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월평] 소리 없이 강하다: 〈일타스캔들〉, 〈대행사〉
[드라마 월평] 소리 없이 강하다: 〈일타스캔들〉, 〈대행사〉
  • 김민정(드라마평론가, 중앙대 교수)
  • 승인 2023.03.06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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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드라마 이야기가 나올 때 꼭 따라오는 것이 있다. 바로 제작비다. 글로벌 OTT의 등장 이후 조금 신경 써서 만들었구나 싶으면 드라마 제작비가 백억을 훌쩍 넘는다. ‘백억’이 옆집 애 이름도 아니고. K-드라마의 존재감이 새삼 크게 느껴진다.

지난해 12월 21일 공개된 제작비 200억 원의 디즈니 플러스의 야심작 〈카지노〉는 제작비 350억 원의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수리남〉(2022)과 비슷한 점이 참 많다. 〈수리남〉이 배우 황정민 주연의 마약왕 이야기라면 〈카지노〉는 배우 최민식 주연의 도박왕 이야기다. 대한민국 대표 영화배우가 주연을 맡고, 불법적인 영역에서 존재감을 발산하는 다크한 캐릭터가 중심을 맡은 드라마. 그리고 두 드라마 모두 영화감독이 만들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두 드라마에서 다루고 있는 이야기의 시간적 배경 또한 아주 오래전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 넓게 퍼져 있다. ‘왕’은 아무나 되겠는가. 〈수리남〉은 왕이 되기까지의 긴 이야기를 굉장히 빠르게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군더더기가 없는 효율적인 서사 전개. 물론, 윤종빈 감독이 예전에 만들었던 영화 〈범죄와의 전쟁〉과 결이 비슷해서 창작적 새로움이 아쉽긴 하지만 구성면에서는 나무랄 데가 없다. 그런데, 〈카지노〉는 안타깝게도 스토리가 좀 많이 늘어진다.

자고로 시리즈물은 초반에 시선을 사로잡아야 하는데 3화까지 주인공 차무식의 젊은 시절 이야기가 느슨하게 이어진다. 인물을 깊이 있게 구축하는 것은 좋지만 문제는 차무식이란 인물이 새롭지 않아 오랫동안 설명할 필요가 없단 점이다. 자칫 4회까지 유튜브로 ‘요약보기’하고 차무식과 팽팽한 대립구도를 형성하는 경찰, 그러니까 배우 손석구가 나오는 5회부터 보기 시작하는 ‘환승’ 시청자들이 많지 않을까 살짝 걱정된다. 음. 200억

 

사진 제공: tvN

가격과 가치

제작비 때문에 방영 전부터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지고 시작한 〈카지노〉와 달리, 큰 기대를 받고 시작하진 않았으나 입소문이 나면서 가파른 시청률 상승세를 기록한 두 드라마가 있다. 꽃 피는 봄에 어울리는 tvN 〈일타스캔들〉부터 이야기해보자면, 1회 시청률이 4%였다. 하지만 6회에 10%대를 돌파하며 승승장구 흥행 대열에 합류하였다. 한때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더 글로리〉보다 화제성 지수가 높기도 했다는데, 소리 없이 강하다는 말은 이럴 때 써야 하지 않나 싶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반찬가게 사장 ‘남행선’(전도연 분)과 연 1조 원의 수학 일타 강사 ‘최치열’(정경호 분)의 티키타카 로맨스. 3040대를 위한 조금 세상을 아는, 살짝 나이가 있는 ‘어쩌다 어른’들의 로맨스코미디물이다. 극 중 최치열은 기존의 로맨스 남주와 비슷한 듯 다르다. 이제까지 로맨스 남주들은 완벽한 스펙과 더불어 보호본능을 일으키는 가슴 아픈 사연을 가지고 있었다. 알고 보면 마음 여린 츤데레 느낌이랄까. 하지만 최치열은 영혼뿐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보호본능을 일으킨다. 이름하여 ‘병약미’. 남행선과 부딪치면 최치열은 퉁겨져 날아간다. 넘어질 때도 종이인형처럼 다소곳이 주저앉는다. 작은 체구를 가진 배우 정경호의 인생캐랄까.

몸과 마음 모두 병약한 최치열은 죽은 언니 대신 조카를 딸 삼아 키우는 핸드볼 선수 출신 남행선과 티격태격하다가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하루는 최치열이 남행선에게 살짝 속마음을 털어놓는다. “수학은 명쾌하다. 근데 인생은 그렇지 않더라. 공식도 없고, 법칙도 없고, 틀릴 때마다 내가 또 뭘 잘못했구나 위축된다.” 그러자 남행선은 “인생이란 더듬더듬 답을 찾아 나가는 것”이라고, “이렇게도 해 보고 저렇게 해 보면서”라고 따듯한 위로의 말을 건넨다. 아, 누군들 남행선의 ‘일용할 양식의 위로’를 거부할 수 있겠는가.

최치열은 남행선이 만든 도시락을 먹기 위해 남행선 조카의 개인과외를 자처한다. 남행선의 1만원짜리 도시락과 연 1조 원 일타강사 최치열의 5천만 원짜리 30분 과외. 가격과 가치는 다르다는 명대사를 남기며 최치열은 사회가 부여한 남행선의 가격이 아닌, 내면의 가치를 알아보고 사랑에 푹 빠진다. 그렇다. 가격과 가치는 다르다. 드라마 제작비와 드라마의 가치도 다르다. 나는 200억짜리 미슐랭 코스 요리 〈카지노〉보다 소소한 가정식 백반 〈일타스캔들〉이 더 좋다.

 

사진 제공: jtbc

감동과 감탄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 배우 전도연, 정경호 주연의 〈일타스캔들〉보다 배우 이보영 원탑 주연의 JTBC 드라마 〈대행사〉가 나는 더 좋다. 2022년 최고의 화제작 〈재벌집 막내아들〉이 끝난 자리에 편성되었지만 후광효과는 1도 없었다. 1회 시청률 4.8%. 하지만 점차 입소문을 타면서 무서운 기세로 시청률이 상승하며 4주만에 12%를 기록했다. 제목 그대로 광고 대행사를 배경으로 자수성가 여성 임원의 치열한 생존기를 그린 오피스 드라마다.

일반적으로 오피스물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작품이 〈미생〉과 〈좋좋소〉다. 두 작품의 등장인물은 거의 다 남성이다. 하지만 〈대행사〉는 주요 인물이 여성이다. 첫 회 5분만 봐도 드라마 〈대행사〉가 어떤 스타일인지 느낌이 딱 온다.

예쁘장하게 생긴 한 소녀가 앞에 백마 탄 왕자가 나타난다. 왕자를 포함해서 모든 시청자가 ‘소녀가 왕자와 사랑에 빠지겠구나’라는 다소 뻔한 예상을 할 무렵, 그 어여쁜 소녀가 자기 앞에 나타난 왕자의 말 목을 베어버린다. 그리고 이어지는 새침한 목소리. “다른 여자애들이랑 달라서 놀랐니?” 주인공 고아인이 어떤 사람인지, 그녀가 만든 광고 한편으로 캐릭터 설명이 끝난다. 백마 탄 왕자 따윈 필요 없어!

드라마 〈대행사〉는 신입사원의 성장기가 아니라 무수저 지방대 출신 여자 상무의 생존기다. 신입사원의 성장기를 다룬 오피스물에 ‘감동’이 있다면 회사 임원의 생존기에는 ‘감탄’이 있다. 여성 최초 임원이 된 그녀에게 승리의 축하가 쏟아지자 그녀는 특유의 차가운 표정으로 응수한다. 이긴 게 아니라 살아남은 거라고. 끝없이 이어지는 야근에 집에 가서 쉬라는 동료직원의 말에도 그녀는 역시나 특유의 ‘냉미소’ 한방을 날린다. 죽은 다음에 쉬면 된다고.

피땀눈물로 이루어낸 그녀의 성공은 얼마 지나지 않아 ‘1년짜리 시한부 임원’이란 사실이 밝혀진다. 회장딸 강한나를 낙하산으로 임원 자리에 앉히기 위해 회사에서 일종의 보여주기식 인사를 한 것. 일 년 후, 대학교수와 작은 대행사 대표를 택일해서 조용히 물러날 것을 제안하는 회사의 럭셔리한 갑질 앞에 그녀는 결심한다. 그들과 싸워 버텨내기로.

회장 딸 강안나의 첫 출근날, 회사 임원들이 일렬로 서서 깍듯이 고개를 숙이는데, 고아인은 강한나에게 한 방 크게 먹인다. “모르는 거 많으실 테니까 앞으론 물어보면서 일하세요. 아무것도 모르면서 시키지 않은 일 하다가 괜히 사고치지 마시고.”

 

사진 제공: jtbc

고아인과 강한나

이쯤 되면 삶이 너무나 쉬워 보이는 ‘무능한 재벌 3세’ 강한나를 향한 혐오의 감정이 생기기 마련이다. 하지만 드라마 〈대행사〉는 상투적이고 진부한, 쉬운 그 길을 가지 않는다. 강한나는 겉으로 보기에는 SNS를 즐기는 생각 없는 관종 같지만 알고 보면 본능과 직감으로 사업을 하는 타고난 장사꾼이다. 재미난 에피소드 하나. 어느 날 아침, 강한나는 재벌 회장 아버지한테 요거트를 내민다. 그리고는 아버자기 요거트 먹는 모습을 몰래 라이브로 내보낸다. “여러분 보셨죠? 요거트 만드는 회사를 가진 우리 아빠도 뚜껑을 핥아먹습니다.” 아버지의 호통을 뒤로 하고, 요거트 매출 급상승, 회사 이미지 급호감.

드라마 초반, 고아인과 강한나는 ‘다이아몬드수저’와 ‘무수저’로 굉장히 다른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스토리가 전개될수록 처지가 굉장히 비슷하다는 걸 알 수 있다. 고아인은 다른 남자 임원과, 강한나는 ‘장손’ 오빠와 불합리한 시스템 안에서 치열하게 경쟁한다. 물론, 남성 중심의 기성 체제에 맞서 두 사람은 연대를 맺는 훈훈함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제까지 여성 서사를 다룬 기존의 드라마들과 달리, 두 사람은 서로에게 인간적 호감을 느껴서 손을 잡는 게 아니다.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실용적 관계이기 때문에, 기브앤테이크가 명확한 “전략적 관계”이기 때문에 연대한다.

오피스드라마는 일종의 (사내)정치물로 세상 사는 법을 배울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다. ‘선연애 후결혼’으로 이어지는 로맨스물의 공식도 깨진 마당에 오피스물도 이제 ‘선실속 후연대’로 성큼 넘어가자~ 지나친 훈훈함도 신파의 아류일 뿐이다. 아차차. 시선 강탈 여성 캐릭터가 한 명 더 있다. 카피라이터 조은정. 극 중 비중은 작지만 소리 없이 굉장히 강한 인상을 남기는 신스틸러다. ‘남녀 로맨스 케미 대신 일 잘하는 언니들’의 케미가 맛집 드라마 〈대행사〉. 강추합니다.

 

 


김민정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연두빛 캠퍼스물과 회색빛 오피스물 사이를 분주히 오가고 있다. 언젠가는 내 인생이 장르가 판타지로맨스코미디홈드라마가 될 거라고 굳게 믿고 있다. 2022년 중앙대학교 교육상과 제4회 르몽드 문화평론가상을 수상하였다. 현재 《쿨투라》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크리티크 M》 편집위원과 KBS World Radio 〈김형중의 음악세상〉 고정 게스트로 활동하며 자발적 드라마 홍보대사로 열일하고 있다. 저서로 드라마 캐릭터 비평집 『드라마에 내 얼굴이 있다』 외 여러 권의 책이 있다. 

 

 

* 《쿨투라》 2023년 3월호(통권 105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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