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 탐방] 예술, 그 위대한 유산: 영암군립하정웅미술관 & 해외 거장들
[미술관 탐방] 예술, 그 위대한 유산: 영암군립하정웅미술관 & 해외 거장들
  • 김명해(화가, 본지 객원기자)
  • 승인 2023.03.06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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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정웅 〈고향의 사계(봄)〉 2014년 161.3×193.7cm 캔버스에 유채

전남 영암 월출산 자락 구림마을은 2,200년의 역사를 가진 마을이자 5세기 초 일본에 한자와 유학을 전한 왕인박사와 신라 말의 승려이자 우리나라 풍수지리의 시조인 도선국사(827-898)가 태어난 곳이다. 마을에는 왕인박사유적지와 도선국사가 창건한 통일신라시대 사찰 도갑사뿐만 아니라 신라말 대량의 도자기를 생산했던 도요지와 도기박물관, 450여 년 전통의 호남의 대표적인 동계洞契 조직인 구림대동계1와 마을 대소사와 내빈 영접장소인 회사정, 15세기 건립한 죽정서원과 간죽정, 도선국사 탄생설화 바위인 국사암 등 다양한 문화유산이 밀집해 있다.

 

이러한 문화유산 외에도 전통기와집과 한옥체험관, 잘 꾸며진 상대포역사공원과 정겨운 흙담길 등 구림마을은 자연과 함께 역사와 전통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영암의 문화유산 중 약 40%가 자리하고있는 이곳 전통마을에 새로이 둥지를 튼 미술관이 있어 방문해 본다.

필자가 탐방한 날 호남지역은 다가오는 봄을 시샘하듯 눈이 많이 쌓여 있었다. 겨울에도 눈 구경하기 힘든 동네에 사는 사람으로서 뜻밖의 눈 풍경은 감탄사 연발과 ‘신남’ 그 자체이다. 병풍처럼 펼쳐져 있는 월출산 설경은 그야말로 장관이고, 눈 덮인 구림마을은 70-80년대 신년 연하장에 등장하는 시골동네마냥 고즈넉하고 한산하다.

 

이호신 〈영암 월출산 구림마을〉 2002년 172x272cm 종이에 수묵담채

발자국 흔적 없는 하얀 눈을 밟으며 도착한 이곳은 영암군립하정웅미술관이다. 하정웅(1939- ) 선생은 재일교포 출신의 사업가로 그가 평생 수집한 미술품을 우리나라 국공립미술관·박물관 및 대학 그리고 일본의 미술관 등에 기증함으로써 미술관 인프라 구축에 공헌한 컬렉터이다.

영암에 들어선 이 미술관은 그림, 조각, 판화, 공예, 사진, 도자 등 그가 수집한 미술품 3,801여 점을 영암군에 기증하고, 군에 의해 건립하여 2012년에 개관한 제1종 공립미술관이다. 미술관 건축은 ㄱ자형의 한옥단층에 중앙이 2층으로 올려 진 건물로 웅장하지 않고 소박하다. 전시실은 내부의 상설전시실과 기획전시실, 외부의 조각공원으로 꾸며진 야외전시실과 미술관 맞은편에 작년(2022)에 지어 개관한 창작교육관 내 전시실이 있다.

미술관 입구에 들어서니, 해설사 어르신이 반가이 맞아주시면서 구림마을과 하정웅 선생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셨다. 마을 명칭인 구림鳩林은 도선국사 탄생설화에서 비롯되어 ‘비둘기 숲’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마을초입 예쁜 연못이 자리한 상대정上臺亭은 예전에 상대포구 자리로 이곳까지 배가 들어왔다고 한다. 백제 왕인박사가 이곳에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갔으며, 중국·일본 무역상들이 드나들던 유명한 포구였는데 광복 직전에 간척지 개간으로 물길을 막는 바람에 지금은 예전의 모습을 볼 수 없다고 한다. 미술관 로비에 걸려있는 이호신(1957- ) 화가가 그린 〈영암 월출산 구림마을〉(2002)를 보니, 마을 전경이 한눈에 보이고 그림을 통해 구림마을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할 수 있었다.

 

전시실 내부전경 ⓒ김명해

하정웅 선생은 일본 히가시오사카 출생으로 아키타현 다자와코에서 성장기를 보냈으며, 영암은 그의 부모님 고향이다. 1973년 부모와 함께 처음 고향을 방문하면서 자신의 뿌리인 영암이 한·일 문화교류의 장이 될 수 있도록 평생을 모아온 미술품을 기증하고 특히 호남지역의 문화예술 지원활동을 많이 하셨다고 한다.

현재 미술관 상설전시실에는 하정웅컬렉션 기증의 미학 두 번째 전시로 《현대미술의 거장》전이 진행 중이다. 수집한 미술품 중 해외작가들의 작품들로 구성된 이 전시는 호안미로, 마리 로랑생, 마르크 샤갈, 조르주 루오, 벤 샨, 살바도르 달리, 헨리 무어, 다나카 아츠코, 무나카타 시코, 쿠사마 야요이, 세키네 노부오 등 세계적인 거장들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미술관 관계자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미술에 대해 생각해보는 자리로 꾸몄으며, 작가들은 다양한 방법과 감각을 통해 현대인들과 대화를 시도하고 있다. 열린 마음으로 작가의 생각을 이해하고 작품에 흥미를 가질 때, 현대미술은 더 이상 어려운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을 다양한 방식으로 이야기하고 있음을 알리고 싶어서 이 전시를 기획하게 되었다”고 한다.

천고가 높은 전시실 내부를 시야에 담고, 제일 먼저 접한 작품은 스페인 초현실주의 화가 호안 미로Joan Miró(1890-1983)의 두 작품이다. 호안 미로는 자유분방한 색과 선으로 추상적인 환상의 세계를 표현하는 화가이다. 〈SERIEⅢ〉(1952)는 우주에서 헤엄치는 고양이 마냥 선은 규칙적이지 않고 밤하늘 색은 어둡지만 동화적이고, 〈Untitled〉(2013)도 알파벳형상의 그림문자들이 보는 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면서 유쾌하다.

 

마리 로랑생 〈여인〉 1940년대 34x26cm 캔버스에 유채

마리 로랑생Marie Laurencin(1883-1956)의 인물작품은 너무나 반갑다. 마리 로랑생은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을 부드러운 담색조의 색채를 사용하여 신비롭고 환상적으로 표현하는 프랑스 여류화가로, 작품 〈Woman〉(1940)은 여성 특유의 감미로움이 묻어난다. 그녀는 시 「미라보 다리」로 유명한 프랑스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1880-1918)의 연인이자 뮤즈로 잘 알려져 있다.

주변 사람들의 생활모습과 서정적 풍경을 야수파적 색채로 몽환적으로 표현한 마르크 샤걀Marc Chagall(1887-1985)의 판화작품도 전시되어 있다. 샤갈은 벨라루스 태생의 러시아계 유대인 혈통의 프랑스 화가였기에 벨라루스·러시아·프랑스 3국에서 위인으로 환대받는 화가이다. 꽃과 여인이 등장하는 〈연인들의 꽃다발〉(1976)에서 볼 수 있듯이 가는 선으로 스케치하듯 자유롭게 그린 작품은 따뜻하면서도 포근하다. 말년에는 회화보다 성경의 내용을 새긴 판화 작업을 많이 하였는데, 이곳에서 그의 판화작품 〈루반족〉(1964)을 만날 수 있다.

 

호안 미로 시리즈3 〈SERIE III〉 1952년 33.5×38.5cm 판화

프랑스 출신의 종교 화가이자 판화가인 조르주 루오Georges Henri Rouault(1871-1958)의 판화도 14점 전시되어 있다. 그의 작품은 초기에는 익살꾼, 창부, 부자와 빈자, 선과 악을 주제로 절망과 분노를 굵고 강한 터치와 강렬한 푸른 색조의 과슈로 많이 표현하였으나 후기에는 경건하고 겸허한 종교적 심성에서 우러나오는 감성을 성스러운 환희로 작품을 승화시켰다. 현재 이곳에 전시되어 있는 루오의 판화는 1979년 작으로, 사망 후에 제작된 판화로 보인다.

리투아니아 출신의 미국화가 벤 샨Ben Shahn(1898-1969)은 사회 저항적 성격을 띤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대표화가로, 도시 빈민과 억눌린 삶의 고통과 슬픔을 간직한 인간상의 내면을 고대 문자나 가면, 동물 등으로 상징화하여 보여주는 작가이다. 이곳 전시실에는 독일시인 릴케Rainer Maria Rilke(1875-1926)의 대표소설 『말테의 수기』을 읽고 그 내용을 그린 판화연작을 선보이고 있다. 젊은 시인 말테가 파리에서 죽음과 불안에 떠는 영락한 생활을 영위하면서 쓴 수기 형태의 소설 내용을 벤 샨만의 스타일로 표현하여 우울하고 어두운 분위기로 표현되었지만 작품 속에 화가의 인간적인 따뜻한 마음이 느껴진다.

 

마르크 샤갈 〈연인들의 꽃다발〉 1976년 64x48cm 판화지에 석판

무의식 속의 꿈이나 환상의 세계를 표현하는 스페인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í(1904-1989)의 동판화 〈히피The Hippies〉 연작도 있다. 이 연작은 1969년 달리의 친구 피에르 아질레Pierre Argillet가 인도 여행에서 찍은 사진을 보고 영감을 얻어 제작한 작품으로 엉뚱한 공상가 달리가 인도를 어떻게 표현했는지 그의 관심사를 엿볼 수 있으며 비합리적인 환각을 객관적·사실적으로 표현하는 그의 초현실주의적 특징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헨리 무어Henry Moore(1898-1986)의 추상 판화작품 〈나무5 뻗어있는 나뭇가지들〉(1979)도 있다. 헨리 무어는 20세기 영국의 조각가로, 자연물 같은 재료의 성질을 존중하면서 유기적이고 단순한 원초적 형체의 인체상과 언덕이나 동굴의 풍경을 닮은 작품을 제작함으로써 대상의 내적 생명력이 넘치는 이미지를 조각한 전위 예술가이다.

 

일본 현대미술가의 작품들도 있다. 고전적 소재로 리듬감 있고 에너지 가득한 그림을 완성한 무나카타 시코Munakata Shiko(1903-1975)의 작품 〈무용의 신〉, 전구와 전선으로부터 영감을 받고 강렬한 원색의 추상으로 표현하는 다나카 아츠코Tanaka Atsuko(1932-2005)의 작품〈78C-81〉, 우리나라에서 더 유명한 미술가 쿠사마 야요이Kusama Yayoi(1929- )의 동판화 〈자화상〉, ‘물질이 지니는 순수한 속성’으로 모노하mono-ha2의 시초를 만든 세키네 노부오Sekine Nobuo(1942-2019)의 작품도 전시되어 있다. 세계 유명 거장들의 작품을 이곳 영암에서 보게 되다니 감회가 새롭다.

하정웅미술관은 이곳 외에도 광주광역시에 광주시립미술관 분관 하정웅미술관3이 있으며, 하정웅컬렉션 작품은 부산시립미술관, 대전시립미술관, 포항시립미술관, 전북도립미술관, 국립고궁박물관, 조선대학교미술관, 숙명여자대학교 등에 만 여점의 미술작품과 희귀자료가 있다고 한다.

하정웅컬렉션은 개인소장가가 수집한 컬렉션으로서는 세계적으로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양적, 질적인 면에서 뛰어나다. 특히 주목할 점은 일반적인 컬렉션과는 달리 단순한 미적 취향이나 인맥에 의한 수집이 아니라 특정한 수집 방향을 가지고 컬렉션 고유의 성격을 형성해 냈다는 점이다. 하정웅 컬렉션이 사회적·정치적으로 불우하고 소외된 사람들이나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억울하게 희생된 사람들을 애도하는 기도의 의미를 지닌 미술품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는 점은 여타 컬렉션과 차별되는 특징이다. 또한 외국작가나 한국작가의 작품들 역시 억압적 현실에 대한 고발이나 항거, 자유와 평등에 대한 갈망과 더불어 그러한 좌절과 갈등상황을 극복하고자 하는 희망의 메시지를 내포하고 있다는 특징도 있다4.

 

살바도르 달리 〈히피시리즈 놀란 소〉 1969-70 54x38cm 종이에 에칭(드라이 포인트)

미술관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벽과 사무실에 하정웅 선생이 그린 작품이 5-6점 있다. 그림에 등장하는 새와 꽃, 산, 태양과 달이 전반적으로 밝은 색으로 표현되어 평화로운 호남의 사계가 마음으로 느껴진다. 해설사 어르신 말씀에 의하면 “선생은 지금 일본 본가에 계시는데 병세가 깊어 영암에 오시기 힘드시다”고 한다. 통유리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눈부시고 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눈과 구림마을 풍경이 하정웅선생의 그림처럼 평화롭고 따스해 보인다. 쉽게 접하기 힘든 위대한 유산을 서울도 아닌 지방의 미술관에서 많은 사람들이 관람 할 수 있도록 남겨주심에 감사하며 행복하다. 하정웅 선생님의 빠른 쾌차를 기원합니다.

 

 


1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98호. 1565년(명종 20년)에 조직한 마을동계로, 구림마을에 존재해왔던 재지사족(在地士族)들이 결속하여 향촌사회를 안정시키고 향촌민을 통제, 향약정신 구현을 목적으로 만들어짐. 임진왜란 때 잠시 중단되었다가 17세기 초 재중수를 거쳐 현재까지 계승 운영되고 있는 우리나라 대표적인 전통문화유산으로, 조선 후기 동계의 특징을 엿볼 수 있음. [네이버 지식백과] 영암 구림대동계 문서
2 1960~70년대 이우환 작가가 주도한 일본에서 발생한 현대 미술 운동. 모노(もの, 物) 즉 물체의 있는 그대로의 상태를 제시해 물질의 존재, 인식, 주변과의 관계성 등에 주목함.
3  옛 전남도지사공관 건물로 2017년 3월 하정웅미술관으로 재개관 (광주광역시 서구 상무대로 1165)
4  『광주시립미술관 분관 하정웅미술관』, 「하정웅컬렉션의 성격과 의미」 중에서 인용.


참고자료

영암군립하정웅미술관 https://www.yeongam.go.kr/home/haart
광주시립미술관 하정웅미술관 https://artmuse.gwangju.go.kr/?site=hajungwoong

 

 

* 《쿨투라》 2023년 3월호(통권 105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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