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시집 속의 詩] 유종 시인의 「집」
[새 시집 속의 詩] 유종 시인의 「집」
  • 유종(시인)
  • 승인 2023.03.06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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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종

 

늙은 여자가 바람벽을 붙잡고
오래된 슬픔 새기는 중입니다
바람의 귀가 열릴 때까지
머리로 벽을 쿵쿵 두드리는 중입니다
달이 차오르면 자식들 눈동자가
우물처럼 깊어지던 때를
여섯 개의 눈 위에 흙 뿌리던 날을

나무 기둥에 살이 올랐던 날들과
휘청이며 밭고랑 세던 날들을
귓속에 부리는 중입니다

그녀는 밭 한가운데 허가받지 않은
집 한 채 짓고 살았습니다
하루 이틀 삶 세 내가며
때로는 내일을 미리 당겨 써가며
바람벽을 붙잡고 있었습니다
해가 들었다 지고
달이 들었다 졌습니다
소쩍새 울음소리가
여러 날 부뚜막에 앉았다가
그녀의 어머니에게 쫓겨 가기도 했습니다

늙은 여자가 바람의 귀를 열고 있습니다
그동안 허가받지 않은 슬픔이었더라도
용서하시라고
어느 날 곡진한 이별을 고할 때
꼭 한번 들리겠노라고

 

- 유종 시집 『푸른 독을 품는 시간』(b) 중에서

 


유종 시인은 1983년 전남 해남 출생, 2005년 광주전남 《작가》 신인 추천 및 《시평》 여름호를 통해 작품 활동 시작. 시집으로 『푸른 독을 품는 시간』이 있다.

 

 

 

* 《쿨투라》 2023년 3월호(통권 105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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