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용 리뷰] 느림의 미학으로 탐색하는 인간의 생명력: 시나브로가슴에 〈태양〉
[무용 리뷰] 느림의 미학으로 탐색하는 인간의 생명력: 시나브로가슴에 〈태양〉
  • 임수진(무용평론가)
  • 승인 2023.03.06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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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춤.

바이러스 팬데믹, 자연재해, 제어할 수 없는 영역 너머의 거대한 힘을 마주하게 된 인간의 삶은 미래를 향해 관성적으로 달려가는 속도를 서서히 줄이고, 이내 잠시 멈춘다. 2020년 3월 11일 세계보건기구WHO가 코로나 바이러스를 펜데믹으로 규정한 후, 우리의 일상은 유래 없는 멈춤을 경험했다. 일상적인 것이 일상적이지 않은 하루하루를 느리게 마주하게 된 인간은 본질적인 것, 삶과 죽음, 생명과 희망, 가족과 사랑, 그리고 살아있음에 대해 비로소 생각해본다.

2023년 2월 발표된 시나브로가슴에COMPANY SIGA의 〈태양〉(2월10일-12일, 대학로예술극장 / 공연예술창작산실 올해의신작)은 팬데믹 속의 인간, 나아가 인류의 근원과 존재, 관계, 생명력을 탐색한다. 작품은 치명적인 바이러스에 의해 탄생한 신인류와 구인류 간의 갈등과 화합을 그리는 일본 극작가 마에카와 도모히로의 동명 희곡을 원작으로 한다. 국내에서는 2021년 두산아트센터에서 공연(김정 연출)된 바 있는데, 당시 안무로 참여한 시나브로가슴에의 예술감독 이재영은 그때의 영감을 토대로 무용 작품 〈태양〉을 창작하였다고 한다.

 

객석에 들어서자 무대의 가장 앞, 객석과의 경계에 놓인 거대한 조명 장치가 보인다. 이 천장 높이 지름의 원형 철제 프레임에 달린 조명들이 빛을 비추며 태양을 상징하고, 관객들은 이 태양 너머의 무대를 지켜보게 된다. 곧 무용수 한명이 등장해 태양의 중심에 선다. 그리고 암전. 무대와 객석 모두 깜깜하다. 통상 공연의 암전은 무대의 장면 전환을 위해 1-2분 이내로 이루어지는 데 반해, 계속 어둠이다. 10분 가까이 계속되는 암전에 관객들은 서서히 어둠의 공간에 익숙해진다. 눈을 잠시 감았다 뜨고, 숨을 크게 한번 내쉰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여전히 깜깜한 무대 위 무용수들을 발견한다. 서서히 그들의 움직임을 따라간다.

 

〈태양〉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옥상훈

무용작품에서 발견하기 드문 이 흥미롭고 과감한 도입부는 〈태양〉의 배경이 되는 상황에 무대 뿐 아니라 객석의 관객까지 끌어들인다. 사실 이 부분은 원작 희곡을 접했거나 최소 공연 프로그램북에 설명되어 있는 작품의 세계관에 대해 사전에 인지한 경우, 즉 바이러스가 창궐한 후 탄생한 신인류가 구인류에 비해 신체적으로는 월등히 진화하였으나, 태양에 취약해 어둠 속에서만 활동할 수 있다는 배경을 인지하면 더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연극과는 달리 무용 〈태양〉은 서사적 흐름 보다 이미지 자체를 시각화하고 있는 만큼, 원작에 대한 선행 지식 없이도 충분히 공연에 몰입할 수 있다.

 

〈태양〉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옥상훈

이내 빛이 들어오자 무용수들의 움직임이 더욱 뚜렷하게 목격된다. 다만 여전히 느리다. 이전의 많은 작품에서 이재영의 춤이 몸의 생명력을 생동감으로써 시각화 해 확장했다면 이번 작품은 몸의 에너지를 땅으로, 내면으로 응축시킨다. 상반된 두 인물의 대립과 화해, 인간 무리의 공존 등은 무용수들의 느리고 유유한 춤으로 시각화 된다. 이 느린 움직임의 미학은 잠시 멈춤으로써 비로소 보이는, 생명의 탄생과 소멸, 그리고 존재의 본질에 한발짝 다가가는 새로운 탐색이다. 발산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이 내재적 움직임들이 관객들에게는 다소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으나, 공연 끝까지 밀고 나가는 일관된 강단과 특유의 세련된 연출은 이재영의 묵직한 내공을 훌륭히 반영해낸다.

동명 연극을 관람하지 않았지만, 아마도 다양한 인물들의 갈등과 화해의 과정을 통해 구체적인 서사가 진행되었을 것이라 예상한다. 반면 무용 〈태양〉은 ‘멈춤’ 과 ‘느림’을 통해 내면으로의 탐색을 추구함으로써 주제를 천착했다는 점이 주목할 만 하다. 희곡에 원작을 두고 있지만 태양이라는 소재, 그리고 인류의 생명력과 화합 등의 주제를 차용하여 이미지화 할 뿐, 드라마적 서사를 따르는 무용극이 아니다. 무음에서 현악, 왈츠 등 음악의 전환이 무대를 조금씩 변화시키지만 점진적으로 쌓인 움직임들이 한번에 분출하는 절정의 순간은 부재한다. 느리게 흐르는 시간 안에서 서서히 화합해가는 두 인물의 움직임이 담담하게 그려질 뿐이다. 많은 현대무용가들은 몸을 통해 에너지를 표출하는데 주목해왔다. 어쩌면 〈태양〉은 오늘날 현대무용의 비슷한 움직임 탐색과 표현의 홍수에 권태를 느끼는 무용 관객들에게 ‘속도’와 ‘기본’, 그리고 ‘몸’을 기반으로, 인간의 생명력을 품어내는 느린 춤의 미학을 도전적으로 선사함으로써 안무가 이재영의 위상을 한 단계 높인 작품이 아닐까 싶다.

 

 


임수진 퍼포먼스연구(performance studies)를 기반으로 무용 및 공연예술에 대한 글을 쓰고, 강의한다. 한양대, 뉴욕대(NYU), 성균관대에서 공부했고, 무용월간지 몸 편집장을 역임했다.

 

 

* 《쿨투라》 2023년 3월호(통권 105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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