 미술관도 다녀왔다 .

세계 최대의 박물관 도시 베를린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일하듯 영화만 보고 가는 것은 조금 아쉽지 않은가. 며칠 오후는 영화를 보지 않고 박물관 섬의 미술관들을 관람하고, 슈프레강이 흐르는 주변을 거닐었다. 대신 그 날 저녁에는 두 편의 영화를 관람했다. 그리고 또 하루의 오후와 저녁은 세계적인 무용올림픽인 탄츠올림프를 관람하고, 또 하루 저녁은 영화관람 후 늦은 음악공연을 즐기기도 했다.

더불어 포츠담광장 근처에 자리한 쿨투어포룸Kulturforum을 산책하듯 거닐며 마음 내키는대로 들어가 관람하기도 했다. 이처럼 베를린은 문화예술을 탐닉하고 즐기기에 더없이 좋은 도시이다. 베를린에 온다면 도시를 천천히 거닐며 즐겨보자. 

 

 


 

 

* 《쿨투라》 2023년 3월호(통권 105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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