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이유가 있는 문학제
[에세이] 이유가 있는 문학제
  • 유금란(시인)
  • 승인 2023.03.06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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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제였다. ‘제5회 창작아카데미’라는 타이틀을 붙였지만, ‘시드니한국문학작가회’에서 마련한 문학 강좌는 축제나 다를 바 없었다. 행사가 진행되는 열흘 내내 기온이 30도를 웃돌았다. 간간이 퍼부은 소나기가 열기를 잡아주곤 했지만, 시드니에서 한국문학을 하는 25명 문학도와 두 분 강사가 머문 곳의 열기는 식을 줄 몰랐다. 이민의 삶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은 사람들의 목마름이 만들어낸 문학제, 열정도 실력이라면 시드니 수강생 모두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실력자들이었다.

호주는 남한의 77배가 되는 면적을 가진 나라로, 그 자체로 하나의 섬이자 대륙이다. 그 대륙의 오른쪽 중간쯤에 자리한 해안 도시가 시드니다. 나는 ‘시드니’를 발음할 때마다 마치 내 입에서 ‘시’가 튀어나오는 느낌을 받곤 한다. 누군가는 ‘시가 든 이’를 ‘시 든 이’라고 부른다 했다. 이처럼 시적인 도시 시드니에서 내가 영어가 아닌, 모국어로 글을 쓰는 이유는 분명하다. 모국어는 ‘나’이자 ‘나의 정체성’이자 ‘나의 뿌리’이니까.

이 도시도 삶의 현장으로 한걸음 들어가 보면 비자 문제를 비롯해 하루하루를 노동으로 메워야만 하는 숨통 조이는 지점들이 없지 않다. 하지만 적어도 햇살과 유칼립투스만큼은 제 빛과 제 향을 멈춘 적이 없다. 숨쉬는 존재로서의 모국어처럼 말이다.

 

거슬러보면 모국어로 글을 쓰면서 문학 언저리를 맴돈 지 20여 년, 모국어는 나를 규정짓는 도구로써 언어 이상의 의미를 지녀왔다. 어떤 때에는 의욕을 앞세워 집착했고, 어떤 때에는 내면의 욕망을 드러내는 방편이기도 했다. 지금도 여전히 희로애락을 함께하면서 내 삶의 근원이 되어준다.

언제부터인가 내가 쓰고 있는 글이 ‘디아스포라문학’, ‘해외문학’이라는 범주에 속해 있었다. 바다 건너에서 모국의 언어와 문화를 지켜가는 소수에게 붙여준 나름 고국 문단의 배려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것은 ‘다름’을 규정짓는 잣대이기도 했다. 한국 대중매체를 실시간으로 공유하면서 트롯을 듣고, K-드라마를 보고, 김치볶음밥을 만들어 먹는다지만 우리에겐 분명히 ‘다름’이 있었다. 그 어쩔 수 없이 ‘다른 지점들’, 계절, 차선, 시간, 심지어는 변기통 물 돌아가는 방향까지도 모국과 반대인 곳이 내가 서 있는 문화적 배경이었다.

몇 년 사이, 모국과의 소통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빨라졌다. 우리끼리 쓰고, 우리끼리 읽고, 우리끼리 나눌때는 몰랐던 ‘문학적 필요’가 생겨났다. 필요는 절실함으로 이어졌고 자연스레 ‘시드니한국문학작가협회’를 조직하게 되었다. 그리고 5회에 걸쳐 문학 강좌를 열고, 종합 문예지 《문학과 시드니》를 2호까지 발간했다. 배후에 금전적 후원을 아끼지 않는 10명의 후원회원이 있으니, 이들이 이 축제의 출발점이 되어준 것이다. 이것은 또한 문학적 필요의 초석을 놓아주고 4년간 이끌어준 단국대 박덕규 교수와 중앙대 이승하 교수의 변함없는 관심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쯤에서 ‘이유가 있는 문학 축제’에 대해 설명을 해야겠다. ‘이유’는 ‘제5회 창작아카데미’의 강사로 초빙된 ‘이재무 시인’과 ‘유성호 교수’를 한데 묶어 지칭하는 말이다. 누구라고 말할 것 없이 ‘이유’는 스스로 언어 전이를 일으켜 우리에게 ‘이유 있는 문학강연’과 ‘이유 있는 문학기행’을 선사했다.

3년 전, 새로운 강좌를 계획하고 두 분을 추천받아 행사를 진행하던 중에 팬데믹이 들이닥쳤다. 기약 없이 미루어지던 행사가 팬데믹 방어벽이 무너진 후 1년 만에 다시 성사된 것이었다. 두 분 강사는 지극히 인간적이면서 노련했다. 시와 평론이라는 장르에서 모국 문단 중앙에 우뚝 서 있는 두 분은 우리의 눈높이에 맞추어 그들만의 색깔을 한껏 뿜어냈다. 얼마나, 어떻게, 무엇을 느낄 것인가는 우리 각자가 챙겨야 할 몫이었다.

피크닉을 겸한 종강 파티에 이어 후원회원들과 함께하는 ‘이유가 있는 문학기행’이 시작되었다. 강의실을 벗어난 ‘이유’와 ‘우리’는 강사와 수강생이 아닌, 동지가 되어 헨리 로슨의 고향 머지Mudgee를 향해 달렸다. 목장을 지나고, 포도원을 지나고, 호수를 지나면서 각자의 가슴에 품고 있던 ‘헨리 로슨’을 호출해냈다. 헨리 로슨이 10불짜리 지폐에까지 등장했던 호주의 대표적인민중 시인이며, 여덟 명의 여성을 조력자로 둘 정도로 인기 있는 작가였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우리에게는 우리만의 ‘헨리 로슨’이 있었고, 문학으로 풀어내야 할 우리만의 ‘불’과 ‘꿈’이 있을 뿐이었다.

 

떼창으로 7080세대를 불러내면서, 와이너리에서 포도주를 음미하면서, 캥거루가 뛰노는 새벽 공기를 가르면서, 별을 헤아리는 마음으로 머지의 밤하늘을 바라보면서, 구름 사이에 걸려 있던 반달이 시드니에서 보던 보름달보다 더 환한 이유를 체득하면서, 이것은 ‘따로 또 같이’ 가야만 하는, 모국을 향한, 우리의 문학이라고 기록했다.

이민 역사 20년차면 익숙해질 만도 한데 공항에서의 배웅에는 여전히 남겨진 사람들이 치러야 할 감정의 몫이 있다. 우리는 ‘이유’가 마지막 모퉁이에서 꺾어져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았다. 그리고 누군가 말했다. ‘이’는 한 번쯤 돌아볼 것이고, ‘유’는 그냥 들어갈 것이라고. 예상은 적중했다. ‘이’는 한 번이 아니라 두번 뒤돌아보았고, ‘유’는 자신의 뒷모습을 끝까지 지켰다. 다시 누군가 말했다. ‘이’는 정이 많은 사람이라 뒤를 돌아본 것이고, ‘유’는 바로 통과해야 할 앞일을 생각하느라 뒤돌아보지 못한 것이라고.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사실은 ‘이’가 순간에 충실한 것이고, ‘유’는 뒤를 돌아다볼 자신이 없어 앞만 본 것이라고.

 

어떻든 상관없다. 휙 하고 지나는 바람일지 모르나 ‘이유’는 이제 시드니 문우들과 한 공동체가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일정 내내 ‘시절 인연’이 화두였으니 그 어디쯤에서 인연이 다한다 해도 ‘이유와 함께한 시간’은 부풀어지고 각색되어 관계의 재창출로 이어져갈 것이다. 이것이 ‘이유가 있는 문학 축제’의 피날레다.

모국에 봄바람이 분다고 한다. 시드니에도 곧 가을 바람이 들이닥칠 터이다. 그리움은 이제 더 이상 우리의 몫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유금란 호주 시드니에 거주하면서 수필과 시를 쓰고있다. 산문집으로 『시드니에 바람을 걸다』, 해외 5인 공저 『바다 건너 당신』이 있다. 재외동포문학상, 해외동주 신인상 수상. 《문학과 시드니》 편집주간.

 

 

* 《쿨투라》 2023년 3월호(통권 105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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